소설리스트

환관무제-105화 (105/648)

제105장: 혼쭐을 내주마

‘얼굴 변하는 게 거의 변검 수준이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날 죽이려고 하다가, 이젠 웃어?’

“제 천리마를 걸죠.”

여천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 천리마는 이미 내 손에 있잖아. 이미 내 것인 것을 내기에 걸 수는 없지.”

‘진짜 얄미워 죽겠군. 내 손으로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을 지경이야.’

여천천이 혈관음에게 시선을 돌리면서 물었다.

“아, 쟤를 내기에 거는 건 어때?”

두변은 순간적으로 정말 여천천을 죽이고픈 충동에 휩싸였다.

‘아무리 한혈보마라고 해도 그렇지. 저 악독한 년이 감히 혈관음을 말 한 필이랑 비교해?’

여천천은 혈관음의 지인을 매수해서 혈관음에게 아편을 먹였다. 두변이 아니었다면, 혈관음은 평생을 아편 때문에 괴롭게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여천천이 혈관음을 아편에 중독시킨 이유는 바로 혈관음을 손아귀에 넣고 철저하게 조종하고 싶어서였을 터.

여씨 가문은 진남공의 친딸인 옥진 군주와의 정혼에 실패한 뒤로, 진남공부에 보복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왔다. 여씨 가문의 소주인은 아쉬운 대로 진남공의 의녀인 혈관음을 첩으로 들이겠다고 몇 차례 진남공에게 청을 올렸지만, 진남공은 매번 단호하게 그의 청을 거절했다.

이번에 여천천이 혈관음을 내기에 걸라는 뜻은, 이번 기회에 혈관음을 여씨 가문의 첩으로 만들어서 여씨 가문이 진남공에게 받았던 치욕을 되돌려주겠다는 뜻이리라.

“왜? 내가 많이 봐준 거야. 내 한혈보마 운니의 가치는 값을 매길 수조차 없거든. 운니는 나의 자랑이자 상징, 그리고 나의 목숨과도 같은 존재인데, 혈관음은 표면적으로만 진남공의 의녀이지, 사실상은 부모도 없는 고아 해적이잖아? 내 한혈보마가 혈관음보다는 훨씬 더 귀하지 않나?”

여천천이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혈관음은 피가 거꾸로 솟으면서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여천천의 말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혈관음의 마음속 가장 깊고 연약한 곳을 난도질했다.

하지만 혈관음은 여천천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고, 아름다운 두 눈으로 두변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두변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변의 마음에서 자신의 무게는 얼마나 될지가 궁금했다.

두변은 여천천의 갸름하고 예쁘장한 얼굴을 쏘아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아주 대낮에 개꿈을 꾸고 있네. 버르장머리없는 년.”

여천천은 자신이 지금 뭘 들은 건지 믿기지 않아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상에 지금 내가 년 소리를 들은 거야?’

여천천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가 자신을 욕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여천천의 부모는 그녀를 애지중지 키우느라 당연히 험한 말 한 번 하지 않았고, 진남공은 물론이거니와 경성에 있는 황제 폐하도 그녀를 웃는 얼굴로 대했다. 황후와 태후도 여천천을 보면 아주 살갑게 안부를 물으며 온갖 선물을 주기 바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여천천은 황실에서 준 선물을 한 번도 소중히 여기지 않았으며, 거의 선물을 받자마자 아랫것들에게 던져주곤 했다. 그리고 부친에게 황실에선 자신의 눈에 차지도 않는 선물만 준다면서 불평했고, 황실 사람들이 쪼잔하다고 욕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여여해가 웃으면서 황제가 쪼잔한 게 아니라, 가난뱅이라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때 이후로 여천천에게 티끌만큼 남아 있던 황실에 대한 경외심도 영원히 사라졌다.

‘황후와 태후조차도 나를 싸고도는데, 네깟 환관 나부랭이가 나를 욕해?’

여천천은 이를 부득 갈면서 눈 깜빡할 사이에 검을 빼 들고 두변의 목을 향해 달려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두변의 목숨을 앗아갈 셈이었다.

챙!

혈관음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두변을 향해 찔러오는 여천천의 검을 막았다.

