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장: 정신 나간 소리
저홍면, 두변, 그리고 혈관음 세 사람이 떠난 대청 안.
여천천이 말했다.
“여봐라. 그놈들이 앉았던 의자를 모조리 태워버려라. 여기 바닥도 싹 갈아버리고.”
“알겠습니다.”
노복이 대답했다.
여천천은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지 덧붙였다.
“의자를 태우고 바닥을 갈아엎은 뒤에, 여기 대청을 봉쇄해버려라. 앞으로 아무도 이곳을 쓸 수 없다. 엄당 개새끼 지린내가 진동하니까.”
여천천은 그 누구도 감당하기 힘든 성깔을 가지고 있었다.
두변은 염주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저홍면과 함께 낭군 대영으로 돌아갔다.
노장군은 마지막 물자를 기다리고 있던 터라, 모레쯤이면 영지를 철수하고 부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갈 예정이었다.
혈관음은 조금 전보다 상태가 괜찮아졌지만, 여전히 속내를 들킬까 봐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다. 두변은 행여나 혈관음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그녀에게 가벼운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이 말은 꽤 영리한 전투마다. 네 기마술 실력도 볼 겸, 한 번 올라타 보아라.”
저홍면이 말했다.
두변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꿈의 세계에서 훈련하지 못 했는데…….’
두변은 말 위로 올라탄 뒤 말고삐를 손으로 꽉 쥔 채, 두 발로 말의 복부를 힘껏 찼다. 그가 탄 준마가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내달리자, 두변의 허리가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뒤로 젖혀지고 말았다. 두변은 그제야 재빨리 몸을 낮췄다.
출발부터 아주 형편없는 실력이었다.
준마가 달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빠르게 달릴수록 말 등이 심하게 흔들렸다. 두변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말고삐 대신 말의 목을 부둥켜안았는데, 갑작스러운 두변의 행동 때문에 준마가 초조하고 불안했는지 두변을 떨어뜨리려고 목과 몸을 필사적으로 흔들었다.
말의 목을 부둥켜안고 간신히 말에 매달려 있는 두변의 모습은 안쓰럽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했다. 두변이 기마술의 ‘기’자도 모르는 왕초보인 게 탄로 나는 순간이었다.
저홍면은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준마의 뒤를 쫓아와서 허공에 붕 떠 있는 말고삐를 낚아챘다. 이와 동시에, 빠르게 달리던 준마가 일순간 제자리에 멈춰 섰다.
정말 감탄스러운 무공 실력이었다.
“두변, 말을 몇 번 타보았느냐?”
저홍면이 물었다.
“거의 안 타 봤습니다.”
“환관 학원에 기마술 과목이 있지 않느냐? 그럼 그 수업은 어떻게 들었고?”
“기마술 수업 때마다 땡땡이를 쳤습니다.”
저홍면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호통쳤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네놈이 지금 관음의 목숨을 어린아이 장난 정도로 여긴 것이냐!”
노장군이 이토록 화내는 게 지극히 정상이긴 했다. 기마술을 한 번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자가 무려 기마 신동이라고 불리는 여천천과 경주 시합을 벌이는 꼴이었으니.
여천천은 대여섯 살 때부터 말을 타기 시작했고, 그녀의 기마술은 말과 동심일체라고 볼 정도였다.
여천천이 제멋대로인 데다 성격이 괴팍하지만, 검술과 기마술만큼은 진심으로 좋아했다. 평소 심심할 때 그녀가 하는 취미 생활이 바로 극악 난이도의 경주로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서남 지역의 토사 연맹 자제들 또한 말을 타는 것을 몹시 즐기고 내기 경주를 좋아했지만, 무슨 경주 시합을 벌이든 승리는 언제나 여천천의 것이었다.
게다가 여천천이 탈 말은 영리하기로 소문난 한혈보마로, 천리마를 능가하는 준마인데, 기마술 한 번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두변이 그런 여천천을 상대한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웃을 노릇이지 않겠는가.
