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장: 도륙의 밤 二
광서 순무 낙문이 말했다.
“계림 지부가 이곳으로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됐잖소. 또 어디서 자네가 보살이라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와서 향을 올리는 것 아닌가. 그런데 자네가 지부의 체면을 챙겨주지 않은 거지.”
강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은자를 주면 될 것 아닙니까. 다 같이 돈 벌고 살자는 건데, 체면이니 뭐니 할 게 뭐 있습니까.”
남해 도장 산장 축무애가 말했다.
“강라 형제, 자네는 여씨 토사를 대표하는 인물 아닌가. 지금 제국에서 병마를 있는 대로 안남 왕국으로 보내고 있네. 그러니 제국 서남 지역의 안위는 모두 여씨 일족에 의탁해야 하지. 그러니 여 대인이 기침을 한 번 하셨다 하면, 경성에 계신 황제께서도 움찔하실 것이네. 그러니 자네의 안중엔 당연히 이문회가 없겠지. 이문회가 동창에서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여씨 가문의 털끝 하나 못 건드릴 테니 말이오.”
문산루 장궤 강라가 입술을 비죽였다.
“말하고 보니, 그렇게 쓸모없는 황제가 되기도 힘들 텐데 말입니다.”
이 대화가 바로 대녕 제국의 현주소였다. 일개 토사의 지역 대표가 한 성의 순무 앞에서도 마음 편히 황제를 조롱하는 상황 말이다.
다른 지구의 명대(明代) 말, 그때의 관리들도 공공연하게 황제를 말로 공격하긴 했지만, 황제를 이런 식으로 조롱하진 못했다.
광서 순무 낙문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어받지 않았다.
남해 도장 산장 축무애가 물었다.
“아 참, 두변이 이번에 하마터면 여씨 가문의 손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하던데?”
강라가 목소리를 작게 낮추고 말했다.
“맞습니다. 제 아우인 강현이 손을 썼지요. 화살을 아주 조금만 더 정확하게 쐈다면, 그 애송이는 벌써 황천길에 올랐을 겁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동생이 화살촉에 맹독을 발라두었는데, 그 독의 해독법을 아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두변 그 애송이의 목숨도 9할은 잃은 거라고 봐도 되지요. 진남공부에서는 진남공 부인과 소공야까지 직접 나서서 우리 소저께 두변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청을 올렸습니다. 적어도 무슨 독인지만 알려주면, 자기들이 알아서 해독해보겠다고까지 말하더군요. 그런데 우리 소저께서는 그들을 아예 상대해주지도 않고, 대문 밖으로 내쫓아버렸습니다.”
강라가 술을 한 모금 마시면서 입술을 축인 뒤, 말을 덧붙였다.
“그뿐만 아니라, 소저께서는 두변을 살리려고 했던 모든 연단사와 의원들을 모조리 죽여버렸지요.”
광서 순무 낙문 등은 부럽기도, 아쉽기도 한 기색이었다.
그들은 영종오가 제때 두변에게 도착했다고 들었으니, 두변이 죽진 않았을 거라 추측했다.
강라가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까 대인들께서 이문회 석 자만 나오면 벌벌 떠시는 게, 저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우습습니다. 여씨 가문이 두변에게서 천리마를 빼앗았다고 한들, 동창에서 원망하는 말을 반 마디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제 동생 강현이 화살로 두변을 쏘아죽이려고 했다 한들, 동생은 지금 염주부에서 잘만 지내고 있고, 어깨 펴고 당당하게 저잣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창이 제 동생을 붙잡고 뭘 어찌할 수 있을까요? 우리 여씨 가문이 두변을 죽이는 건, 마치 눈에 띄지도 않는 개미 한 마리 죽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강라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을 이었다.
“이문회니 뭐니 하는 자는, 제 눈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낙문의 미소가 더욱 어색해졌다.
낙문은 강라가 왜 이렇게 노골적으로 거만하게 구는 건지 알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라는 겸손의 미덕을 조금이라도 아는 자였다. 그런데 진남공이 십만 대군을 이끌고 안남 왕국으로 향하자마자, 강라는 점점 더 거만하게 굴었다. 사실 이는 광서 권력에 대한 여씨 가문의 실세 확인과 권력 견제인 셈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여씨 가문은 사람들에게 더한 것을 요구하지 않을까.
