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장: 폭력의 미학
두변이 다시 눈을 떴을 땐, 현실 세계의 시간은 이미 오전이 되어 있었다.
“어떻더냐? 신선이 언제, 어디서 번개가 나타날지 알려주시더냐?”
영종오 대종사가 물었다.
영종오는 자신이 물으면서도 뭔가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예로부터 꿈에서 신선이 가르침을 준다는 전설을 들은 바 있으나, 꿈에서 신선이 언제 어디서 번개가 치는지 알려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던가! 이건 너무…… 터무니없긴 했다.
하지만 두변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변은 곧바로 종이와 붓을 들고 와, 꿈속에서 본 것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가 그린 것은 석양이 반쯤 진 바다, 다섯 손가락 모양의 도초,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돌고래, 하늘에 뭉쳐있는 소용돌이 모양의 먹구름, 그 사이로 내리친 얇은 번개 한 줄기였다.
“대종사, 이곳이 어딘지 혹시 아십니까?”
두변이 물었다.
“이곳은 오지도(五指島)다. 염주부 동남쪽에서 백구십 리 떨어진 곳에 있지.” 오지도는 꽤 유명한 곳이었다. 섬의 모양이 다섯 손가락을 펼친 모양이기도 했고, 뭔가 있어 보이기도 해서 지금껏 많은 무림 고수가 이곳에서 결전을 펼치기도 했다.
“어쩌면 인연일지도, 또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르겠구나.”
영종오 대종사가 탄식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20년 전, 내가 이곳에서 이도진과 처음으로 무공을 겨뤘지. 바로 20년 전의 오늘, 네가 그린 오지도에서 말이다.”
두변은 놀라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이번 결전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고, 그곳에서 누군가가 죽어야만 한다면, 그 사람이 꼭 여천천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럼 오늘 바다로 나가서, 오지도 부근에서 여천천을 죽이겠습니다.”
하지만 영종오가 두변을 말렸다.
“하지만 너무 위험하다. 네 계획이 현묘하긴 하지만, 이 일엔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아. 만약 실패할 경우, 여천천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로 너를 죽일 것이다.”
두변이 말했다.
“대종사, 이건 죽음의 신과 싸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성공할 가능성이 6할이라고 할지라도, 아니, 그 가능성이 3할밖에 안 되더라도 저는 모든 것을 쏟아부을 겁니다.”
영종오가 두변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두변, 나는 네가 타고난 운을 가진 놈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현묘한 전투를 치르게 되다니, 너는 분명 기적을 만들어 낼 것이다. 하늘과 땅의 조화로움이 필요한 결전이니, 꼭 여천천을 죽여서 하늘에 제물로 바치거라.”
두변이 이를 부득 갈면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오늘을 꼭 여천천의 제삿날로 만들겠습니다!”
이때, 이문회가 이끄는 삼천 ‘동창 무사’는 여씨 별원 안의 수십 묘에 달하는 연못을 에워쌌다.
수십 구 대형 쇠뇌의 활시위가 다시 당겨지고, 수십 구 투석기도 장전 상태로 대기중이었다.
이문회의 무사들이 가까이 왔음을 느꼈음에도, 검마 이도진은 미동도 없이 자리에 앉은 채 눈을 감고 정신수양을 이어나갔다.
참을성이 없는 여천천이 먼저 눈을 뜨고 물었다.
“이문회, 여천남은 어디 있지?”
이문회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죽었다.”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왔군. 여천남은 아버지의 의형제인데, 아버지께서 네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것이 두렵지 않나?”
무지하다 못해 횡포에 가까울 정도로 무식한 말을 들은 이문회는 대답 대신 허공에서 손을 까딱했다.
그러자 두 팔이 잘린 강현이 앞으로 끌려 나왔다.
여천천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지금 무슨 뜻으로 한 짓이지? 이런다고 해서 내가 겁먹을 것 같아?”
강현은 어렸을 때부터 여천천을 해바라기를 바라보듯 몰래 흠모해왔다. 하지만 여천천의 마음속에서 강현이란 그저 말을 좀 잘 듣는 개새끼에 불과했다.
이문회가 입을 열었다.
