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장. 다시 시작된 대살육
왕굉이 낭정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작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난 산장 자리에 그리 오래 있을 생각이 아니니, 조금만 기다리면 자네 것이 될 게야.”
이제 막 몸을 일으켰던 낭정이 다시 무릎을 꿇으면서 예를 올렸다.
“산장 어른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왕굉이 말했다.
“학원에 있는 모든 관리와 선생들을 집합시키게. 내 발표할 것이 몇 가지 있으니.”
“알겠습니다.”
낭정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장 왕굉의 명령을 전하러 갔다.
반 시진 뒤, 광서 환관 학원의 모든 관리와 선생이 한자리에 모였다.
왕굉이 물었다.
“다 왔는가?”
낭정이 대답했다.
“기마술 교관 이위를 제외하고는 다 모였습니다.”
이위는 이문회의 심복이니, 지금 이 시간에 환관 학원에 있을 리 없었다.
왕굉이 분노하면서 말했다.
“학원의 선생으로서 무단결근을 했으니, 이위의 모든 직무를 파면한다.”
이제 막 부임한 왕굉이 첫날부터 위세를 떨치는 순간이었다.
“알겠습니다.”
낭정이 대답했다.
왕굉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몇 가지 전달할 사항이 있어서 한자리에 불렀다. 첫째, 이문회가 대역 죄인이 되어 그에게 있던 모든 직무가 파면되었고, 심문을 위해 경성으로 압송될 예정이다. 그러니 우리 엄당의 모든 사람은 지금 이 순간부터 엄당의 미래를 위해서 이문회와 철저히 선을 그어야 한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사람들은 이문회를 엄당의 하늘이라 여기면서 따랐기에, 하루아침에 대역 죄인이 되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둘째, 열하루 뒤가 폐하의 만수절(萬壽節)이다. 이에 광서 환관 학원의 졸업 시험을 70일 앞당겨서, 폐하의 만수절에 치를 것이다. 좋은 성적을 거둬서 폐하의 만수무강을 기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첫 번째 소식의 충격이 가시지도 않은 채, 사람들은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안 그래도 졸업 시험까지 81일이 남은 것도 벅찼는데 이제 열하루 뒤가 시험이라는 말이 아닌가.
물론 81일 정도는 두변에게는 어찌어찌 하면 충분한 기간이었다. 하지만 아직 몇 과목은 손도 못 댄 상황에서 열하루 뒤가 졸업 시험이라면, 이건 절망이나 다름없었다. 이건 지금 당장 이문회와 함께 불바다와 칼산을 넘고 있는 두변에게는 졸업 시험에 참가하지 말라는 것과도 같은 말이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졸업 시험에서 1등을 하란 말인가.
“셋째, 두변이 3대 학부 대회에서 세운 업적으로 졸업 시험에 가산점 50점을 주기로 했던 것을 무효로 한다. 애초에 졸업 시험에 그렇게 많은 가산점을 주는 건 불공평한 일이고, 학생들은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해야 한다.”
‘당엄을 밀어주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군. 어차피 두변이 시험을 참가한다고 해도 당엄이 1등을 할 텐데,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소리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했다.
염주부, 혈관음 저택.
분노한 이문회가 낮은 목소리로 마지막 경고를 던졌다.
“다시 말한다. 누구든 두변을 건드린다면, 내가 그놈의 구족을 멸할 것이다.”
직예성 어마감 제독의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그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이문회, 너는 이미 모든 직책에서 파면되었다. 봉황이 쇠하면 닭보다도 못하다는 걸 빤히 알면서,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게냐?”
이문회가 눈빛에 어린 살기를 거두지 않고 대답했다.
“내게 아무런 직책이 없고 감옥에 가둬진다고 해도, 정능 네놈의 일족을 멸하는 건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다.”
“이문회, 나는 폐하의 성지를 수행하러 온 것인데, 감히 성지를 거역한다는 뜻이냐.”
이문회가 반박했다.
