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06화 (106/648)

제106장: 잡념이 집념으로

모든 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천천이 가장 원했던 것이 바로 두변이 혈관음을 내기에 거는 것이었다.

두변은 안색이 사색이 되어서는 혈관음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혈관음 저 뚱딴지 같은 여인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두변이 있는 힘껏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당신 미쳤어요?”

혈관음은 자신을 말리지 말라는 듯이 그의 손을 잡아 꼼짝 못하게 했다.

“천리마는 내 손에서 잃어버린 것이니, 내가 끝까지 책임져야지.”

혈관음은 다른 한 손으로 붓을 쥐고 내기 서약을 쓴 뒤, 가장 아래에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두변이 발버둥 치면서 혈관음을 제지하려고 했지만, 붓을 내려놓은 혈관음이 재빨리 두변의 뒤로 가서 왼쪽 팔로 두변의 목을 감싼 뒤, 오른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저홍면이 혈관음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것아, 정말 이대로 해도 괜찮은 것이냐?”

혈관음이 대답했다.

“두변이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전 두변을 믿습니다.”

여천천도 혈관음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놀라 어리둥절했지만, 어찌 됐든 혈관음의 결정은 자신에게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혈관음은 진남공의 의녀이니, 혈관음이 여씨 가문에서 온갖 치욕스러운 일을 겪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남공의 체면을 짓밟는 일이기 아니겠는가.

여천천도 대답 대신 붓을 쥐고 서약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백지흑자로 남겨진 내기 서약은 확실한 효력이 생겼다.

혈관음은 자신의 희생적인 행동에 자아도취되었다. 자신과 두변의 관계가 다시금 평등해졌으며, 자신이 수동적으로 남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 아닌, 좀 더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기분에 뿌듯해했다.

여천천이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사랑이란 건 참, 사람을 맹목적이고 멍청하게 만들어. 근데 혈관음의 취향이 참 독특하네. 두변은 무려 환관인데.”

여천천의 노골적인 조롱에 혈관음의 얼굴이 새빨갛게 상기했다.

‘아니 잠깐만, 두변은 나를 위해서 여천천에게 욕 한마디 한 게 다잖아? 그게 무슨 보호야?’

여천천의 말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이 든 혈관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혈관음은 저도 모르게 여천천의 말을 부정했다.

“헛소리! 나는 옥진 군주의 보검이 네 손에서 망가지는 걸 원하지 않을 뿐이다.”

혈관음은 뒤늦게 밀려오는 민망함에 이 자리에 더 이상 있기가 힘들었는지, 다급하게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난 먼저 간다.”

혈관음은 밖으로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얼굴이 붉어져서는, 이윽고 목까지 새빨개지고 귓불은 핏방울이 맺힌 것처럼 빨개졌다.

두변은 말문이 막힌 채 어이없는 표정으로 혈관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그는 혈관음의 행동에 무척 감동한 동시에 화가 나기도 했다.

‘혈관음, 이 멍청한 여자야,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

조금 전, 혈관음은 두변을 힘으로 제압하면서 내기 서약을 자신이 썼고, 두변이 제지하려고 해도 제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무리 날 위해서 희생하고 싶다고 해도, 내 의견 좀 물어보면 안 되냐? 이렇게 무턱대고 날 위해서 희생한다면, 내가 얼마나 피동적인 사람처럼 보이겠냐. 누가 봐도 제 앞가림 하나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잖아.

에라이. 지구에서든, 지금의 세계에서든, 내가 여인들을 숱하게 많이 봤다만, 혈관음 당신처럼 멍청한 여인은 또 처음 보네.’

토사 공주 여천천은 내기 서약이 쓰인 종이를 입으로 후후 불어서 먹을 말렸다.

“시간도 늦었는데. 그만 좀 꺼져줄래?”

여천천은 이보다 더 무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손님을 내쫓았다.

“내일 정오에 천룡 마장 단혼 구간에서 봐. 엄당 개새끼에게 무엇이 진정한 기마술인지 내가 친히 보여줄게. 아주 절망적일 거야. 아 참, 올 때 혈관음을 깨끗하게 씻겨서 와.”

하기야 혈관음 자신도 자기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심지어 혈관음은 자신의 삶에는 정이란 것도, 사랑이란 것도 없다고 생각해왔다.

굳이 사랑을 논한다면, 혈관음은 이번 생에는 자신의 가족인 진남공부 사람들만 사랑하겠다고 결심했었다.

혈관음은 의부인 진남공 덕에 지금의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의부가 자신을 의녀로 거둬주신 덕에 무예를 익힐 수 있었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강인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번 생엔 남자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평생을 의부를 위해 효심을 다하겠다고 다짐했고, 이 때문에 지금껏 사내를 가까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날 두변과 그녀 사이에 있었던 일은 무척이나 의외인 일이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날 이후로 혈관음의 마음에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잡념이 하나 자리 잡기 시작했다. 원래는 그 잡념이 차지하는 자리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 두변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되니, 그 잡념이 집념으로 바뀌었다.

조금 전에도 뭔가를 증명하고자 충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기에 걸어버렸다. 그리고 그 행동을 후회하긴커녕, 알 수 없는 행복감까지 느꼈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준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인가 싶었다.

이때, 두변이 혈관음을 쫓아 나왔다.

두변의 발걸음 소리를 듣자, 혈관음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변 앞에 서 있을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쫓아오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두변이 뒤에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정말 미친 겁니까? 난 여인을 내기에 걸 만큼 형편없는 놈이 아니라고요.”