혈관음의 얼굴은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고, 그녀의 두 눈에는 감격스러움이 가득했다.

어느 세상이든 간에, 여인들은 사내가 자신을 위해 싸워주는 걸 무척 좋아한다. 두변이 혈관음을 위해서 여천천에게 버르장머리없는 년이라는 심한 욕을 했으니, 혈관음이 이보다 더 기분 좋을 수 있을까.

“여봐라. 엄당의 저 개새끼를 밖으로 끌고 나가서 사지를 찢어버리고, 집에서 키우는 개에게 먹이로 던져줘라.”

여천천이 굳은 표정으로 명을 내렸다.

대청 문 앞에서 우왕좌왕하던 여씨 가문의 가장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누가 감히?”

두변이 근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천천, 이 세상에서 당신을 건드리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겠지. 황제, 황후, 태후조차도 당신을 어르고 달래셨겠고. 그건 당신네 여씨 가문이 토사이기 때문이다. 황제께서는 당신들이 반역을 일으킬까 봐 어르고 달래시는 것뿐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많다. 황제, 태자, 공주, 황후, 태후, 동창의 감독, 사례감의 대인들까지, 누구든 명령 한 번이면 나를 쉽게 죽일 수 있지. 그런데 말이지. 토사 여씨 가문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아.”

여천천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내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싱긋 웃더니, 검을 다시 검집 안으로 넣었다.

“여봐라. 저 개새끼를 매질해서 집 밖으로 내쫓아라. 아, 죽기 직전까지만 때리는 것 잊지 말고. 그리고 저놈의 천리마는 오늘 당장 죽여서 말고기로 대령해라.”

여천천이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여씨 가문 가장들이 나무 몽둥이를 하나씩 집어 들고 두변 등을 내쫓을 기세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홍면과 이도진은 아직도 대치상태였고, 혈관음은 검을 쥐고 두변을 보호하는 자세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두변이 돌연 웃더니, 다시 여천천에게 존칭을 써가며 말을 걸었다.

“여 소저,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화를 내실 필요가 있습니까. 저는 절대로 혈관음을 내기에 걸지 않을 겁니다. 제겐 그럴 자격과 권력이 없거든요. 하지만 내기에 다른 걸 걸 수는 있습니다.”

“관심 없어. 엄당의 개새끼가 걸 수 있는 게 뭐 있다고. 우리 여씨 가문에는 없는 게 없다. 진남공부에게 보복하려는 것만 아니었다면, 네놈과 혈관음 저년의 목숨값은 운니의 말발굽 반쪽보다도 못해.”

‘내가 여천천에게 버르장머리 없는 년이라고 했으니, 나를 엄당의 개새끼라고 하는 것쯤은 넘어가줄 수 있지.’

두변이 제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 검의 이름은 창천검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옥진 군주께 하사하셨던 검이지요. 그리고 옥진 군주께서 이 검을 제게 선물하셨는데, 이 검을 내기에 거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지게 된다면, 이 검을 드리지요.”

여천천은 깜짝 놀란 눈으로 두변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여씨 가문이라도 줄곧 옥진 군주는 감히 손댈 수 없는 존재로 여겨왔는데, 옥진 군주가 황제에게서 하사받은 보검을 별 볼 일 없는 두변에게 줬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송옥진의 검이 어째서 네놈의 손에 있는 거지?”

여천천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두변이 대답했다.

“우리 둘다 영종오 대종사의 제자입니다. 옥진 군주께서 사제에게 보검 하나 선물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입니까?”

여천천은 두변이 손에 쥐고 있는 창천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실 창천검이 보검이긴 하나, 여천천은 아쉬울 게 없었다. 여씨 가문에 온갖 보검은 이미 다 갖고 있었다.

하지만 창천검이 옥진 군주가 늘 차고 다녔던 검이라면, 그 검은 여천천에게 몹시 큰 의미를 갖게 된다.

여씨 가문은 진남공부를 미워하다 못해 증오하기까지 했는데, 그중 여천천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옥진 군주와 영설 공주였다. 물론, 둘 중에 더 싫은 사람을 꼽자면 여천천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옥진 군주라고 대답할 것이다.

