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장. 내 여자가 돼라.
두변이 혼수상태에 빠진 기간 동안, 절반은 이문회가, 나머지 절반은 혈관음이 그를 보살폈다.
두변이 며칠만에 혈관음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을 때, 혈관음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영종오가 두변이 깨어난 뒤에는 햇빛이 잘 들고, 통풍이 잘되는 방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혈관음이 저택에서 가장 통풍이 잘되고, 채광이 좋은 방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방 안의 모든 가구와 바닥을 티끌 하나 없이 꼼꼼하게 닦았다.
혈관음이 가장 좋아하는 옷은 뱀가죽으로 만든 옷으로, 외출할 때는 그 위로 무장 경장(勁裝)을 걸쳤다.
하지만 혈관음의 거처에는 오직 여인들뿐인지라, 영종오와 이문회는 절대로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러니 이 거처에 있는 동안만은 혈관음도 마음 편하게 뱀가죽 옷을 입고 움직였다.
그녀의 몸매는 코피가 나올 정도로 화끈했다. 그녀의 건강하고 탄탄한 근육, 그리고 완벽한 곡선은 지구상의 그 어떤 슈퍼모델보다도 활력 있고 섹시했다.
게다가 지금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닦고 있지 않은가!
그녀의 허리 아래로 이어진 곡선은 남성 호르몬 수치가 폭발할 정도로 완벽했다. 특히 길고 탄탄한 허벅지가 두변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매혹적인 혈관음의 모습을 본 두변은 저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졌다.
인기척을 느낀 혈관음은 두변의 시선을 느낌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그의 체향을 맡고 말았다. 순간, 그녀는 완전히 굳어져 그대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는 지금 제 자세가 몹시 민망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차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두변은 생각했다.
의부의 말씀이 맞지. 혈관음을 위해서 내가 가만히 있어선 안 되지.
내가 아무리 찌질한 놈이라고 해도, 나중에 언젠가 영설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다고 해도 말이지.
두변은 지금 당장 혈관음에게 자신의 입장을 보여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실 머릿속으로 아주 감동적이고 낭만을 곁들인 달콤한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혈관음의 미칠 듯한 뒤태를 봐버린 지금, 뇌를 거치지 않고 온전히 호르몬에 충실한 고백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혈관음, 나랑 잡시다.
비밀 하나 얘기하자면, 나중엔 나도 정상적인 남자가 될 수 있어요. 그때가 되면, 나도 당신을 만족시켜줄 수 있고, 아이도 낳게 해줄 수 있어요.”
제가 한 말을 내뱉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따귀를 올려치고 싶었다.
달콤한 말 한마디 못 하냐?
낭만적인 게 그렇게 어려워?
그럴싸한 고백 할 줄 몰라?
어떻게 필터링도 없이 막 뱉었어? 나랑 자자고?
만족시켜줄 수 있다고?
이 얼마나 저급하기 짝이 없는 말이냐!
두변은 곧이어 날아올 혈관음의 따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존심이 강한 여인인데, 이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혈관음인가!
그런데 예상외로 혈관음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몸을 흠칫 떨었다. 마음속 깊은 곳이 저릿한 느낌이 들더니, 두 볼이 발그레 상기되었다.
그녀는 두변이 이렇게 원시적인 말을 쓸 줄 몰랐다.
혈관음은 두변의 고백이 원시적이라고만 생각할 뿐, 저속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두변의 직설적인 고백이 폭탄이 되어 혈관음의 감정을 폭발시켰다.
정담(情談)이라는 것은 자고로 누가 말하는 게 중요하지, 말을 얼마나 고급스럽게 하냐, 혹은 저급하게 하냐, 하는 것과는 무관했다.
혈관음은 한참을 바닥을 닦는 자세 그대로 있었다. 자신의 몸이 굳은 건지, 아니면 무언가를 기다리는 건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나랑 자자며. 그런데 왜 거기 멍하니 서 있는 거야?’
혈관음의 속마음이 이렇게 말했다.
‘하필 내가 이 자세로 있을 때 두변이 갑자기 쳐들어왔다는 건, 하늘의 뜻 아닐까?’
이건 더욱 솔직한 혈관음의 속마음이었다.
두변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얼굴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혈관음의 따귀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따귀는커녕, 혈관음의 뜨겁고 말랑한 입술이 두변의 입술에 닿았다.
혈관음은 민망한 자세로 오랫동안 굳은 채 있었지만, 두변이 움직이는 걸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이십몇 년간 쌓아온 배짱과 용기를 한 번에 다 쓰기로 결심하고는, 바닥에서 일어나 두변을 덮쳐서 쓰러트리고는 다짜고짜 그의 입술을 덮쳤다.
