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30화 (130/648)

제130장: 죽어야만 하는 도구

왕인의 가슴 속으로 무한한 비참함과 고통스러움이 솟구쳤다.

죽기 전이 되어서인지, 왕인은 갑자기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는 듯하면서 이문회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놈들은 이문회의 사람이 아니라, 내 의부의 사람들이로구나.”

왕인이 처량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이문회가 적을 상대할 땐 단호하고 버르장머리가 없지만, 적어도 제국의 사람들에겐 예의를 갖추는 편이지. 이문회 그놈이 이렇게 나를 죽일 리 없다. 나를 죽이고자 해도, 정식으로 상주서를 올려서 폐하의 윤허 하에 나를 죽이겠지.”

동창 무사 수령이 가면을 벗으면서 왕인을 내려다보았다.

정체를 밝힌 동창 무사는 정말로 왕인의 의부의 사람이자, 어느 사례감 어르신의 심복이었다.

“하하, 이제야 알겠구나, 이제야 알겠어. 내가 왜 그런 잘못을 하고도 제독 환관으로 승진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 관직이 충분히 높아야 했던 게로군. 제독 환관을 죽였다는 죄명을 이문회에게 뒤집어씌워야 그 영향력이 더 클 테니까. 난 정말로 도구에 불과했구나. 그것도 죽어야만 하는 도구! 하하하!” 정적만 흐르는 산속에 왕인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문회, 네놈은 내가 왜 진급을 하게 되었는지 다 알고 있었구나. 내가 항주까지 가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내게 귀띔을 주지 않고, 이 모든 걸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니, 참으로 매정하고 잔혹하구나.”

혼잣말을 끝낸 왕인이 목을 앞으로 내밀면서 잔인하게 웃었다.

“내가 아군의 손에서 마지막을 맞을 줄이야. 어서 끝내거라. 깔끔하게.”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던 왕인은 도리어 초연해지면서 그저 빨리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사례감 어르신의 심복이 왕인의 목을 누르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깔끔하고 빠르게 끝내드리겠습니다. 다만, 저희는 왕 공공의 머리를 자르고 피부를 벗겨낼 것입니다. 그래야 이문회가 더욱 건방져 보일 테니까요.”

“어차피 뿌리가 없으니 선산에는 들어갈 수 없는 몸이다. 네놈들 마음대로 하거라.”

왕인은 사그라진 재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이문회, 꼭 성공하거라. 이 제국은 썩어 문드러졌다. 넌 꼭 성공해라.’

작게 읊조린 왕인의 마지막 속마음이었다.

콰직!

왕인의 목이 댕강 잘려서 바닥에 나뒹굴고, 그의 잘린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이어서 동창 무사들로 변장한 사람들이 동창의 방식대로 왕인의 사체를 훼손하기 시작했다.

마차 안을 살피던 사례감 어르신의 심복이 왕인이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상주서를 발견했다.

그는 상주서를 한 번 읽어 보더니,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참으로 좋은 문장이로군. 독이 묻은 비수로 이문회의 심장을 찌르는 꼴이겠군.”

사례감 어르신의 심복이 상주서를 수하에게 건네면서 말을 이었다.

“현장을 잘 꾸며놓은 뒤에 떠날 채비를 하도록 해라. 이 상주서는 은밀한 곳에 숨기되, 꼭 발견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왕인의 저 처참한 시신과 이 상주서가 함께 사례감 앞에, 황제 앞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사례감 어르신의 심복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감탄했다.

“만천하가 동창과 이문회를 공격할 텐데, 정말 생각만으로도 짜릿하군. 이문회, 곧 있으면 네놈의 제삿날이겠구나.”

염주부.

이문회의 명령 하에 수백 개의 화살과 수십 개의 거대한 돌덩이가 별원을 향해 쏟아졌다.

고급스럽고 아름다웠던 별원 안이 차츰 폐허로 변해갔다.

몇백 명의 여씨 무사들은 외벽 위에서 방어진을 펴고 있던 터라, 육탄전을 벌일 경우엔 위치의 우위 덕분에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문회는 사람이 아니라 처음부터 투석기와 화살을 이용해서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쿵, 쿵, 쿵.

백 근이 넘는 돌덩이 수백 개의 파괴력은 엄청났다.

