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16화 (116/648)

제116장: 여천천을 죽여야겠다

안남 왕국의 어느 비밀 섬.

이 섬은 그리 크지 않았다. 기껏해야 십여 제곱미터 정도 되었고, 울퉁불퉁한 돌덩이와 울창한 나무숲으로 이뤄져 있었다.

섬의 중앙에는 연못이 하나 있고, 연못 가장자리에 죽루(竹楼: 대나무 다락집. 위에는 사람이 살고 그 아래에 짐승을 기름)가 한 채 있었다.

대종사 영종오는 홀로 검 하나만 가지고 이 섬에 들어와서는, 밀림을 지나 섬의 중앙에 있는 죽루 앞에 도착했다.

이곳이 바로 자객 종사 규일의 비밀 은거지였다.

영종오는 바깥쪽 연못을 한 번 보고는 안쪽 죽루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동안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숨을 참았다.

다시 두 눈을 뜬 영종오는 검자루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죽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스윽.

그림자 하나가 번뜩이더니, 나이가 쉰 가까이 되어 보이는 사내가 죽루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동영 인자(忍者: 닌자)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는 늘 자신이 섬라 왕국의 무도 종사라고 하지만, 지금의 차림새로 봐선 영락없는 동영 제국의 무사 차림이었다.

사내는 170도 안 되어 보이는 키에 왜소한 체격이었고, 얼굴형은 칼로 베어놓은 것처럼 날카로웠으며, 두 눈은 독사처럼 매섭고 예리했다.

이 사내가 바로 진남공 송결을 습격한 자객 종사 규일이었다. 그는 혼자만의 힘으로 진남공 곁을 지키는 열댓 명의 무림 고수들을 깔끔하게 죽였고, 심지어 절대 무공자인 진남공을 다치게 할 뻔했다.

휙.

규일은 죽루 2층에서 갑자기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는 1층 창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규일은 동영 제국의 인술(忍術: 일본 닌자의 기술 중 하나. 적지나 적진에 숨어들어 정세나 기밀을 탐지해내고 기습이나 암살 등을 행하기 위한 특수 기술)을 자유자재로 썼다.

“영 상(桑), 당신이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꽤 오래 기다리고 있었지요. 아, 심지어 제가 당신을 이곳으로 유인한 것이고요.”

자객 종사 규일은 대녕 제국의 말로 시작하더니, 이어서 동영 말로 말을 이어갔다.

“나도 압니다. 송결을 습격한 건, 영종오 당신을 향한 도발이라는 것을요. 대녕 제국의 무도 존엄을 위해서라면, 필시 나를 죽이러 올 거라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바람처럼 사라지더니, 이번엔 죽루 입구에 나타났다. 규일은 영종오와 한층 더 가까워졌다.

이번엔 규일이 섬라 왕국의 말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당신에겐 무도 종사의 존엄이 지고지상일 테니, 나와의 대결은 분명 일 대 일일 거라 생각했겠지요.”

규일이 또다시 사라졌다가, 대나무 죽루 마당에 나타났다. 그는 지금 영종오와 불과 10미터 정도의 거리에 서 있었다.

자객 종사 규일은 정말 신출귀몰한 무서운 자였다.

규일이 다시 대녕 제국 말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내게는 결과가 제일 중요하거든요. 존엄은 그다지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죽이는 게 바로, 내가 원하는 유일한 결과입니다.”

슉, 슉, 슉, 슉!

열댓 명의 무림 고수가 갑자기 연못의 수면 위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죽루에서도 십여 명의 고수들이 번개처럼 빠르게 밖으로 뛰어나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마당의 바닥이 쩍 갈라지더니, 열댓 명의 고수들이 땅을 뚫고 지면 위로 날아올랐다.

일순간, 대종사 영종오는 규일의 수하들에게 빈틈없이 포위되었다.

몇십 명 고수들이 원을 그리며 대열을 갖춰서 영종오를 포위했고, 규일과 영종오 사이를 완전히 차단해버렸다.

규일이 마지막으로 마무리를 짓는 듯이 동영어로 말했다.

“대녕 제국의 무도 종사 영종오. 어떠한 존엄도 지키지 못하고, 그저 필부처럼, 한 마리 짐승처럼 죽어버려라!”