네가 안 오면, 내가 가는 거지.
“아무 말도 하지 마. 눈도 뜨지 말고. 혈도를 누를 거니까.”
혈관음의 가느다랗고 뜨거운 손가락이 혈도가 아닌, 두변의 가슴 위로 아무렇게나 와 닿았다.
분명 혈관음이 내력을 쓰지 않았음에도 그의 온몸이 갑자기 나른해졌다.
두 사람은 바닥을 뒹굴면서 열정적으로 서로를 탐했다.
30분 뒤.
두변은 자신의 품에 폭 안겨있는 혈관음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당신이 내 혈도를 눌러서 꼼짝할 수 없었으니까, 오늘 일은 다 당신이 원한 거예요.”
“풉.”
혈관음은 조금 전의 광경을 떠올리면서 참지 못하고 작게 웃었다. 그녀는 두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입을 막았고, 다른 손으로 그의 두 눈을 가렸다.
“네가 진정한 남자가 아니어도, 나를 만족시킬 수 있어.”
혈관음은 평생 쓸 용기를 끌어다 쓴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변이 말했다.
“여인이 원하는 수준이 그렇게 낮으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환관들이 주야장천 부인을 들이죠.”
“어떤 여인들은 원래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아.”
두변은 혈관음의 손에 눈이 가려진 채 진지하게 물었다.
“그날 밤에 꿈을 꾼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더는 해적을 하기도 싫고, 약탈하는 것도 그만두고 나랑 오붓하게 살림을 차리고 싶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요?”
“아니, 잘못 듣지 않았어. 잠꼬대도 아니야.”
혈관음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날 혈관음이 한 말은 잠꼬대는 아니었다. 영종오 대종사 덕분에 사경에서 헤어나온 혈관음은 정신이 몽롱했다. 아마 정신상태가 취약한 상태에서, 그녀의 가장 약하고 진실된 말이 튀어나온 것일 테다.
두변은 혈관음의 손을 치우지 않고도 혈관음의 두 눈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혈관음의 속눈썹과 두 눈 위로 차례로 입맞춤했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혈관음, 당신과 함께 살고 싶은데, 나와 함께하는 건 어때요?”
혈관음이 눈을 감은 채 두변의 입맞춤을 즐겼다.
“나도 원해.”
혈관음이 대답했다.
이번에는 혈관음이 고개를 들어서 두변의 입에 입맞춤한 뒤에 말했다.
“날 만족시킬 수 있는 기준은 아주 낮아. 지금 그 어떤 말로도 내 행복을 형용할 수 없어. 나는 꿈을 꿔도 너와 함께 살림을 차리는 꿈을 꾸고, 네게 놀림당하고, 네 온갖 수단에 달아오르고, 너와 함께 의부 대인을 모시고 싶어.”
두변은 혈관음의 말에 몹시 감동했다. 하지만 왠지 뒤이어 혈관음이 ‘하지만’이라고 하면서 말을 이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린 함께할 수 없어.
나도 해적이 하기 싫고, 약탈을 일삼고 싶지 않아. 지금의 신분은 나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고 열등감 들게 해. 하지만 난 이 일을 멈출 수 없어. 의부 대인께서 매년 필요하신 군비 중 삼 분의 일을 우리 혈교방에서 충당해드리고 있어.
내게는 나만 바라보고 사는 수하 이천 명이 있고, 내가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해. 진남공 의부께 태산과도 같은 은혜를 입었으니, 의부의 기대를 저버릴 수도 없어. 네가 이문회 대인을 저버릴 수 없듯이 말이야.”
혈관음이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서로 만나 한 번 웃으며 지난 원한을 씻어버린다던가, 강호를 누비는 호걸들은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는다던가 하는 말이 있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미련 없이 널 떠날 생각도, 그렇다고 해서 너와 살림을 차릴 수도 없어. 내가 글공부를 많이 못해서 지금 이 감정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두변이 말했다.
“하기야 두 사람의 애정만 장구하다면,
어찌 조석을 같이 있기만을 바랄까.”
(兩情若是長久時, 又豈在朝朝暮暮.
진관(秦觀), <작교선鵲橋仙>. 칠월칠석의 노래.)
혈관음은 자신의 남자가 이토록 재능이 넘치는 사내라는 점이 자랑스러웠다.
확실히 두변이 재주가 넘치는 셈이지만, 이 시는 남의 시를 베낀 것이 분명했다. 물론 두변은 절대로 밝히지 않겠지만.
