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장: 따귀를 올려치는 여천천
여천천은 서서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여천천이 두변, 저홍면과 혈관음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들 내가 약속을 어길 것이라 생각하는군. 그렇지?
왜, 그런 말 있잖아. 어떤 약속이든 간, 약속하는 그 순간이 바로 약속을 깨기 위한 준비라고. 대국 사이의 서약마저도 그러한데, 사사로운 내기, 도박이면 더하지 않겠어? 나도 약속을 어기는 날이 있겠지. 나도 내가 맹세한 것을 저버리는 날이 있을 거야.”
여천천이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게 오늘은 절대로 아니다. 너희들을 위해서 내가 약속을 어기기엔, 너희들이 너무 보잘것없거든.”
두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저 건방진 녀석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르네?’
여천천이 말 등에서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만일 내가 내기에서 졌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게 스스로 따귀를 올려치는 거였나?”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모든 사람이 시선이 여천천의 아름답고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얼굴로 쏠렸다.
여천천이 오른손을 들고, 자신의 뺨을 향해 세게 내리쳤다.
짝!
여천천은 보여주기식이 아닌, 정말로 힘을 실어서 자신의 뺨을 때렸다.
이와 동시에 새하얀 눈과도 같던 여천천의 뺨 위로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
두변의 눈빛이 또 한 번 흔들렸다.
‘저 건방진 녀석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정말 다르군.
기고만장한 동시에 극도로 고집이 세고 극도로 교만해. 약속은 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종이로 남긴 서약은 쓰고 난 휴지쪼가리만도 못하다는 걸 빤히 알지만, 오늘의 약속은 어기지 않는다라.’
여천천은 자신이 약속을 어기지 않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했다. 두변은 자기가 약속을 어길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란 걸.
스스로 뺨을 때린 여천천이 이어서 말했다.
“다음으로 약속한 것, 천리마를 돌려주겠다.”
여천천이 손뼉을 한 번 치자, 멀리서 마부 한 명이 아주 예쁜 백마 한 필을 끌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일만 오천 냥 은자의 값을 제대로 하는 천리마였다. 천리마에게서 느껴지는 신비로운 기운은 여천천의 한혈보마에 못지않았다.
여천천이 이어 말했다.
“그리고 세 번째 약속. 나의 영광이자 나의 전부인 한혈보마 운니를 주마.”
한혈보마는 여천천과 수년을 함께 울고 웃었고, 그녀에게 많은 기쁨과 영광을 안겨주었다.
화끈한 몸매의 여천천이 운니의 등에서 내려온 뒤, 이도진 앞으로 다가갔다.
“사부, 제가 제일 잘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검술, 천부적인 무도 재능이지.”
이도진이 대답했다.
“맞아요. 제가 가장 잘하는 건, 바로 천부적인 무도 능력으로 갈고닦은 검술이에요. 2년 전에 정신력 각성을 했고, 서남 지역에서 가장 빨리 정신력 각성을 한 사람이죠. 저는 2년 전에 벌써 7품 무사에 도달했고, 서남 지역의 7품 무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죠.”
여천천이 말했다.
두변은 속으로 놀랐다.
‘저 건방진 녀석의 무도 실력이 그 정도로 뛰어나다고? 2년 전이면 고작 열예닐곱이었을 텐데, 그때 벌써 7품 무사를 통과했다니. 그 정도의 천부적인 재능이라면 옥진 군주 못지않은 건데. 아주 절대적인 천재라는 뜻이야.’
물론, 여천천은 기마술에서도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다.
다만, 차원이 다른 수준의 인마합일 기술을 가진 두변과는 애초부터 상대가 안 될 싸움이었을 뿐이다.