“폐하의 성지에 두변에 관한 언급이 단 한 글자라도 있나?”
정능이 소매 속에 있던 다른 두루마리를 꺼내 펼치면서 말했다.
“이건 사례감의 균령(鈞令)이다. 여기에 두변을 경성으로 압송하여 심문하라는 내용과 함께 명령에 불복할 경우 그 누구든 즉살하라는 내용이 쓰여있다.”
사례감은 대녕 제국 엄당의 최고 권위 기관이고, 조정의 내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관이다. 명목상으로는 동창, 염운사, 시박사, 직조국 등 엄당 산하의 모든 기관을 관장하는 곳이기도 했다.
동창의 주인인 이연정도 대외적으로는 사례감 관할하에 있었다.
정능이 뒤로 한발 물러나더니,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왕 공공, 이문회가 어마감 사람인 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번거로우시겠지만, 왕 공공께서 친히 나서 주셔야 할 듯합니다. 이미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봉황 이문회의 기를 좀 눌러주시지요.”
일순간, 정능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던 무사들과 환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면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가슴팍에 공작이 수놓아진 주홍색 관포를 입은 대환관이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사람은 3품 문직 대환관으로, 이문회보다 품급이 반 급 높은 대녕 제국의 고급 환관이었다. 동창은 사례감 관할 기관이니, 이문회 앞에 선 왕설이라는 대환관은 이문회의 상사인 셈이었다.
왕설이라는 사례감 대환관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환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주홍색 연지를 바른 입술,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요염함과 음험함이 공존하여 보기만 해도 오싹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직무는 황제의 장서를 관리하는 것으로 귀한 전장(典藏)을 조심스럽게 만지는 게 일인지라 두 손이 무척 가느다랗고 고왔다.
왕설이 두변 앞으로 다가가서 혀를 찼다.
“어이고, 이놈 얼굴이 참으로 준수하구나. 경성에 들어가서 죽기 전에 경성의 귀한 분들을 모시기에 딱 좋겠구먼. 이 아래에 있는 얼굴도 예쁘장하려나?”
왕설이 말한 ‘아래에 있는 얼굴’은 두변의 둔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는 두변을 향해 뾰족한 다섯 손가락을 펼치면서 섬뜩한 눈빛으로 말했다.
“가는 길에 말을 안 들을 것 같으니, 네놈 두 손의 근맥을 잘라버려야겠다. 어차피 시중들 때 네가 손을 쓸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왕설이 두변의 근맥을 자르려고 손을 뻗었다.
이때, 이문회가 입을 열었다.
“왕설 공공,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누구든 제 의자를 건드렸다가는 그놈의 두 손을 잘라버린다고요.”
사례감 3품 대환관 왕설이 같잖다는 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
“이문회. 네놈이 나를 겁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놈이 전성기였을 때도 내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했는데, 지금 죄인이 되어 죽음을 앞둔 마당에 무슨 허풍이냐. 잘 봐둬라. 난 네 의자의 두 팔 근맥을 끊을 뿐만 아니라, 견갑골을 떼어낼 것이야.”
정능이 옆에서 무사들에게 명령했다.
“왕설 공공을 해하려는 자가 있다면, 즉살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수십 명의 무사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어디 한 번 뼈를 발골해 볼까.”
왕설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두변의 팔뚝 근맥을 향했다.
스윽!
이문회가 눈 깜빡할 사이에 검을 뽑아서 왕설을 향해 휘둘렀다. 서늘한 빛이 순식간에 눈앞을 지나는 순간, 3품 문직 환관 왕설의 두 팔이 댕강 잘려나갔다.
잘린 두 팔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뿜어지고!
왕설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바닥에 떨어진 제 두 팔을 쳐다보고는 고막이 찢어질 듯 비명을 내질렀다.
이 광경을 보고 2초간 고민하던 두변은 품에서 영설 공주의 단검을 꺼내 왕설의 가슴을 푹 찔렀다.
