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13화 (113/648)

제113장: 참혹한 패배

두변의 기록은 여천천의 최단 기록의 절반이었다.

아니 이건 누가 더 말을 잘 타냐가 아니라, 허공을 날 줄 아는 건지를 겨루는 시합 아니야?

저홍면과 혈관음은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여씨 가문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들은 지금이 꿈인지 생신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먼 곳에서 이 시합을 지켜보고 있던 검마 이도진도 이런 결과가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제자인 여천천이 기마에 얼마나 열광적이고 열정적인지도, 얼마나 천재에 가까운 기마 실력을 가진지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여천천보다 기마술이 더 뛰어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영설 공주나 옥진 군주 정도의 사람들이 그럴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그 사람들 중에 환관 학원의 나부랭이인 두변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두변이 승리를 거뒀고, 그것도 아주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며 승리했다.

이런 결과를 마주한 여씨 가문의 사람들은 차라리 지금이 꿈속이길 바랐다.

아니, 그들은 지금이 꿈속이라고 해도 이런 결과를 믿을 수 없었다.

저홍면 노장군이 말했다.

“이 종사, 여천천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이번 경주 시합은 두변의 승리가 맞겠죠?”

이도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녀의 기운이 사방에 도사리고 있었다.

저홍면의 말을 듣자, 이도진은 조금 전처럼 검집의 끝으로 땅을 툭, 하고 찍었다.

이도진은 종사로서, 이런 별것도 아닌 시합에 자신의 명예를 더럽힐 만한 부정행위는 저지르지 않았다.

슈우욱!

그사이 두변은 빠르게 종점을 지나쳤다.

결국, 두변은 여천천과의 경주 시합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혈관음은 흥분한 나머지 두변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걸음을 떼자마자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너무 부끄러웠다.

말에서 내린 두변이 말했다.

“이도진 종사, 조금 전에 절벽 위에서 누군가가 제게 화살을 쏴서 기습 공격을 했습니다. 여씨 가문의 무사들과 동창 무사들, 그리고 저홍면 장군의 무사들 몇 명을 보내서 범인을 찾아주십시오.”

두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의아해하면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넌 괜찮고?”

혈관음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괜찮긴 합니다. 아홉 발 연발 화살을 아주 아슬아슬하게 피했죠.”

잠시 뒤, 검마 이도진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여씨 가문에서 세 명, 저홍면 쪽에서 세 명, 그리고 동창 소속인 이삼과 이사까지, 무사들은 범인을 잡기 위해 한꺼번에 모여서 두변이 가리킨 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여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낸 이유는 범인을 잡기 위한 게 아니라, 동창과 저홍면이 두변을 습격한 사람이 여천천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었다.

여천천은 스스로 느끼기에 아주 만족스러운 실력으로 흔들다리를 건넜고, 일선천 협곡을 지났다. 그리고 마지막 구간인 위험천만한 회오리 절벽에서도 크게 속도를 줄이지 않고 빠르게 달렸다.

여천천은 짧디짧은 몇 분 만에 몇천 미터 되는 벼랑길을 완주했다.

이제 남은 건 몇백 미터 평지로, 여천천은 그곳에서 전력질주할 계획이었다.

여천천은 또 한 번 자신이 제 기록을 갱신했다는 것에 뿌듯해하며, 사람들의 환호성과 탄복에 취할 준비를 했다.

여천천은 애초에 두변이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매 시합은 자신과의 싸움이었고, 늘 새로운 기록을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천천이 이 시합을 하기로 한 이유는 딱 하나. 혈관음을 손에 넣은 뒤, 그녀를 오라비의 침상에 넣기 위함이었다. 여천천은 혈관음이 오라비에게 어떤 치욕스러운 짓을 당하든 전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진남공부에 복수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심산이었다.

한혈보마는 천 미터쯤 되는 평지에서 다시 온몸의 힘을 폭발해서 질주했고, 그 속도는 조금 전과 같은 초속 23미터에 달했다.

불과 10여 초 후, 터질 듯한 육감적인 몸매의 여천천이 사람들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천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여씨 가문 사람들의 환호성을 기다렸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녀를 반기는 것은 어색하고 조용한 공기였다.

왜들 저러는 거야? 내가 너무 빨라서 놀랐나?

여천천은 정말로 다시 한번 자신의 기록을 깨트렸다. 그녀의 최단 기록은 31분이었지만, 오늘은 30분도 채 되기 전에 종점에 도착했으니,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했다.

그러나 두변은 17분 만에 완주했고, 이 세계의 시간으로 환산하자면 1각 조금 넘는 정도의 시간이었다.

여천천은 사람들이 박수도 치지 않고, 그저 이상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채고는 그 예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깜짝 놀라서 흠칫 몸을 떨었다.

두변과 야생마가 바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네, 네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거냐? 설마 시합을 포기한 거야?”

두변이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다시 되돌아와서 시합을 포기했다는 가설이 여천천이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이었다.

두변이 말했다.

“에이, 괜한 걱정을 하시긴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제 증인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저 두변은, 바로 저 절벽로에서 달려왔는데요.”

그렇다. 이곳에 있던 모두가 그 장면을 보았다.

여천천은 아름다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격앙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다. 죽었다 깨나도 그럴 리 없다고. 나는 기마 천재이고, 내겐 세상에서 제일 좋은 한혈보마가 있잖아. 네깟 놈이 나보다 한순간이라도 더 빨랐을 리가 없다고.”

“맞는 말씀이십니다. 제가 당신보다 한순간쯤 빨랐던 게 아니라, 당신보다 배로 빨랐죠. 제가 단혼 구간을 완주하는 데 쓴 시간은 고작 1각입니다.”

두변이 말했다.