영종오는 여전히 숨을 죽이고 있을 뿐 검을 뽑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검집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검자루를 쥐었을 뿐이다.

“죽여라!”

자객 종사 규일이 명령을 내렸다.

몇십 명 고수들이 일제히 영종오를 향해 검을 찔렀다.

이때, 신출귀몰한 규일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이와 동시에, 서늘한 죽음의 빛을 내뿜는 검 끝이 영종오의 목을 노리며 내려왔다.

대종사 영종오가 순식간에 검을 뽑아 휘둘렀다.

그 순간, 밀림에 있던 새들이 놀라서 일제히 하늘을 향해 날았다.

정상들의 대결인지라, 두 종사는 서로에게 딱 일격만 가했다.

어쩌면 그들에게 필요한 건 딱 일격이 전부일 것이다.

0.5초 후.

전투가 끝났다.

누군가의 검 끝을 타고 선혈이 흘러내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에 전투가 끝났다.

두 종사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고, 영종오를 포위한 몇십 명의 고수들도 얼어붙은 것처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후.”

영종오가 조금 전부터 계속 참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자객 종사 규일은 영종오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이내 냉소를 지었다. 그는 검에 묻은 붉은 피를 털어내기 위해서 바닥을 향해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리고는 아주 깔끔한 동작으로 검을 검집 안으로 빈틈없이 꽂아 넣었다.

묻은 피를 털어내고, 왼손으로 검집을 잡은 뒤, 천천히 검을 검집 안으로 넣는 그의 동작은 마치 교과서처럼 정갈했고 의식적이었다.

“영 상, 당신은 가망이 없습니다.”

규일이 말했다.

영종오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규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작별입니다, 영 상.”

규일은 허리를 곧추세운 채, 그대로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천조대신(天照大神: 일본 신화 상의 태양신), 제가 갑니다. 부디 천황을 보호해주시고, 동영 제국의 안녕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더는 제국을 위해 충의를 다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자객 종사 규일은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를 외치고는 눈동자의 초점을 잃었다.

잠시 후, 그의 가슴팍에 얇은 실과도 같은 상처가 벌어지고, 그 사이로 새어 나온 피가 그의 앞섶을 조금씩 적셨다.

하지만 그의 오장육부는 이미 영종오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 후였다.

“후.”

규일은 이번 생의 마지막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떨구고 죽었다.

동영 제국의 일대 자객 종사였던 그는, 거짓된 마음으로 섬라국을 섬겼고, 또 안남 왕국의 역적으로 살다가 목숨을 다했다.

그가 평생 충효를 다한 사람은 오직 동영 제국의 천황이었고, 그렇기에 그의 유일한 적대적 목표 또한 바로 하나, 대녕 제국이었다.

영종오가 천천히 말했다.

“종사라고 불린다고 해서 다 같은 수준인 것은 아니지. 단지 머릿수로만 밀어붙여서 나를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는 자신의 검을 가볍게 뿌리쳤다.

그의 검에는 피가 묻지 않았고, 뿌리친 것은 혈기뿐이었다.

털썩, 털썩…….

대종사가 가볍게 검을 휘두르며 혈기를 털어내자, 주위에 옅은 바람이 일었다.

영종오를 포위하고 있던 수십 명의 고수가 일제히 바닥으로 쓰러졌고, 그들의 몸은 정확히 두 동강이 나버렸다. 코끝이 저릴 정도의 비릿한 피비린내가 하늘을 물들였다.

영종오는 단 한 수만으로 모든 것을 끝냈다.

영종오의 일격은 자객 종사 규일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수십 명의 동영 제국 고수들을 죽였다.

영종오의 일격에는 어떠한 기교도 없었다. 그가 내뿜은 검기는 마치 무지개처럼 아름답기도, 무엇이든 깨부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했다.

이게 바로 대종사, 대녕 제국 무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절대자, 영종오였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영종오는 가슴을 한 번 만져보더니, 자신의 손에 흥건하게 묻어나는 피를 보았다.

조금 전에 영종오가 썼던 일격은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격이었다. 방어하겠다는 의지 하나 없이, 오직 규일과 모든 적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검을 휘두른 것이다. 적과 함께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여지를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진 영종오였다.