혈관음은 걸음을 멈추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이건 내 선택이다. 너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환장할 노릇이네. 시커멓고 살기 넘치는 사내들을 이끄는 해적 우두머리인데, 어쩜 저렇게 유치한 말을 할까. 아무리 강인한 여인이라고 해도, 감정 앞에서 한없이 유치해지는 건 똑같나 보네.’

두변이 아무런 대꾸가 없자, 혈관음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두변,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라. 내가 내린 결정은 다 너와 무관하다.”

혈관음은 진지해진 목소리로 몸을 돌려서 말을 이어갔다.

“옥진 군주는 나와 자매인 동시에 내 주인이기도 하다. 옥진 군주가 네게 선물해준 그 보검을 차마 내기에 걸 수 없어서 그랬을 뿐. 폐하께서 하사해주신 창천검이 여천천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진남공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 천리마를 잃어버린 사람은 나니까, 내가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것이고.”

두변은 진지한 얼굴의 혈관음을 바라보았다. 혈관음은 본심을 애써 숨기고 부정했지만,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진심을 어찌할까.

두변은 그녀를 바라보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대로라면 두변은 아주 멋들어지고 미려한 말들을 내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나서 한 번 웃으니 지난 은원이 사라졌습니다.’라든가,

‘강호를 누비는 호걸들은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는군요.’라든가,

아니면 ‘서로 미약한 힘을 보태며 도와주기보다는, 차라리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제 갈 길 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라든가.

하지만 두변은 저 말들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가 쓰레기 같은 사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욕에 눈이 먼 짐승도 아니었다.

혈관음의 속이 훤히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서, 두변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이렇게 해버리면, 내가 어떻게 보답하겠어요?”

혈관음의 예쁜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두변을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보답할 필요 없다!”

혈관음은 누구보다 빠르게 대문을 나선 뒤, 말 위로 몸을 날려서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녀는 가능한 두변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아주 황금보다도 귀한 아이 아니더냐?”

저홍면의 목소리가 두변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두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예, 하지만 저는 환관이고 보잘것없는 놈입니다.”

저홍면이 말했다.

“뭐든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두면 그만이다. 여인들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사내놈이라면 눈치 없이 그 행복을 끊어내선 안 되지.”

만약 사내가 이런 말을 했다면 벌써 맞아 죽거나 거세를 골백번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한 것은 노장군 저홍면이니, 괜찮았다.

저홍면도 혈관음처럼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이었다. 저홍면은 마음 깊이 진남공 송결을 사모했지만, 한 번도 그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고, 상대방이 어떠한 응답을 해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건 오직 상대방이 자신의 희생을 거절하거나 중단시키지 않는 것이었다.

저홍면이 이어서 말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내일 있을 시합을 제대로 치러야겠구나. 절대로 아이들 장난질로 여기면 안 된다. 시합의 결과에는 네 천리마도 걸려 있지만, 관음도 걸려 있으니 말이다.”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목이 잘리는 한이 있어도 내일 있을 시합에서 절대 질 수 없었다.

‘내가 또 한 번 거세를 당해서 정말 아무것도 없는 환관이 된다고 해도, 혈관음을 여씨 가문의 손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지.’

“천룡 마장의 단혼 구간에 관해서 들어본 적 있느냐?”

저홍면이 물었다.

두변은 당연히 천룡 마장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곳은 진남공 송결이 기마병을 훈련하기 위해 만들어낸 곳으로, 일찍이 십만 대군이 주둔한 적도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기마술이 크게 성행해서, 각지에서는 각양각색의 경주 시합을 열었고, 경마 내기에 얼마나 많은 돈이 흘러 들어갔을지는 아무도 모를 정도였다.

군대에서, 권문세가에서, 토사 연맹에서, 민간에서 매년 다양한 기마술 시합이 열리기도 했다.

천룡 마장에는 각종 경주로와 장애물 구역이 있고, 온갖 지형지물이 모두 마련되어 있었다. 천룡 마장은 단순히 기마병 훈련 때만 쓰이는 게 아니라, 각종 기마술 시합에도 쓰이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단혼 구간은 천룡 마장에서 가장 극한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경주로였다. 먼저, 산 아래에서 해발 900미터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하고, 그다음엔 1킬로미터에 달하는 흔들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리고 몹시 협소한 천협곡(天峽谷)을 빠져나온 뒤에 굽이굽이 꼬여있는 절벽 외길을 타고 종점까지 가야 한다.

단혼 구간에서 진행되는 경주 대부분은 참가자가 종점까지 가지 못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정말 극한의 경주로인지라, 말과 기수에 대한 능력치 수준이 굉장히 높았다. 기수가 잠시라도 방심하거나, 말과의 교감이 어긋나게 된다면, 뼈도 못 추릴 정도의 처참한 결과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단혼 구간에서 매년 많은 말과 기수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정말로 자신 있느냐?”

저홍면이 물었다.

두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두변은 경주로의 난이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좋았다. 그래야 기수와 말 사이의 교감이 더욱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고, 말의 속도가 조금 느리더라도 괜찮을 테니까.

정신력으로 말을 조종하는 것이야말로 구령이나 채찍, 말고삐를 잡아당기는 것보다 열 배 이상 정확하다. 그래서 경주로가 어려울수록 두변에겐 더욱 유리한 시합이 될 것이다.

물론 두변이 오늘 밤에 <수어록 기마편>을 완전히 독파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두변이 하룻밤 만에 깨우쳐야 하는 것은 남들이 1, 2년의 시간을 들여도 모자랄 정도의 기술이었다.

“그래, 알겠다. 내일 나는 병사들을 이끌고 천룡 마장으로 가서, 전반적인 시합을 감독할 것이다. 여씨 가문에서 또 남몰래 무슨 수를 쓸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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