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27화 (127/648)

제127장: 여천천을 잡아라

“의부의 의지이신가?”

혈관음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혈관음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쏙 들어가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문회는 두변의 의부인데, 혈관음이 이문회를 그냥 의부라고 부른 것이다.

종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대답했다.

“맞습니다. 이문회 주인어른의 뜻입니다.”

혈관음은 피가 끓어오르면서 탄복했다.

혈관음이 이전에 동창과 몇 번의 충돌이 있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이문회가 진정한 대장부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혈관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지?”

종정이 말했다.

“여씨 별원을 포위해서 소주인을 다치게 한 강현을 붙잡아서 능지처참할 것이고, 여천천을 붙잡아서 소주인을 죽이지 못하게 막을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군!”

혈관음이 통쾌하다는 듯이 외쳤다. 그녀는 여천천이 죽도록 싫었다.

종정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염주부에 있는 동창 무사 병력이 부족합니다. 근처에 있는 주부에서 급히 모은 무사들까지 합쳐도 팔백 명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혈교방의 정예 무사들을 빌리고자 합니다. 혈교방에 불똥이 튀지 않도록 동창 무사로 변장하는 조건으로요.”

“좋다. 그건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 내가 지금 당장 혈교방의 정예 무사를 모아보겠다. 하지만 많아야 팔백 명이야. 동창 무사까지 합해도 천육백 명에 밖에 안 돼. 그 수로는 여씨 별원을 치는 건 꽤 힘든 일일 텐데…….”

여씨 별원은 여씨 가문의 또 다른 광서 요충지인지라, 지키고 선 무사 호위가 무척이나 많았다. 여씨 별원에는 불법 무역 물자인 소금과 철 따위가 잔뜩 쌓여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씨 가문은 암암리에 일부 파벌을 매수해서 필요시에 힘을 합칠 수 있었다. 결국 별원에는 최소 이천 명 이상의 무사가 있는 셈이었다.

동창과 혈교방의 무사를 합친 천 육백 명이라는 숫자가 조금 초라한 건 사실이었다.

종정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염주부 동창 천호 무천추가 다른 부대의 지원을 요청하러 갔습니다.” 혈관음이 말했다.

“알겠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나는 당장 무사들을 집합시키러 가겠다.”

종정이 당부하듯이 말했다.

“혈 방주, 이번 일은 절대로 두변 소주인께서 아시면 안 됩니다. 주인어른께서 거의 하늘을 건드린 셈이라서, 자칫하면 토사 여씨 가문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일입니다. 주인어른께서는 이미 이 판에 발을 담그셨지만, 두변 소주인만큼은 이번 일과 무관하게 만들고자 하십니다.”

혈관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이번 대전으로 사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만에 하나 일이 틀어져서 추궁을 당하게 된다면, 저나 혈 방주나 모두 조정의 죄인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저야 주인어른과 소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지만, 혈 방주께서는…….”

종정이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면서 말끝을 흐렸다.

혈관음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이 뜨거워졌다.

“나도……, 죽어도 여한이 없다.”

종정은 혈관음을 향해 정중하게 큰절을 올렸다.

혈관음은 걸음을 재촉하며 저택을 떠나 혈교방의 정예 무사들을 집합시켰다.

염주부 교외.

웅장하지만 낡은 진남공부에 비밀 손님인 염주부 동창 천호 무천추가 도착했다.

소공야 송옥견이 그를 맞이했고, 기껏해야 일 냥 은자 정도 하는 차를 대접했다.

이런 저렴한 차를 내어준 이유는 송옥견이 무천추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진남공 본인도 이런 차를 마시기 때문이었다. 저택이 으리으리하긴 하지만, 선조 때부터 물려받은 것이기에 크기만 컸지, 곳곳에 낡은 흔적이 가득했다.

최근 공작부는 손에 쥔 마지막 은자까지 쥐어 짜내면서 군량을 마련하느라 살림살이가 무척 빠듯했다.

동창 천호 무천추는 두 손으로 은표 하나를 소공야에게 바쳤다.

종이를 건네받은 송옥견은 종이에 적힌 필체가 이문회의 필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은표에는 오십만 냥 은자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고, 진무사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건 무슨 뜻인가?”

소공야 송옥견이 물었다.

동창 천호 무천추가 대답했다.

“이건 이문회 주인어른께서 진남공께 드리는 군비입니다. 주인어른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밤에 논의할 사안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이 오십만 냥 은자는 진남공의 군사비로 헌납하신다 합니다.”

송옥견이 말했다.

“이문회 대인께 감사드린다고 전하거라. 그런데 이 오십만 냥 은자는 어디서 난 것이지? 이 대인같이 청렴결백하신 분께서는 이렇게 큰돈을 가지고 계실 리가 없을 텐데.”

무천추가 대답했다.

“이문회 대인께서 광서에 있는 여씨 가문의 점거지를 뿌리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남은 여씨 가문의 첩자와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셨고, 문산루까지 정리하셨습니다. 이 오십만 냥 은자는 그들의 비밀 금고에서 꺼낸 것입니다.”

송옥견은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이문회가 결단력 있는 인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극단적일 줄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문회가 죽을 각오를 한 모양이로군.’

무천추가 송옥견의 표정을 보고 말을 덧붙였다.

“소공야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문회 대인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인께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은표만 있다면, 언제든 오십만 냥 은자로 바꿀 수 있다고요.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면, 이건 여씨 가문의 불법 자금인데, 소공야께서는 개의치 않으신지요?”

“상관없다. 이문회 대인께서 목숨을 걸고 대의를 위해 적국과 내통하는 자들을 척결하고 있는데, 우린들 이 은자를 쓸 배짱도 없을까 봐?”

