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장: 엄당 지도자의 후계자
“일어나거라.”
이연정이 이문회를 일으키고는 그의 손목을 잡고 대청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 동창, 어마감, 병기사, 심지어 사례감의 형제들을 한자리에 모은 이유는, 여러분이 이 늙은이의 증인이 되어주길 부탁하기 위함이오.”
모든 사람이 숨을 참으면서 중대한 순간을 기다렸다.
“오늘부로, 문회는 나의 후계자가 될 것이오.”
동창 대도독 이연정이 단도직입적으로 발표했다.
일순간 대청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이문회를 향한 부러움과 경외감이 섞인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부 사람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
이문회는 드디어 동창 주인 자리를 공식적으로 이어받을 후계자가 되었다.
이어서 동창의 주인이자, 제국의 거물인 이연정이 어딘가를 향해 말했다.
“손자야, 이리 오거라.”
용맹해 보이는 젊은 환관 한 명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반듯한 자세로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위풍당당한 영웅의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도무지 어딜 봐도 환관 같지 않고, 잘 버려둔 날카로운 검과도 같았다.
용맹한 젊은 환관이 이연정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소손 이원(李元), 조부를 뵙습니다.”
이연정이 다른 한 손으로 이원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 아이가 바로 나의 손자이오. 환관 학원에서 가르침을 받게 하는 대신, 내가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키웠지. 북쪽에서 전투를 한 번 치렀는데, 몇 개월 만에 삼백 명 넘는 적장 수령의 머리를 베었었소.
그리고는 원(元) 대장군을 따라 건로와 전투를 치렀었는데, 이 아이가 혼자서 백구십 명의 머리를 베어왔고, 그중 두 명은 천호이고, 한 명은 만호였소.”
건로족은 아주 막강한 실력을 가진 세력인 만큼, 그들의 수령을 죽이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었다. 그들의 머리 두어 개를 베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이원이라는 이제 갓 스물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 백구십 개에 달하는 건로의 머리를 베었고, 심지어 그중 두 명은 천호, 한 명은 만호라는 의미는, 그가 어마어마한 무공 실력을 지녔다는 의미였다.
지금 제국에선 군공을 가장 쳐주는데, 그 정도 훈공이면 얼마나 위풍당당할 것인가.
최근 2년 사이에 이원이라는 이름이 북방에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무장 집단에서 또 한 명의 빛나는 신인이 등장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이원이 엄당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원이 입이 떡 벌어지는 정도의 공로를 쌓은 덕에, 황제가 친히 그를 불러서 보검을 한 자루 하사해주었다.
이연정이 이원에게 말했다.
“이원, 무릎을 꿇고 네 의부께 예를 표하거라.”
그리고 이연정이 고개를 돌리고 이문회에게 말했다.
“문회, 오늘부터 이원은 네 의자이자, 네 후계자가 될 것이다. 알겠느냐?”
이문회는 이연정의 말을 듣고는 번개라도 맞은 사람처럼 큰 충격에 휩싸였다.
얼마 전에도 누군가가 이문회에게 당엄을 의자로 받아들이고, 그를 후계자로 삼으라고 협박에 가까운 제안을 했었다.
그때 이문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다. 그 제안을 한 사람이 광동 환관 학원 산장인 왕굉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이문회에게 의자를 받아들이라고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은인이자 하늘이자 의부인 이연정이었다. 그리고 그가 받아들여야 할 의자는 의부가 친손으로 키운 의손이었다.
이는 동창의 주인이자, 제국의 거물이자, 엄당의 실질적 지도자인 이연정이 한 제안이었다.
아니, 이건 제안도 아닌 명령이었다. 이연정의 아주 강력한 의지가 느껴지는 명령인데, 이문회가 이를 거절할 수 있을까.
게다가 경성의 엄당 어르신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보니, 이문회가 이 자리에서 이연정의 제안을 거절했다가는 상상도 못 할 정도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하지만 이문회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큰절을 올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부, 제겐 이미 의자가 있습니다.”
동창 주인인 이연정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나도 알지. 이릉과 두변 아니더냐. 그 둘도 참 착한 아이들이지.”
“의부, 두변이라는 아이는 정말 대단한 아이입니다. 제가 다음에 한 번 데려와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좋지. 그 아이에 관해선 나도 들었다. 참 괜찮은 아이더구나. 나중에 이원을 잘 보좌하면서 둘도 없는 좋은 형제가 될 수 있겠어.”
이문회로서는 이 제안을 거절할 구실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연정은 아예 못을 박을 것처럼 이문회의 말에 대꾸했다.
이원은 동창의 다다음 번 주인이 될 것이고, 두변은 그저 그를 보좌하는 역할에 그치라는 의미였다.
이문회는 이연정을 탓하지 않았다. 이연정이 손수 키운 아이는 이원이지 두변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의부 이연정이 두변이 얼마나 천재인지를 모르고 있으니 그럴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이문회에게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 결정의 순간, 위험의 순간이 찾아온 셈이었다.
이문회가 또 한 번 큰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의부, 제 아들 두변은 재능이 정말 출중한 아이입니다. 부디 그에게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미 그 아이에게 제 후계자 자리를 약속했습니다. 제 유일한 후계자로요.”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이문회를 쳐다보았다. 동창 주인인 이연정도 흠칫 놀라면서 안색이 싹 변했다. 그는 이문회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신임하고, 제일 아끼는 의자가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내 명령을 거역해?
동창의 주인이자, 제국의 거물인 내 체면은 안중에도 없다는 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문회는 내 뒤를 잇는 다음 세대의 동창 주인이라고 발표했는데?