“나는 하늘이 내린 천재로, 누군가와 무예를 겨룰 일이 없었지. 그래서 무도 실력을 향상하는 데에 태만해졌고, 오히려 기마술에 몰두하게 되었다. 매년 서남 도사 연맹에서 기마술 대회를 열었고, 나는 1등의 짜릿함에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 보내는 환호와 박수갈채에 취했고, 나의 천재적인 기마 재능 또한 토사 연맹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어. 하지만 다들 잊었던 게 있는데, 난 사실 검술 천재다.”
여천천이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나도 잊었던 게 하나 있다. 허세 가득한 기마술 따위는 이런 난세에서 내 몸 하나 지킬 수도 없는 잔재주에 불과하거든. 무도만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지. 무도 능력이 강해져야만 아버지의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고, 여씨 가문의 권세와 영예가 날로 거대해질 수 있다.”
여천천이 두변에게 시선을 돌리고 한마디씩 끊어서 말했다.
“난 어디에도 쓸모없는 기마술 따위에 몰두하지 않을 것이다.
두변, 천리마를 돌려받고 싶다고 했지? 가져가라.
두변, 내 한혈보마 운니도 가지고 싶다고 했지? 마음껏 가져가라.”
여천천이 손을 뻗어서 한혈보마 운니를 쓰다듬더니 운니의 목에 다정하게 입맞춤했다.
여천천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지더니, 이내 싸늘한 살기와 매정함, 그리고 고집이 어렸다.
“하지만 내가 썼던 것, 혹은 내가 가졌던 건, 없애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남에게 못 준다.”
여천천이 차가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천리마를 달라고 했나? 내 운니를 갖고 싶댔지?”
푸슉. 푸슉.
여천천이 황금 비수를 품에서 꺼내더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쓰다듬고 있던 운니의 목에 비수를 꽂아 넣었다. 그리고는 눈 깜빡할 사이에 옆에 있던 천리마의 목에도 비수를 찔러 넣었다.
한혈보마와 천리마가 동시에 고통스럽게 울부짖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땅에 무릎을 꿇으면서 쓰러졌다. 두 말의 목덜미에서 선홍빛 피가 쉼 없이 솟구쳤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 광경에 경악했다.
화가 치밀어 오른 두변은 눈가가 찢어질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여천천이 두변을 바라보면서 한마디 했다.
“두변, 내 말 믿어라. 우린 금방 다시 보게 될 거다. 하지만 다음에 날 보게 될 땐, 그날이 네놈 제삿날일 줄 알아라.”
그때 갑자기, 두변은 귀가 먹먹해지더니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목덜미의 어느 부분이 점점 더 차가워지면서 마비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중독되었구나!
조금 전에 강현이 쐈던 화살은 두변을 맞추진 못했지만, 아주 살짝 스치긴 했다.
피가 날 정도도 아니었고, 피부가 까질 정도도 아니었지만, 강현의 화살촉에 발라진 것은 맹독이기에, 피부에 조금만 묻게 되어도 피부 속으로 침투하여 중독을 일으킨다.
“여천천, 네 이년! 내가 꼭 네년을 죽이고 말 것이다!”
눈앞이 완전히 새카매진 두변은 그대로 뻣뻣한 자세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큰일 났다. 두변은 독에 중독된 게야!”
저홍면이 말했다.
혈관음이 두변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목이 이미 검게 변하기 시작한 걸 발견했다.
혈관음이 두변의 검게 변한 목 부위를 비수로 가르자, 그곳에서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상황은 너무도 위급했다. 뇌와 너무 가까운지라, 독이 그대로 두변의 뇌로 번질 수 있었다.
혈관음은 즉시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즉시 두변의 목 상처에 입을 대고 미친 듯이 독을 빨아내기 시작했다.
뒤에 있던 저홍면이 놀라서 소리쳤다.
“관음, 그러다 네가 죽어!”
이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여천천은 여씨 가문의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저홍면이 여천천의 뒤통수를 향해 외쳤다.
“어딜 가는 것이냐! 뻔뻔하고 비겁한 소인배 같으니라고. 경주 시합에서 졌다고 독을 써서 사람을 해쳐?”