혈관음은 바로 두변의 이런 모습에 더 끌렸다. 어쩔 땐 건달 같기도 하고, 어쩔 땐 재능 넘치는 서생 같기도 한데, 용모까지 준수하니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재능 넘치는 서생이었다면 너무 처량해 보였을 것이고, 건달이었다면 너무 저속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성격을 적당히 중화시키니,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송결 의부가 벌써 십만 대군을 이끌고 안남 왕국에 도착하셨어. 반군과의 대전이 곧 시작될 테니, 나도 그리로 가야 해.
나는 해적이 아닐 땐 의부 대인의 주력 수군이거든. 나도 군함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반군과 해전을 치러야 해.”
두변은 마음이 아팠다. 혈관음에게는 떨칠 수 없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고, 그 모든 걸 던져버리고 소박하게 살림을 차릴 수 없는 처지였다.
두변은 혈관음이 참전한다는 걸 막을 수도 없었고,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두변은 말없이 혈관음의 입술 위에 입맞춤했다.
“맞다. 몇 살인지 알려줄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 진짜 이름은 뭔데요? 어찌 됐든, 내가 이 세계에서 맞이한 첫 여인의 이름이 뭔지, 나보다 몇 살이 더 많은지 정도는 알아야죠.”
“그냥 계속 혈관음이라고 불러. 그리고 내가 몇 살인지는 나도 몰라.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이야. 어차피 내 정신연령은 너보다 어리니까 뭐.”
혈관음이 보기 드물게 애교 섞인 표정을 지으면서 투정 부리듯이 말했다.
‘영원한 낭랑 18세가 이 세계에도 있었네.’
두변이 속으로 웃으면서 생각했다.
“아, 영종오 대종사는 어디 계세요?”
두변이 물었다.
“부상 당하신 뒤로 제대로 쉬지를 못하셔서 상태가 많이 심각해지셨어. 지금 안전한 동굴에 들어가셔서 현기로 자가치유를 하고 계시는데, 아마 사나흘 더 지나면 나오실 거야.”
영종오 대종사의 상태를 듣자, 두변은 미안하면서도 마음 한켠이 따뜻해졌다.
자신을 아낌없이 아껴주는 대종사가 그토록 원하는 자유를 끝내 가질 수 있을까 싶었다.
“언제 떠나요?”
두변이 물었다.
“내일 동이 트기 전에 떠나. 날 배웅하지도 말고, 아무런 작별의 인사도 하지 마. 그냥 지금처럼 날 안고 자. 내가 떠날 때 깨어나지도 마. 그래야 다음에 만나는 시간이 더욱 달콤할 테니까.”
명령투에 가까운 혈관음의 말을 들은 두변은 웃으면서 알겠다고 했다.
혈관음은 만족스러운 답변을 듣고는, 두변의 품에 파고들면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두변은 눈을 감은 혈관음을 바라보면서 능구렁이처럼 물었다.
“한 번 더 할래요? 나름 할 줄 아는 기술이 꽤 많은데, 내 혀 기술을 한 번 맛보는 건 어때요?”
“이럴 때는 산통 좀 깨지 마. 이대로 껴안고 자고 싶어서 그래.”
확실히 어떤 여인들은 감정적인 요구사항이 높은 대신, 생리적인 요구사항은 그리 까다롭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두 사람이 조용히 껴안고만 있자, 두변은 적막감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쪽에서는 당신 같은 미인에게 같이 밤을 보내자고 할 때 어떻게 하는지 알아요?”
“응?”
혈관음이 콧소리로 대꾸하자, 두변이 짓궂은 말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당신의 거길 핥고…….”
두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혈관음이 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알겠어요. 안 할게요. 안 할게.”
두변이 웃으면서 혈관음을 꼭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포근하고 달콤한 분위기 덕분인지, 눈을 감은 두변과 혈관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륵 잠들었다.
두 시진이 지났을 무렵, 새벽녘의 푸른 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혈관음은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두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두 눈 위로 가볍게 입맞춤을 한 뒤, 그의 코끝에도, 입술 위에도 살포시 입을 맞췄다.
두변의 입술 위에 머물러있던 혈관음의 입술은 족히 몇 분이 지나고서야 떨어졌다.
침상에서 조용히 일어난 혈관음은 자신의 뱀가죽 옷을 입은 뒤, 경장을 걸쳤다.
‘잘 있어. 나의 애인.’
잠든 두변의 모습을 바라보며 혈관음은 속으로 말했다.
혈관음은 소리 없이 방을 나간 뒤, 수하들과 함께 군함을 이끌고 안남 왕국으로 떠났다.
곤히 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던 두변이 눈을 떴다.
그는 공기 중에 남은 혈관음의 향기를 맡으면서 작게 말했다.
“잘 가요. 나의 여인.”
두변은 아직 이불에 묻어있는 혈관음의 체온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