‘서남의 제일 미인이 왜 송옥진인데? 나 여천천보다 송옥진이 더 예뻐? 용모, 몸매, 집안 배경으로 따져봤을 때, 나 여천천이 송옥진보다 못한 게 뭐야?’

여천천은 옥진 군주에게 치욕을 안겨줄 이 절호의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내가 송옥진의 보검을 손에 넣게 된다면, 그 검으로 개똥을 치울 것이고, 불쏘시개로 쓸 것이야. 그리고 송옥진을 앞에 두고 보란 듯이 검을 산산조각 내 버려야지. 그걸 본 송옥진은 화가 나서 돌아버리지 않을까?’

여천천은 창천검을 가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짜릿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천검이 운니와 견줄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 내기는 결과가 뻔히 보이는 내기였고, 여천천이 승패에 관한 걱정을 전혀 할 필요가 없는 경기였다. 두변이 내기에 건 물건이 충분히 매력적인지라, 여천천은 자연스럽게 마음이 동했다.

“좋아. 그 창천검을 걸도록 해. 내일 천룡 마장의 단혼 구간에서 경마 시합을 하도록 하지. 만약 네놈이 이기면 천리마와 내 운니를 가질 수 있고, 네가 지게 된다면 송옥진의 창천검은 내 것이 되는 거야. 그리고 네놈이 조금 전에 내게 한 실언에 대한 벌로 네 혀를 반 토막 내야겠다. 어때?”

‘전갈보다도 독한 년이로군. 사소한 원한 하나로도 지구 끝까지 쫓아올 기세네.’

두변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아, 내기에 제 혀를 자르는 걸 더 걸었으니까, 저도 하나 더 걸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이기게 된다면, 소저께서 스스로 따귀를 한 대 치는 걸로요.”

“그래. 약속하지.”

여천천이 흔쾌히 대답했다.

“구두로 한 약속은 증거가 없으니, 백지흑자(白紙黑字)로 남기시죠. 저홍면 노장군과 이도진 종사께서 증인이 되어주시고요.”

두변이 말했다.

두변의 옆에 서 있던 혈관음은 심경이 복잡하고도 불편했다. 심지어 그녀는 알 수 없는 상실감까지 들었다.

다행히도 혈관음은 곧 이런 상실감의 원인을 찾아냈다.

천리마를 빼앗긴 사람은 바로 자신인데, 지금껏 말을 되찾기 위해서 자신이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두변은 제 존엄을 위해서 천하의 여천천에게 욕을 해댔는데, 정작 자신은 두변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지 않은가.

이 사실을 직면한 혈관음은 못 견딜 정도로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는 두변을 위해 뭔가를 증명하고 싶었고, 그를 위해 뭐라도 하고 싶었다.

“잠깐!”

혈관음이 소리쳤다. 그리고 두변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말했다.

“잠깐 이리로 와 봐.”

두변은 갑작스러운 혈관음의 행동에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혈관음이 두변을 대청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물었다.

“말을 탈 줄도 모르면서, 어떻게 이기겠다는 거야?”

두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꿈의 세계에서 <수어록 기마편>을 학습하는 건 하룻밤이면 충분하겠지. 정신술을 활용해서 말을 조종할 수만 있다면 큰 무리 없이 이길 수 있어. 정신술을 쓰는 건 게임에서 핵을 쓰는 것과 같으니까. 내가 어떤 행동을 할 필요 없이 말과 정신적 교류로 명령을 내리는 거니까. 어쩌면 정신술로 말의 잠재력까지 폭발시킬 수 있지 않겠어? 말과 내가 한 몸이 된 것처럼, 말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테니까.’

“이길 수 있습니다.”

두변이 대답했다.

확신에 찬 두변의 모습에 혈관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한 번 믿어보지.”

혈관음이 여천천 앞으로 와서 말했다.

“두변의 천리마는 내가 잃어버린 것이니, 이 내기판엔 나도 관련되어 있다. 내가 이 내기에 관여할 자격이 있다는 뜻이지. 만약 두변이 이기게 된다면 천리마와 운니는 그의 것이 되는 건 변함없다. 하지만 그가 지게 된다면, 너는 창천검을 가질 수도 그의 혀를 자를 수 없다. 다만, 내가 여씨 가문의 사람이 되도록 하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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