“제국이 나약하여 태후 마마와 황후 마마께서 너를 어르고 달래신 탓에, 네가 이토록 안하무인으로 날뛸 수 있는 것이고, 대녕 제국 사람의 목숨을 개미보다도 못하게 여길 수 있는 거겠지. 그 이유에서 네가 두변을 마음대로 죽이려는 것이고 말이다. 나도 별다른 뜻은 없다. 그저 네게 보여주고 싶은 거지. 네가 또 언젠가 대녕 제국의 사람을 죽이려 하거든, 오늘 본 것을 떠올리라고 말이다.”
이문회가 명령했다.
“죽여라.”
동창 무사 한 명이 칼이 아닌 비수를 쥐고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강현의 몸을 난도질했다.
이런 게 바로 진정한 능지처참이 아닐까.
능지처참은 천천히 죽이기라도 하지, 강현의 몸에 내리찍힌 비수 자국은 눈 깜빡할 사이에 수십 개가 되었다.
처음엔 강현도 억지로 고통을 참으면서 이를 악물고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2분 뒤, 그는 끊기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싸늘한 절망감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아악!”
듣는 사람까지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지는 비명이었다.
눈을 부릅뜬 채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여천천의 몸이 서서히 떨려오기 시작하고 얼굴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천천은 눈을 꾹 감고 눈앞의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기세에서 밀릴까 봐 기어코 두 눈을 뜨고 버텼다.
3분 후, 고통에 몸도 못 가눌 정도가 된 강현이 울부짖으면서 이문회에게 빌었다.
“이문회 대인, 제가 잘못했습니다. 두변을 몰래 급습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제발, 제발 저를 빨리 끝내주십시오. 제발요.”
이문회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수를 쥔 동창 무사가 곧바로 강현의 심장에 비수를 푹 찔러 넣었다.
강현은 드디어 해방되었다는 느낌에 더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강현, 이 더러운 배신자. 어떻게 이문회에게 애원할 수가 있어? 배신자는 죽어도 싸!”
여천천이 성을 내면서 소리쳤다.
강현이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었다고 해도, 여천천의 화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여천천은 강현의 죽음에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라, 강현이 마지막까지 버티지 못하고 이문회에게 잘못을 뉘우치고 죽여달라고 애원한 게 너무도 화가 났다.
강현이 여씨 가문의 체면을 떨어트린 것이 아닌가!
이문회가 고개를 저었다.
천성적으로 악랄한 저 여자는 구제할 길이 없군!
“공격하라.”
이문회가 명령했다.
그 순간, 삼천 명의 동창 무사가 벽파정을 향해 화살을 겨누고 망설임 없이 활시위를 놓았다.
슉, 슉, 슉, 슉.
화살촉에 불을 붙인 화살이 폭우처럼 벽파정을 향해 쏟아졌다.
“발사!”
몇십 구 투석기가 동시에 발사되었다.
거대한 돌덩이들이 허공에서 호선을 그리면서 빠르게 벽파정을 향해 날아갔다.
폭력의 미학이란 바로 이런 걸까. 물결 하나 일지 않는 연못 위, 몇천 개의 불화살과 그 뒤를 따르는 수십 개의 거대한 돌덩이가 작디작은 정자를 향해 날아갔다. 연못 위에 홀연히 세워진 정자는 바로 다음 순간 흔적도 없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모두의 예상을 깬 경악스러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도진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가부좌 자세로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강력한 내력이 그녀의 몸에서 분출하면서, 거대하고 막강한 충격파가 생성되었다.
콰과과광!
몇천 개의 불화살이 충격파에 부딪히자마자 분질러졌고, 몇십 개의 거대한 돌덩이는 그대로 튕겨 나갔다.
이도진 체내에서 분출된 내력은 거대한 막이 되어, 몇천 개의 화살을 부숴버리고, 몇십 개의 돌덩이를 튕겨냈다.
삼천 동창 무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 엄청난 힘이잖아. 너무 강해!
이런 게 바로 종사급의 위력인 건가?
너무도 막강해서 싸우기도 전에 절망스러워지는군. 세계관을 뒤엎는 수준이구나!’
하지만 이문회는 이 광경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종사가 어느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영종오 대종사도 그렇고, 자신의 의부인 이연정도 종사급 실력을 가진 무공 고수였다.