이는 모두 제국 서남의 안위가 토사 여씨 가문의 손바닥 안에 있기 때문이었다. 여여해는 지금 두 개의 부(府)와 몇십만 백성, 그리고 칠팔 만 병마를 거느리고 있었다. 여여해가 몸을 살짝만 뒤척여도 경성에 있는 황제가 잠을 못 이룰 정도이니, 강라가 이토록 거만하게 구는 게 이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이문회가 곧 광서에 도착한다던데, 저도 참 그자가 궁금합니다. 만약 두변을 죽이려 했다는 사람이 제 동생 강현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이문회가 어떻게 행동할지도 궁금하군요. 알게 된다고 한들, 이문회가 뭘 어쩔 수 있겠습니까?”
술이 얼큰하게 취한 강라는 더욱 으스대면서 말했다.
이때, 바깥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시종 한 명이 갑작스럽게 방 안으로 뛰어들어와,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장궤 어른, 큰일 났습니다. 밖에 병사들이 몰려왔는데, 문산루를 완전히 포위해버렸습니다!”
자리에 있던 강라를 포함한 사람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병사들이라고? 무슨 병사?’
계림에 도착한 이문회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여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인장을 손에 넣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이천 정예병을 이끌고 문산루를 급습한 것이었다.
“뭐라? 누가 호랑이 간을 빼먹었나.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감히 문산루를 건드려? 여봐라. 모든 호위를 총동원하고, 활을 준비해라. 누구든 문산루에 무기를 들고 오려고 하거든 싹 다 죽여버려라.”
강라가 명령했다.
밖에서는 이천 동창 무사들이 문산루를 빈틈없이 에워쌌다.
대형 쇠뇌 수백 개가 문산루를 조준하고 있었다.
모든 무사들이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채, 이문회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문회가 밖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문산루는 안남국 반역과 내통하고, 건로와 결탁하여 불법 거래를 했으며, 군계에 위배되는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 이는 반역죄에 해당하니, 즉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고, 건로의 사자와 안남 역적의 사자를 내놓아라.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죽여버릴 것이다.”
문산루의 꼭대기 층에서 광서 순무 낙문이 고개를 바깥으로 빼꼼 내밀었다. 그는 문산루를 포위한 사람이 바로 이문회라는 것을 보고는 온몸의 털이 완전히 곤두서고 말았다. 제 두 눈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이문회! 정녕 미친 것이냐.”
이문회가 계림부에서 동창 무사들을 이끌고 여씨 가문의 거점을 쑥대밭으로 만들 동안, 염주부에서는 이문회가 얼마나 잔혹한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문관, 무장 집단, 엄당, 그리고 건로, 이 네 개의 세력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해를 집어삼키는 수준의 살극을 계획했다. 그들은 여천천의 칼을 빌려서 두변을 죽이고, 여씨 가문이라는 칼을 이용해서 이문회를 죽일 생각이었다.
모든 거래가 협상 되었으니, 이제 살극의 막을 올릴 때가 되었다.
이도진이 여천천에게 말했다.
“준비하거라. 두변을 죽이러 갈 것이다.”
“제가 죽여야 하나요?”
여천천이 묻자, 이도진이 대답했다.
“그래. 네가 죽여야 한다. 여씨 가문만이 동창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말이다.” 여천천은 나른한 자세로 비스듬하게 누워있었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두변을 죽이는 건, 개 한 마리 죽이는 정도로 쉬워요. 사부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셔도 저는 그놈을 죽일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이문회를 두려워하겠지만, 우리 여씨 가문은 그렇지 않잖아요. 하지만 저는 얼렁뚱땅 제 칼을 남에게 빌려주면서 누굴 죽이고 싶지 않네요.”
이도진이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두변을 죽이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문회를 죽이는 일이다. 이문회를 죽이는 건, 모두에게 득이 될 일이야. 그리고 최대 수혜자는 바로 네 가문이 되겠지. 요 몇 년간, 여씨 가문이 광서에서 하는 거래의 거래액이 매년 몇백만 냥을 웃돈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철, 소금, 염색 천이 쉴 새도 없이 염주, 광서의 각 부두로 쏟아지고 있고, 그 물건들은 모두 동영 제국, 건로 등 적국으로 보내지고 있다. 너희 가문은 이러한 불법 거래로 부를 축적하고, 정예병을 양성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문회가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아마 가장 먼저 할 일이 바로 여씨 가문이 광서에서 행하는 각종 불법 거래를 뿌리 뽑는 일이겠지.”