저홍면은 두변의 명성을 들어본 적 있었다. 특히 3대 학부 대회에서 그가 거둔 영예로운 승리 소식을 들었던 터라, 그를 재능이 출중한 청년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저홍면은 본능적으로 두변의 기마술이 그의 작문, 문예 실력만큼 뛰어날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두변이 한 번도 기마술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 아이 정신이 제대로인 게 맞나? 이문회의 안목은 아주 정확하고, 의자에 대한 요구사항이 굉장히 수준 높을 텐데, 문회가 이렇게 정신머리 없는 놈을 의자로 거둬들였을 리 없는데?’
저홍면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혈관음을 쳐다보았다.
“관음, 두변이 말을 탈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
“네, 알고 있었습니다. 말해준 적 있습니다.”
“그럼, 두변이 말을 탈 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무모한 내기를 한 것이야? 여씨 가문이 네게 어떤 파렴치한 마음을 품고 있는지 빤히 알면서도 너 자신을 내기에 걸어? 안 되겠다. 너는 돌아가지 말고, 바로 낭군 부대에 합류하거라. 모레 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자꾸나. 이런 치기 어린 일로 네 인생을 망치지 말아라.”
“저는 두변을 믿습니다. 두변은 하룻밤 사이에 기마술을 연마해올 겁니다.”
저홍면이 의아한 눈빛으로 혈관음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 아이가 정말로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건가? 그렇게 황당무계한 말을 믿다니!’
기마술, 궁술, 무슨 기술이든 간 필요한 건 물리적인 시간의 축적이다. 그리고 기마술은 개인의 노력과 더불어 말과의 교감이 무척 중요한 기술이다. 어떤 기마병들은 기마술을 익히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말 등에 묶어놓고 말과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도 족히 몇 년의 시간을 들여야만 좋은 기마술을 익힐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몇 년을 노력한다고 해도 여천천에 능가할 실력을 갖추진 못할 자가 대부분이겠지만.
그런데 살면서 말도 몇 번 안 타본 두변이 하룻밤 사이에 고급 기마술을 배워오겠다고 하고, 여천천을 이기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니.
저홍면의 입장에서 두변의 말은 정신 나간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두변, 네가 내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해줘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화가 많이 날 것 같다.”
저홍면이 두변을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두변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노장군, 저는 일전에 정신 각성술을 익혔습니다. 그래서 영종오 대종사의 <수어록 기마편>을 완벽히 학습하기만 한다면, 직접적으로 말과 정신적인 교류를 할 수 있고 제 몸처럼 말을 쓸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경주로가 복잡하고 난이도가 있을수록 제겐 더욱 유리한 일입니다.”
저홍면이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벌써 정신 각성술을 익혔다고?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렇습니다.”
“영종오 종사의 <수어록>을 내 두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들은 적은 있다. 정신술의 최상급 경서와도 같은 책이라지. 그런데 내용이 너무도 어려워서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 각성하게 되더라도, 최소 2년은 더 써야만 그 책을 독파한다고 들었다. 하룻밤 사이에 한 편을 완독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저홍면의 말이 맞긴 했다. 영종오의 모든 비적들은 마치 다른 세상 언어로 쓰인 것처럼 어려웠고, 99퍼센트의 사람들은 아예 한 글자도 읽지 못할 수준이었다. 나머지 1퍼센트의 천부적인 재능이 차고 넘치는 사람들마저도 최소 2, 3년은 더 공들여야만 영종오의 비급 한 편을 완독할 수 있었다.
아무튼 영종오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무도 이론가였다. 만약 이 세계에 노벨상이 존재했다면, 영종오는 무려 몇 개 부분의 노벨상을 수상했을 것이다. 이 세계의 수학 수준을 고려하면 노벨상 수학 부문까지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고.
두변이 말했다.
“노장군, 제가 입으로만 하는 말이 못 미더우신 것 압니다. 두 눈으로 보실 수 있도록 해드릴 테니, 제게 딱 하룻밤의 시간만 주십시오.”