대녕 제국에 고작해야 종사가 몇 명뿐이니, 일반인이 느끼기에는 종사의 무공이 숨 막힐 정도로 강해 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더욱 무서운 건, 어떤 대종사들은 자신의 초탈한 신분을 유지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몸을 굽혀 세간에 섞여서 권력과 이익을 다툰다는 점이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검마 이도진으로, 일반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재앙과도 같은 수준일 것이다.
이도진의 위력에 크게 놀란 종정과 무천추가 말없이 이문회를 쳐다보았다.
“계속 공격해라. 계속해서 화살을 쏘고, 계속해서 투석기를 발사해라. 그러다 보면 이도진의 내력 현기가 완전히 고갈될 때가 올 것이다.”
이문회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 종사급 강자는 헉 소리도 안 나올 정도의 무공을 가졌지만, 자신의 내력을 전부 소진해서 산 채로 죽을 수도 있다.
이는 종사급 강자가 무법무천(無法無天)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국가 기관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무공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제국이 응당한 대가를 치를 경우엔 종사를 이런 식으로 죽일 수도 있었다.
이도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괜한 걱정을 하고 있군. 현기가 다 닳기 전에 이문회 네놈을 죽일 것이다.”
이문회가 대꾸했다.
“그럼 어디 한번 해보시지.”
이문회가 명령했다.
“계속해서 화살과 투석기를 발사하라!”
또 한 차례의 불화살과 돌덩이 세례가 정자를 향해 쏟아졌다. 동창 무사들은 쉬지 않고 곧바로 재장전을 해서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그 충격적인 광경이 한 번, 또 한 번 사람들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이도진은 계속해서 현기를 밖으로 내뿜었다. 그녀의 현기로 만들어 낸 충격파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불화살을 부러트리고, 돌덩이를 튕겨냈다.
검마 이도진이 연속해서 충격파를 만들어내는 것을 본 동창 무사들은 종사에 대한 개념이 끝없이 갱신되는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쪽에서는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고, 한쪽에서는 막강한 충격파로 공격을 막아내는 진풍경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개의 화살도, 단 한 개의 돌덩이도 정자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여천천은 이도진 덕에 무탈하게 정자 안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일각의 시간이 지났을 때, 이도진의 몸이 살짝 움찔하더니 코피가 흘러나왔다.
이도진의 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이도진의 무공이야 그대로라 해도, 현기가 다 닳게 되면 이도진은 위험해진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축무애의 지원군은 도착하지 않았다.
여천천은 죽지 않을 것이다. 여여해의 친딸이기도 하고, 이문회가 진심으로 토사 여씨가 반란을 일으키길 바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문회는 기껏해야 여천천의 무공만 빼앗은 뒤, 인질로 잡아 감금할 것이다.
이도진은 여천천의 무도 종사이기도 하고, 북명검파의 거물 중 한 명이기도 하지만, 동창 실세인 이문회에겐 그리 죽이기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이도진의 현기가 다 닳아간다는 건,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때가 왔다는 걸 알리는 신호였다.
이도진이 여천천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천천을 데리고 이 포위망을 무력으로 뚫고 나갈 생각이었다.
“갈 때가 된 건가요?”
여천천이 묻자, 이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천천이 말했다.
“이문회부터 죽인 뒤에 두변을 죽이러 가요. 그다음에 집으로 가서, 아버지께 군대를 일으키라고 말씀드려야겠어요. 대녕 제국의 하찮은 종자를 깨끗이 청소해달라고 말이에요.”
이도진이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천천의 손을 잡고 정자 밖으로 나온 뒤, 곡교(曲桥)를 따라 땅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이문회의 동창 무사 군단과 십여 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자고로 대종사라면, 일격필살이 가장 중요한 법.
종정, 무천추, 혈관음 등은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임을 직감했다.
이도진이 이문회를 죽이기 위해서 정자에서 내려왔구나!
수백 명의 동창 무사가 이문회를 겹겹이 에워싸서 방어진을 쳤다.
이문회가 검을 뽑은 뒤 천천히 말했다.
“전투를 준비하고, 이도진, 여천천을 죽여라.
그 어떤 대가도, 그 어떤 후환도, 그 어떤 희생도 고려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라.”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