이도진이 여천천에게 이유를 친절히 설명해주었지만, 여천천은 여전히 턱을 괸 자세로 대꾸했다.
“감히 여씨 가문의 해상 무역을 건드린다고요? 에이, 절대로 그럴 일 없을걸요. 이문회의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다고 해도 불가능할 거예요. 그리고 광서의 돈줄이 없다고 해도, 우리 여씨 가문은 면전 왕국을 통해서 수출할 수 있고, 안남 왕국에 있는 완씨 가문의 영토를 이용해서 바다로 나갈 수 있어요. 우리는 깨지기 쉬운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고 사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고요.
저한테 두변을 죽이라고 시키고 싶으시다면,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그들이 사부께 드리기로 했던 이득 중 삼 할을 떼서 여씨 가문에 넘기세요.”
이도진의 완숙하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이 살짝 움찔했다.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신의 사부에게도 기고만장한 사람이 바로 여천천이었다.
“알겠다.”
이도진이 대답했다.
여천천이 곧바로 대꾸했다.
“좋아요. 그럼 이제 언제든 두변을 죽이러 가도 돼요. 지금도 되고요. 제 무공으로는 개미 한 마리 죽이는 것보다 쉬운 일이니까요.”
이도진이 말했다.
“내일 해가 뜨는 대로 그놈의 목숨을 가지러 가자꾸나. 그놈은 죽어야만 하는 이유가 충분해.”
염주부, 혈관음의 저택 안.
두변은 이미 완쾌했지만, 오히려 영종오 대종사의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었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고, 상처에서는 염증이 도졌으며, 온몸에서 열이 나고 호흡도 미약해졌다.
영종오의 부상은 몹시 심했다. 그는 폐가 뚫린 채로 몇 날 며칠의 밤을 지새웠고, 천 리나 되는 길을 오갔다.
두변은 조심스럽게 영종오의 부패한 살을 도려냈고, 최고급 약재를 상처 부위에 발랐다. 물론, 영종오 대종사는 의술 대사이기도, 연단 대사이기도 하니, 충분히 자가치유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변은 제자로서 사부를 지극 정성으로 돌봐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부, 저는 꼭 여천천을 죽일 겁니다. 어떤 무공이어도 좋으니, 여천천을 이기고 여천천을 죽일 수 있는 기술이 있습니까?”
영종오가 고개를 저었다.
“없다. 네가 하룻밤 만에 정신력 각성을 하고, 정신 집중 사격과 인마합일 기마술을 익힐 정도로 명상술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무도 조예는 내력으로 분간하는 것이고, 그게 바로 흔히 말하는 현기(玄氣)라는 것이다.”
두변도 알고 있었다. 내력 현기는 무도 고수를 가르는 거의 유일한 기준이었다.
영종오가 어떻게 이토록 강한가? 그는 어떻게 일격에 규일과 몇십 명 고수를 죽일 수 있었는가? 그건 바로 그가 하늘을 거스를 정도의 자신의 내력을 아무리 견고해도 깨부술 수 있는 검기(劍氣)로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꿈속 세계에선 그 어떠한 현묘한 기술도 깨우칠 수 있었지만, 현기는 정말 세월이 쌓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건 마치 칠현금의 기예나, 바둑 솜씨와도 같다. 아무리 꿈속에서 수련한다 한들, 수련의 속도가 현실보다 열 배 빠른 것이지, 실력이 열 배 느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현기는 아무리 꿈속에서 수련한다고 해도 열 배에 가까운 향상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수련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천지에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변도 며칠 만에 현기 수준을 상승시킬 가능성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꿈속 세계가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대종사가 말했다.
“여천천이 이미 2년 전에 7품 무사를 통과했으니, 여천천의 검은 네 검보다 더 빠르고 네 힘보다 더 셀 것이다. 그리고 굳이 검끝이 네게 닿지 않아도, 여천천은 검기만으로도 너를 순식간에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두변은 대종사의 말에 동의하면서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