저홍면이 두변을 한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네가 한 말을 완벽히 이해하진 못하겠다. 아주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라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네가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 놈이 아니라, 착한 아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네게 딱 하룻밤의 시간을 주마. 내일 아침이 되자마자 네 기마술 실력을 확인하러 올 것이다. 만약 그때도 지금과 같은 수준이라면, 관음을 낭군 부대에 합류시켜서 함께 남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절대로 너 때문에 우리 관음을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넣을 수 없다.”
두변은 저홍면을 향해 정중히 읍을 하면서 예를 올렸다.
“노장군, 감사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네가 내일 아침에도 지금과 같은 실력을 보여준다면, 나는 네게 무척 실망할 것이다. 너는 내 신임을 잃을 것이고, 내일부로 낭군 부대와 안륭 토사부는 너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소리다. 나는 맨입으로 헛소리를 하면서 황금보다도 진귀한 아이를 불구덩이에 던져넣는 놈과 친구가 될 수 없거든.”
저홍면의 단호한 얘기에 혈관음이 다가와서 재빨리 변명했다.
“노장군, 이건 다 제가 자처한 일이고, 원해서 한 일입니다.”
저홍면이 혈관음에게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손을 저은 뒤, 두변을 빤히 바라보았다.
두변은 다시 한번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알겠습니다, 노장군.”
이때, 어디선가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변 오라버니, 아니, 두변 숙부. 난 숙부를 믿어요.”
저홍면 노장군의 손녀 저영수가 두변이 준 계화당 봉지를 여전히 품에 안은 채 말했다. 계화당이 얼마 남지 않아서, 아까워서 더는 먹지 못하고 봉지에 계화당을 남겨둔 모양이었다.
예쁘장하고 앳된 얼굴의 저영수가 말똥말똥한 눈동자로 두변을 바라보았다. 저영수의 눈빛에는 두변을 향한 친근함과 믿음이 가득 묻어났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인지라, 저영수는 그저 호감과 직감으로 두변을 믿는 것이다.
“고맙다. 이 숙부가 절대로 너를 실망시키지 않으마.”
두변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딱 하룻밤의 시간이면 돼. 내일 아침에 다들 놀라서 입이 떡 벌어질 준비하라고.’
의욕이 충만한 두변은 저녁을 먹기도 전에 저홍면이 준비해준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침상 위에 앉아서 조용히 눈을 감고 꿈의 세계로 들어갔다.
두변은 최근 며칠 동안 꿈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했기에, <수어록 기마편>도 학습하지 못했다.
다행히 오늘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바로 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고, 진귀한 비급을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며칠 전까지는 공부를 하려는 의지가 충분하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두변은 영종오 대사의 비적을 며칠 동안 품에 품고 다녔고, 시간이 날 때마다 꺼내서 읽곤 했다. 하지만 비급 내용이 너무 심오한지라, 현실에서는 족히 두어 시간을 써야만 고작 한 장 정도의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서너 장을 읽은 뒤에는 다시 자연스럽게 첫 장을 펼치게 된다. 내용이 너무 복잡하고 비급에 나오는 준마들의 정신 파장이 어찌 보면 비슷해서 헷갈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꿈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확연히 달라졌다.
두변이 읽었던 모든 장의 내용이 아주 선명하고 정확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게다가 모든 내용이 아주 직관적인 화면으로 표현되었다. 심지어 준마들의 복잡한 정신 파장이 움직이는 그래프로 표현되었다.
두변은 자신의 송과선으로 정신력을 통제하고, 송과선을 통해서 만들어낸 정신 파장으로 준마와 교감을 시도할 수 있었다.
교감이 정확하게 이루어지게 되면, 사람과 말의 정신 파장이 공명을 일으키게 되고, 두변은 군마의 모든 움직임을 직접 제어할 수 있게 된다.
정말 현묘하고 끝내주는 기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