사실 두변이 중독 증세를 보였을 때, 여천천도 살짝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저홍면의 질책을 듣자, 여천천은 콧방귀를 뀌면서 대꾸했다.
“두변이 중독된 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 저놈이 죽는다고 해도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내가 가겠다는데, 누가 감히 내 앞길을 막아요.”
저홍면이 곧바로 검을 뽑아 들고 여천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챙!
이도진의 검이 저홍면의 앞을 가로막았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히고 불꽃이 사방에 튀었다.
이도진의 몸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수준이었지만, 저홍면 노장군은 연달아 몇 걸음을 뒷걸음질 쳤고, 가슴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끼면서 울컥 올라오는 피를 토해냈다.
검마 이도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천천 등을 거느리며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그사이, 천룡 마장의 마부 두 명이 한혈보마와 천리마에게 달려가, 두 말의 상처 부위를 손으로 강하게 지압하면서 주위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어서! 어서 상처를 봉합해야 합니다! 이 말들은 아직 살 수 있다고요!”
누구보다도 말을 사랑하던 마부 둘은 살아생전 한 번 보기도 힘든 두 말이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해있으니,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두변의 야생마가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한혈보마의 상처를 혀로 핥아주더니, 두변을 깨우려는 것처럼 그에게 다가가 다리를 부비적거렸다.
경성, 동창 대도독 이연정(李連亭)의 저택.
경성의 동창 고위층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만호, 진무사 이상 급의 동창 어르신들이었고, 어마감, 병기사의 대환관, 심지어 사례감의 어르신까지 있었다.
이문회 홀로 대청 중앙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승운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이문회를 광서 동창 진무사에 봉한다.”
이문회가 큰절을 올리며 외쳤다.
“신, 폐하를 받들겠사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뒤이어 이문회는 동창 대도독 이연정의 손에서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들었다.
드디어 이문회가 가장 중요한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동창 만호에서 진무사로 진급하였고, 생각했던 것보다 성지가 빨리 내려왔다. 그는 환관 학원의 졸업 시험이 끝나기도 전에 진무사가 된 것이고, 광서 환관 학원 산장직도 겸임하게 되었다.
황제와 엄당의 고위 간부가 이문회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좋게 보는 건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문회는 자신의 진급에 두변의 공로가 크다고 생각했고,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자신의 의자가 떠올랐다.
“의부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문회는 공경한 태도로 이연정을 향해 세 번 큰절을 올렸다.
이연정은 올해로 나이가 예순아홉인지라, 눈썹과 머리카락이 벌써 태반은 새하얬다. 그는 사내로 태어났지만, 여인보다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자였다. 젊었을 땐 누가 봐도 잘생기고 어여쁜 용모를 가졌지만, 검 끝과도 같은 눈썹이 그의 인상을 매우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연정은 엄당의 가장 큰 거물 중 한 명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사례감 장인(掌印) 환관이 엄당의 당수지만, 실질적인 지도자이자 가장 큰 권위를 가진 자는 동창 대도독이었다.
이연정은 진정한 최고 수준의 우두머리였다. 절대적인 무공 실력, 제국을 향한 충심, 황제를 향한 충의를 겸비한 그는 엄당을 이끌며 피도 눈물도 없는 수단과 방법으로 문관, 무관 집단과 십수 년을 투쟁해 왔다.
대녕 제국을 통틀어서 보았을 때도 이연정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발을 한 번 굴렀다 하면 온 경성, 심지어 제국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였다.
이문회에게 있어서 이연정은 그의 은인이자, 아버지이자, 사부였다.
이문회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이연정의 의자가 되었고, 그 후로 쭉 이연정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하였으니, 이문회는 이연정에게 태산과도 같은 은혜를 입은 셈이었다.
이문회가 자신의 의부를 향한 마음 중 7할은 존경이고, 남은 3할은 두려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