터무니없이 황당한 말을 들은 여천천은 저도 모르게 두피가 저릿해졌다.

1각 만에 단혼 구간을 완주했다고?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너무도 분노한 여천천은 두변이 자신의 지능을 욕보였다는 생각에 곧바로 명을 내렸다.

“파렴치하게도 두변이 시합을 포기하고는 종점으로 돌아와서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여봐라. 혈관음을 잡아서 데려가라.”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씨 가문의 무사들은 난감해하면서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도 황당한 상황이지만, 여천천은 알 수 없는 불길한 기분에 휩싸였다.

여천천이 외쳤다.

“사부!”

이도진의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네가 졌다. 두변은 1각 만에 단혼 구간을 완주했다.”

여천천에게 있어서 이도진의 말은 곧 금구옥언이었다.

이도진의 말을 듣고도 이 상황이 더욱 비현실적이라고 느낀 여천천은 말 등 위에서 고개를 힘껏 저었다. 굴곡 넘치는 여천천의 몸매가 함께 흔들렸다.

“아니야, 절대로 그럴 리 없어. 네 이놈!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누가 너 대신 시합에 참가한 거 아니야?”

사실 여천천은 물으면서도 누군가가 두변을 대신해서 시합에 참가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시합을 위해서 천룡 마장, 여씨 가문, 저홍면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감독관 열댓 명이 구간 곳곳에 숨어있었다.

여천천의 세계관이 뒤엎어지는 순간이었다.

‘1각 만에 단혼 구간을 완주했다고? 그, 그럴 리 없어!’

어렸을 때부터 쌓아왔던 그녀의 모든 영예가 한순간에 산산조각나 버렸다.

모든 기마술 시합에서 1등을 휩쓸었던 영광이 무너져 버렸다.

화려했던 모든 것이 웃음거리로 전락되었다.

두변이 자신보다 아주 조금 더 빨랐던 게 아니라, 자신이 세운 기록을 반 토막 낼 만큼 빨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몇 년간 힘들게 쌓아왔던 영광이 새까만 재가 되어버린 기분에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엄청난 불덩이가 그녀의 가슴속을 마구 헤집고 있었다.

안 그래도 과하게 발육된 여천천의 그곳이 거칠어진 호흡만큼이나 심하게 흔들리고, 꼭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활화산이 된 것 같았다.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인 여천천이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해낸 거냐.”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왜 알려줘야 합니까?”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천천 소저, 약속을 이행할 때가 됐네요. 천리마를 제게 돌려줘야 하고, 소저 허벅지 사이에 있는 그 한혈보마 운니도 제 것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소저가 실언한 것에 대한 대가로 스스로 따귀를 올려쳐야 합니다. 아, 그렇다고 해서 소저가 얻은 게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적어도 신조어 하나는 배우는 겁니다.”

두변이 입꼬리를 쓰윽 올리면서 말을 덧붙였다.

“쪽팔리다!”

여천천은 격노하다 못해 뚜껑이 열릴 지경이었다.

두변이 능청스러운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여천천 소저,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어떡합니까. 얼른 약속을 지켜야죠. 소저 허벅지 사이, 아니, 소저는 지금 제 말을 타고 있는 셈이니, 이제 그만 내려오시죠.”

모든 사람의 시선이 토사 공주 여천천을 향했다.

이 여인은 기고만장 그 자체였고, 하늘을 찌르는 오만함과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나려 했다.

여천천의 적수가 그녀의 성질을 감당하지 못하는 건 차치하고, 그녀를 모시는 여씨 가문의 무사들도 그녀의 성질머리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니 여천천이 약속을 파기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녀가 이 약속에 대해 입을 싹 닦고 모른 척하는 것이 그녀가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만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이치나 도리 따위를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지 않던가.

혈관음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천천, 설마 약속을 어기려는 건 아니겠지?”

저홍면은 검자루에 손을 올리며 천천히 말했다.

“이도진 종사, 이 시합은 두변이 이겼다는 것에 이견이 있는가?”

“없습니다.”

검마 이도진이 대답했다.

저홍면 노장군이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바로 이 시합의 증인이고, 내기 서약을 감독하는 사람이지. 만약 여천천이 서약을 파기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검마 이도진이 대답했다.

“저는 도리보다 내 사람이 우선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천천이 약속을 어기고 싶다 하면, 저 또한 천천을 도와 이 서약을 파기할 것입니다.”

이도진의 말과 함께, 그녀의 압도적인 기운이 숨 막히는 살기로 변했다.

자리에 있던 말 몇 마리가 갑자기 격하게 울부짖으면서 뒷걸음질 쳤다.

누가 사제지간 아니랄까 봐. 어쩜 저리도 똑같이 무례할꼬.

저홍면이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자를 거느리는 일대 종사임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어기려 하는군. 그러고도 사람들 앞에 떳떳이 서 있을 수 있나? 무슨 자격으로 종사라 불리냔 말인가.”

이도진이 말했다.

“제가 종사라 불리는 이유는 검술 무공 덕분이지, 인품 덕이 아닙니다.”

종사로서의 체면도 지킬 생각 없다는 이도진의 대답에 저홍면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스릉.

저홍면이 검을 반쯤 뽑자, 그녀의 뒤에 있던 수십 명 정예 무사들도 동시에 허리춤에서 검을 절반쯤 뽑았다.

하지만 여씨 가문의 무사들은 아예 검집에서 검을 완전히 뽑아 들었고, 궁수들은 화살을 올리고 활시위를 당겼다.

이때, 어디선가 나타난 이도진이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한 걸음씩 움직였고, 그녀가 내뿜는 살기가 천룡 마장 전체를 뒤덮었다.

저홍면과 이도진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르렀고,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이젠, 아무도 여천천이 약속을 어기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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