콰과광!.

여씨 별원의 담벼락은 이미 충분히 두꺼웠지만, 백 근이 넘는 돌덩이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외벽 위에 있던 여씨 무사들도 순식간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그대로 깔려 죽었다.

슉, 슉, 슉, 슉.

또 한 차례의 화살비가 비오 듯 쏟아졌다.

여씨 무사들이 가을에 수확하는 벼처럼 무더기로 쓰러졌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 지난 듯했지만, 별원 안은 이미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진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여씨 별원으로 지원 온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지어 몇몇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다 못해 구토까지 했다.

이들은 혈교방과 달리, 대부분은 길거리의 무뢰배 출신이었다. 혈교방이 겉으로는 해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퇴역한 정예병이거나 해병이 많았기에 광서 바다를 종횡무진 누빌 수 있었고, 바다에서는 당해낼 자가 없었다.

하지만 이 지원 온 패거리들은 머릿수만 내세울 수 있을 뿐, 어디 가서 이런 광경을 구경도 못 해본 자들이었다. 사람들이 한 명이 아니라, 한 면 단위로 우수수 죽어 나가는 것을 보자, 이들은 동창 무사들과 싸우기는커녕, 도망치지 않고 제자리에 남아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용기를 낸 것이다.

말에서 내리는 이문회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너무 오랜 시간 말을 타고 달린지라, 허벅지 안쪽이 짓무르다 못해 살과 피가 섞여 있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한 걸음 한 걸음 무게감 있게 내디뎠다.

“주인어른을 뵙습니다.”

동창 천호 두 명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이 대인을 뵙습니다.”

잠시 호칭을 머뭇거리던 혈관음이 이문회를 향해 손윗사람에게 절하는 예를 올렸다.

이문회가 혈관음에게 다가가 그녀를 일으키면서 말했다.

“낭자의 은혜는 마음 깊이 기억해두겠소.”

무슨 이유에서인지 얼굴이 새빨개진 혈관음은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이문회 대인을 뵙습니다.” 동창 무사 한 명이 갑자기 대열에서 이탈하여 이문회를 향해 예를 표했다.

이문회는 자신 앞에 선 동창 무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문회를 향해 예를 표한 무사는 다름 아닌 진남공부의 소공야 송옥견이었기 때문이다.

송옥견은 무천추가 자신에게 와서 병력을 빌려달라고 말했을 때, 잠시 머뭇거렸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서 그 점을 만회하고자 직접 동창 무사로 변장한 것이다.

이문회는 송옥견의 신분을 밝히지 않기 위해서 대답 대신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주인, 이어서 어떻게 공격할까요? 어느 정도로 공격하시고 싶으신지요?”

무천추가 물었다.

“여천천만 남겨두고, 모두 다 죽여라.”

이문회가 대답했다.

염주 동창 천호가 말했다.

“여천남은 여 토사의 의형제입니다. 여천남도 죽입니까?”

“죽여라.”

이문회가 단호하게 말했다.

종정이 또 물었다.

“그럼 검마 이도진은 어떻게 할까요? 이도진의 무공 실력은 엄청납니다.”

이문회가 대답했다.

“이번에 두변을 음해하려고 했던 주범이다. 독유탄을 써서 불태워 죽여라. 인해(人海) 전술을 써서라도 이도진을 죽여야 한다.”

이도진의 무공이 워낙 뛰어난지라, 만약 인해 전술을 쓰게 된다면, 동창 무사들의 사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일 것이다. 무천추, 종정, 그리고 혈관음 같은 무림고수도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이도진을 죽여야만 두변이 안전해질 겁니다.”

혈관음의 말에 이문회가 대답했다.

“이도진과 백병전을 치르게 된다면, 지금 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이 죽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우리가 이렇게 하는 건 단순히 두변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고, 내 의자를 구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늘 일은, 우리 엄당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주인을 위해, 소주인을 위해, 엄당의 미래를 위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무천추와 종정, 그리고 동창 천호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이문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자들은 모두 그가 직접 발굴해낸 인재들이었고, 직접 실력을 길러낸 진정한 후배들이었다.

이문회가 속으로 생각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나도 함께할 것이다. 나 이문회는 절대로 너희들만 죽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여씨 별원 안.