이렇게 눈 깜빡할 사이에 공개적으로 내 의지에 반한다?’
“음.”
이연정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낮은 노호가 울리기 시작했다.
일순간 주위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대청 안을 밝히던 촛불들이 순식간에 이연정의 기에 짓눌려 실내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대부분 사람이 재빨리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은 이연정의 무공이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두렵다 못해 오금이 저릴 정도라는 건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연정이 무공을 썼던 때가 벌써 20년 전이었고, 상대는 종사였다. 그 결과 이연정은 이겼고, 그와 무공을 겨뤘던 종사는 죽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연정은 황궁의 최상급 어전 고수였고, 그는 황제의 마지막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이연정으로서는 아주 살짝 기운을 내뿜은 것뿐인데, 대청 안의 사람들은 흡사 용의 울음을 들은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지고 숨이 막혀왔다.
이연정은 화가 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문회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아들인데, 왜 아비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걸까.
이원은 자신이 직접 키운 손자로, 이 아이가 얼마나 훌륭한지, 다다음 세대의 엄당 지도자가 될 자질이 얼마나 충분한지는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런데 이문회는 도대체 왜 그의 뜻에 반하는 것일까.
한참을 지난 뒤, 이연정이 입을 열었다.
“문회, 정정할 기회를 한 번 주마. 재차 고심한 뒤에 네 결정을 말하거라. 너도 알지 않느냐. 잘못 말했을 경우의 결과가 어떠할지.”
이문회는 바닥에 이마를 세게 찧으면서 또 한 번 큰절을 올렸고, 엎드린 자세로 말했다.
“의부, 저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이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엄당의 미래를 위해, 제국의 미래를 위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문회는 침을 꿀꺽 삼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변이야말로 향후 엄당 지도자 자리에 어울리는 진정한 후계자입니다. 의부, 부디 그 아이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의부, 소자 문회의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소자는 어떠한 대가도 치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동창의 주인 이연정이 말했다.
“문회, 가규가 어떠한지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손윗사람의 말에 거역하는 건 무슨 죄에 해당하느냐?”
“거역죄입니다.”
“어떤 벌을 받게 되어 있고?”
“죄질이 중할 경우엔 처형을, 그렇지 않을 경우엔 사지를 부러트리고 무공 능력을 완전히 빼앗은 채로 집에서 쫓게 되어있습니다.”
이연정은 엎드린 이문회의 머리 위로 높이 손을 들었다. 살짝 내리치기만 해도 이문회의 두개골은 으스러지게 될 것이고, 이문회는 즉사할 것이다.
“거역죄를 감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뜻이냐? 말을 바꾸지 않을 테냐?”
이연정이 또 물었다.
이문회가 다시 한번 힘껏 이마를 땅에 찧으며 붉어진 눈시울로 말했다.
“소자의 목숨은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니, 아버지께서 제 목숨을 앗아가고자 하신다면 말 한마디면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소자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그간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셨던 무한한 은혜에 감사드릴 것입니다. 하지만 제발 두변에게 기회를 한 번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 아이가 자기 자신을 증명할, 다른 사람들과 공평하게 견줄 기회를 제발 한 번만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그럼 소자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어서 이문회는 미친 듯이 이마를 땅에 찧었고, 대청 안에는 그의 이마가 바닥에 찧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마를 어찌나 힘껏 찧는 건지, 이문회는 몇 번 큰절을 올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머리에서 난 피가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이문회는 거짓을 고한 게 아니었다. 이연정이 그를 죽이고자 한다면, 이문회는 그가 손 쓸 필요도 없이 한마디 원망도 없이 자결할 것이다.
이연정은 허공에 든 손을 살짝 내리치기만 해도 자신의 말에 거역하는 불효막심한 이문회를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이연정의 손은 아까부터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연정은 몹시 화가 나기도 했지만,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지금껏 단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너무도 완벽하고 자랑스러운 의자가 갑자기 오늘 같은 자리에서 자신의 명을 거역하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문회가 의부이자 동창 주인인 자신의 뜻에 이렇게까지 반하는 이유가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 모를 두변이라는 놈 때문이라는 것에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
이연정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포효를 내지르더니, 손바닥을 옆으로 틀어서 벽을 향해 손을 내쳤다.
쿠쿵.
엄청난 굉음과 함께 단단한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벽돌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썩 꺼지거라. 당장 광서로 돌아가. 이 불효막심한 자식 같으니라고!”
이연정이 문밖을 가리키면서 호통쳤다.
이문회는 곧바로 썩 꺼지지 않았다. 이연정의 다리를 강제로 붙들고 그의 신발 위로 입맞춤을 하고, 또 그의 손을 붙잡고 손에 낀 반지 위로 입맞춤을 하였다.
“의부께서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자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의부, 멀리 있을 소자가 걱정하지 않도록 부디 몸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이문회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이연정은 아예 몸을 돌려버리고 고개를 든 채 애꿎은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가거라. 광서로 썩 꺼져버려. 이제 난 너를 어찌할 수 없으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명령 없이는 절대로 경성으로 돌아오지 말고. 난 이제 너 같은 불효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구나.”
이문회는 큰절을 또 세 번 올린 뒤, 눈물을 삼키면서 동창 대도독부를 떠났다.
문을 나선 이문회는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내면서 소리 없이 울었다.
동창 주인인 이연정은 자리에 있던 그 누구와도 더는 대화하지 않고, 자신의 밀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을 닫는 순간, 이연정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