영종오는 예민하기도, 걱정거리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툭하면 감상에 젖어서 눈물을 찔끔 흘렸고, 감정 지수도 낮은 편이라 대부분 의기소침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일단 검을 한 번 뽑았다 하면, 누구보다도 결의에 찬 모습으로 단호하게 검을 휘둘렀다.

영종오가 아무런 방어를 하지 않은 탓에, 신출귀몰한 규일의 검은 그대로 영종오의 가슴을 푹 찔렀다.

다행히도 심장을 찔리진 않았지만, 폐에 구멍이 날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

“콜록, 콜록.”

한바탕 기침을 하던 영종오는 급기야 피를 토했다.

영종오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 땅바닥 가득 널브러진 시체들을 보면서 외쳤다.

“나 영종오를 건드린 자들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다 죽임을 당할 것이다!”

실로 잔혹하고 진정한 패기가 하늘을 찔렀다.

영종오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이놈의 대녕 제국은 조만간 망한다! 조만간 망할 거라고!

도대체 누가 한 짓이냐? 누구냔 말이다!”

영종오는 침상 위에 누워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두변을 쳐다보면서 묻고 또 물었다.

혈관음은 두 눈이 벌겋게 부어 있었고, 며칠 밤을 지새운 사람처럼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벌써 꼬박 사흘이 지났음에도 두변은 깨어나지 못했고, 그의 호흡은 점점 더 미약해지기만 했다.

당시에 두변이 중독되어서 쓰러지긴 했지만, 혈관음과 저홍면은 두변에게 큰 지장이 있을 거라고 걱정하지 않았다. 두변은 화살에 맞은 게 아니라 단지 조금 스쳐 지나간 정도였고, 혈관음이 빠르게 그의 침독 부위를 갈라서 독을 빨아냈기 때문이다.

군령은 하늘과도 같은 것이다 보니, 저홍면은 수십 명의 무사를 이곳에 남겨둔 뒤, 낭군 부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래서 두변을 돌보는 중임은 모두 혈관음에게 남겨졌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치 못하게도 두변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어찌나 끔찍한 맹독인지, 혈관음이 의원 수십 명과 연단사 수십 명을 거의 납치하다시피 데려왔음에도 두변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에 혈관음은 자신의 혈방 무사들 몇십 명을 여씨 가문의 별원까지 보내서 여천천에게 두변의 독을 해독해달라고 강요했지만, 무사들은 여천천을 보기도 전에 여씨 가문의 가장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뒤 쫓겨났다.

혈관음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진남공부로 가서 소공야와 공작 부인께 나서달라고 부탁했다.

소공야와 공작 부인이 곧장 여씨 가문의 별원으로 가서 여천천을 압박했지만, 여천천은 그저 냉랭한 태도로 이렇게 대답했다.

“두변이 중독된 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 우리가 해독하는 방법을 어떻게 알아요?”

만약 진남공이 직접 왔더라면 여천천이 조금 무서워했겠지만, 공작 부인과 소공야 정도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혈관음이 여씨 가문 별원 문 앞에서 종일 꿇어앉아 있었다. 그녀는 여천천에게 두변에게 쓴 독이 뭐인지만 알려달라고, 해독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지만, 여씨 가문의 대문은 끝끝내 열리지 않았다.

이도진과 여천천이 외출할 일이 생겼을 때, 두 사람은 혈관음을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면서 유유히 그녀 앞을 지나쳐서 갈 길을 갔을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두변을 치료했던 모든 연단사와 의원들이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임을 당했고, 의원의 경우엔 의관까지 통째로 불에 타버렸다.

여씨 가문은 이 정도로 막무가내였다. 가문에서 죽이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데, 누가 됐든 그 사람을 살리려고 한다면 같이 죽여버리는 방식 말이다.

혈관음은 정말로 절망했다.

영종오 대종사는 규일을 죽였지만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도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몇백 리나 떨어진 오주부 연화사에 도착했다. 그는 하루빨리 두변에게 기마술을 가르치고자 했고, 자신의 상처는 따로 요양할 시간 없이 자가치유할 생각이었다. 졸업 시험까지 두변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변은 연화사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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