“어서 소저를 모시고 떠나라. 외벽 방어선이 곧 무너질 것이다.”

여천남이 옆에 있던 수하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이도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도진 종사, 소저를 모시고 비밀통로로 나가, 여씨 영지로 도망치시지요. 그리고 주군께 출병을 요청하십시오. 이문회 저놈을 죽여버리라고요.”

여천천이 말했다.

“안 돼요. 두변을 먼저 죽인 뒤에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잠시 뒤, 강현이 방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비밀통로가 거대한 돌덩이로 완전히 막혔습니다. 얼마나 막혔는지도 모르겠고, 여기서 나, 나갈 수가 없습니다.”

검마 이도진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그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할 뿐이었다.

“당황할 거 뭐 있나? 벽파정(碧波亭)엔 사방이 물이니, 내가 여천천을 데리고 그리로 가겠다. 내게로 오는 족족 죽일 것이니, 삼천 명이 다 덤벼도 끄떡없다.”

이도진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절대적인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이도진이 뱉는 한 글자 한 글자에 소름 끼칠 정도로 강력한 검기가 깃들어 있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여기서 그대로 물러날 순 없지. 이문회는 당연히 죽어야 하고, 두변도 죽어야 하고, 영종오까지 다 죽어야겠지.”

그런 다음 이도진이 한 손으로 여천천의 손을 붙잡고, 바닥을 향해 발끝을 톡, 하고 쳤다.

바로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십여 리 밖에 나타났다.

몇 번을 사뿐히 뛰자, 두 사람은 별원의 장원을 아주 쉽게 가로질러서, 몇십 묘가 되는 연못에 도착했다.

이도진은 여천천의 손을 잡은 채로 잠자리가 수면을 스치듯 가볍게 물 위를 밟고 연못 중앙에 있는 정자, 벽파정에 도착했다.

이도진은 자리에 앉아 검을 무릎 위에 올려둔 뒤, 눈을 감고 심신을 가다듬었다.

“천천, 자리에 앉거라. 곧 두변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검마 이도진이 분부했다.

“알겠어요.” 여천천은 이도진을 따라 자리에 앉은 뒤, 검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콰과과광.

투석기가 끊임없이 발사되었고, 화살비가 끊임없이 별원을 향해 쏟아졌다.

전투가 시작된 지 반 시진만에 별원의 외벽 방어선이 뚫렸고, 외벽과 가까이 있던 건물들이 폐허가 되었다.

몇백 명이나 되던 별원 무사들은 거의 다 죽어버렸다.

그들은 거대한 돌덩이에 깔려 죽거나, 화살비를 피하지 못해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여씨 별원의 주인인 여천남과 여씨 궁군(弓軍) 만호 강현은 동창 무사들에게 생포되었다.

여천남이 천천히 말했다.

“이문회 선생, 나는 선생의 단호함이 참 탄복스럽소. 하지만 대녕 제국의 중신들은 다 선생 같은 사람이 아니오. 선생은 죽을 날이 머지않았소. 그때가 된다면, 나는 귀빈 대접을 받으며 사면을 받겠지. 혹시 모르지, 내가 선생을 사형장까지 배웅해줄지.”

여천남은 무서울 게 없었다. 그는 결국 여여해의 의형제라서 스스로를 아주 무게감 있는 인질이라고 생각했다. 이문회가 아까워서라도 자신을 어찌 죽이겠는가.

이문회는 여천남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옆에 있던 강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천천을 추종하고, 여씨 가문의 만호 군관이자, 손에 꼽는 명궁인 강현을 바라보며 이문회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조금 전에 이놈의 손에 죽은 동창 무사들이 부지기수로 많겠지.’

“네가 바로 강현이구나. 두변과 여천천이 경마 시합을 할 때, 네놈이 음지에 숨어서 두변을 습격했다지?”

이문회가 물었다.

“맞다면 어쩌실 겁니까? 엄당의 개새끼 한 놈 죽이는 것뿐인데.”

그 순간, 이문회가 갑자기 검을 뽑았다.

서걱, 서걱.

명사수 강현의 두 팔이 뿌리째 잘려나갔다.

“으악!”

강현이 처참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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