이어서 송옥견이 물었다.

“무슨 일을 부탁하러 왔지? 편히 말해라. 진남공부를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무천추가 대답했다.

“병사들을 빌리고자 왔습니다. 저희는 여씨 별원을 공격할 예정인데, 염주부 부근의 모든 동창 무사를 모아도 그 수가 팔백밖에 안 됩니다. 계림 쪽의 동창 무사들을 이리로 불러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송옥견이 물었다.

“왜 여씨 별원을 치려는 게지?”

무천추가 대답했다.

“하나는 보복을 위함이고, 둘은 두변 소주인을 위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여천천의 손을 빌려서 소주인을 죽이려 합니다. 여천천이 내일 날이 밝는 즉시 움직일 것 같으니, 저희가 미리 손을 써야만 합니다. 저희가 여천천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꼭 여천천을 막아야만 합니다.

저희는 죽음의 사신과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진남공부에 천 명 정예 무사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소공야께 천 명 병력을 빌려서 그들을 모두 동창 무사로 변장시키고자 합니다.”

무천추의 말을 들은 소공야의 표정이 굳고, 일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진남공 일가는 여씨 가문이 얼마나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며칠 전에 자신과 모친이 두변을 구하기 위해서 여씨 별원에 찾아갔을 때도 여천천은 두 사람을 무시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고, 토사 여씨 가문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진남공부가 서남 병변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 할 수도 있었다. 그때가 되면 진남공부도 역모를 꾀한 조정의 죄인이 될 것이다.

진남공부의 소주인인 송옥견은 이번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결정하기 너무 힘든 사안이긴 했다.

무천추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추후에 저희가 모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일은 진남공부와 무관한 일일 겁니다. 한 명이라도 진남공부를 밀고하려는 자가 있다면, 저희가 그놈을 찢어 죽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이 너무 커지는데.’

소공야가 머뭇거리면서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인상이 온화하고 아름다운 용모의 중년 부인이 대청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중년 부인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그 제안, 승낙하겠네. 공작부의 천오백 명 정예 무사를 전부 빌려주겠네.”

이 여인이 바로 진남공의 부인이자, 옥진 군주의 친모였다.

무천추가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공작 부인, 감사드립니다.”

“변장할 동창 무사 갑옷은 준비되었는가?”

“예, 준비되었습니다.”

“이왕 할 것, 끝장을 봐야지.”

“이문회 주인어른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에게 투석기, 독유탄 사용을 허락하셨고요. 아군의 타격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적을 죽이라 하셨습니다.”

지난번에 여경사가 동창을 공격했을 때도 투석기와 독유탄이 쓰였는데, 그런 대형 살상 무기를 쓴 뒷감당은 실로 참혹했다. 여경사의 만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진무사는 스스로를 밧줄에 묶고 경성에 죄를 청했다.

그런데 지금 동창이 여씨 별원을 공격하는데 그런 대형 살상 무기를 쓰겠다는 것이다.

“알겠네. 이 각 뒤에 진남공부의 일천오백 명 정예 무사들을 집합시킬 것이고, 갑옷도, 무기도 들지 않은 채로 자네를 따라갈 걸세.”

“알겠습니다. 소인은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공작 부인의 말에 염주부 동창 천호 무천추가 예를 올린 뒤에 자리를 떠났다.

무천추가 떠나자, 공작 부인이 소공야에게 말했다.

“옥견, 조금 전에 주저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문회 공공이 네게 얼마나 실망하겠느냐? 네가 망설이는 것 자체가 네가 아주 돈독한 맹우가 아니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송옥견이 공손하게 예를 올리면서 말했다.

“송구합니다. 소자는 이번 일이 패가망신할 정도로 중대한 일이라고 생각하여서 망설였습니다. 심지어 그 이유가 두변이라는 자 때문인데,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이번 일은 두변뿐만 아니라, 이문회, 그리고 동창까지 걸린 일이다. 이건 천지를 뒤엎는 큰 판이야. 곧 있으면 천하가 이문회와 동창을 상대로 공격을 시작할 것이고, 이문회는 이를 빤히 알면서도 불바다에 뛰어든 것이다. 이문회가 온몸을 내던질 각오를 하였는데, 우린들 한 번 이문회를 믿고 부딪혀볼 용기가 없을까. 그 정도 배짱도 없으면, 이후에 누가 네 도움을 바랄 수 있고, 누가 너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적을 상대하겠느냐?”

공작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송옥견이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예,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한 시진 반 뒤.

동창 무사 차림으로 무장한 삼천여 명의 정예 무사들이 염주부 북문 앞으로 질서정연하게 집결하였다.

몇백 구의 대형 쇠뇌와 몇십 구의 투석기, 그리고 무수히 많은 독유탄과 유탄(油彈)이 함께 준비되었다.

이 정예 부대를 이끄는 수령은 무천추, 종정, 그리고 혈관음 세 명이었다.

“출발하라. 여씨 별원을 공격하고, 여천천을 붙잡아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삼천 명의 정예 무사들은 무서운 기세로 북문으로 입성하여 여씨 별원을 향해 달려갔다.

해시(亥時:오후 9시)가 되었을 무렵, 이문회는 계림부에서 처리해야 할 모든 일을 끝냈다. 그리고 그는 한 치의 지체도 없이 여씨 별원에서 벌어질 전투를 위해서 심복 몇 명을 데리고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염주부로 향했다.

동창의 각 거점에는 전투를 위한 건량, 말, 그리고 깨끗한 식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문회는 30리마다 말을 바꿔 탔고, 잠시도 눈을 붙이지 않고 밤낮없이 천 리 길을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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