이문회는 두변의 행동에 흠칫 놀랐다가, 큰소리로 기합을 내지르며 왕설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우지끈!
사례감 3품 문직 환관의 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으로 잘렸다.
그렇게, 물에 빠진 개를 호되게 족칠 요령으로 으스대면서 나타났던 환관 하나가 말 그대로 처참하게 죽음을 맞고 말았다.
두변이 갑자기 충동적으로 사례감 3품 환관을 죽인 건 아니었다.
그는 이문회가 왕설의 두 팔을 자른 것을 보고, 무언가를 묻듯이 이문회를 한 번 쳐다보았다.
두 가지 의미에서였다.
첫 번째 이유는 어차피 두 팔이 잘렸는데, 그냥 죽여버리는 게 어떻냐는 의미에서였다. 팔이 잘렸으니, 단순히 사람을 다치게 한 수준이 아니라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지 않은가.
두 번째 이유는 이문회는 동창의 고위층이니 그가 잘못을 저질렀을 땐 동창의 사람이 와서 그를 잡아가야 응당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례감과 어마감에서 사람을 보냈다. 왜일까?
어마감은 병마를 관리하는 곳이고, 사례감은 내각에 준하는 기관이었다. 그런데 이 두 기관이 언제부터 사람 잡는 일까지 했는가?
물론 어마감의 정능에게는 성지가 있으니 이문회가 거역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사례감의 균령은 어떻게 된 셈인가? 3품 문직 환관까지 따로 보내서 두변을 잡는다?
이건 일종의 탐색이며 명백한 도발로, 단지 이문회뿐 아니라 동창 주인인 이연정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아니면 그 안에 더 깊은 음모가 있는 걸까?
두변은 어마감과 사례감에서 이문회를 더 큰 함정에 빠트리려고 이렇게 도발한 건가 싶은 마음에 단검을 꺼냈다.
이문회는 두변이 나서서 사람을 죽이자, 더 모질게 왕설을 반으로 잘라버렸다. 그렇게 해야 살인죄를 자신이 뒤집어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반으로 갈라진 왕설을 본 정능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왕설의 두 동강 난 시신을 쳐다보았다.
‘이문회가 충심이 깊고 수단이 악독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독한 놈일 줄은 몰랐구나. 무려 사례감의 3품인데! 왕설이 병필(秉筆) 환관보다는 못한 품급이고, 장사(掌司) 환관도 아니라지만, 이문회의 상사이자 궁정 환관이다. 궁정은 내각과도 같은 곳인지라, 같은 3품 환관인 나도 왕설에게는 예를 갖춰야 하는데, 이문회 이놈이 정말로 내정 환관인 왕설까지 죽일 줄이야.’
정신을 차린 정능이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들고 호통쳤다.
“이문회, 반역을 하겠다는 것이냐!”
이문회가 검날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어내고는 정능에게 시선을 옮기면서 말했다.
“정능, 난 이미 건드리지 말아야 할 하늘까지 찌른 사람이다. 소문에 의하면, 내가 이미 왕인과 계동앙까지 죽였다는데, 왕설 하나 더 죽인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나?”
정능이 경악했다.
이문회가 이어서 말했다.
“내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제국 체제 내의 사람을 건드리게 된다면, 꼭 원리 원칙을 따져가며 죄를 물었다. 내가 사람 하나를 죽이겠다고 해도, 명백한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하지. 그런데 어떤 이들이 친히 내 원칙을 깨부숴줬더군. 그럼 날 탓하지 말아야지.”
이문회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정능, 나를 데려가려면 데려가도 좋다. 하지만 두변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검을 쥔 정능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꼭 저놈을 데려가겠다면?”
“후.”
이문회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면서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대살육을 다시 시작해야겠지. 사례감 사람도 죽인 마당에, 어마감 사람을 못 죽일까.”
정능은 부아가 치밀어 올라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문회가 황제의 성지 앞에서도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이자, 정능이 사악한 미소를 보이면서 말했다.
“그래?”
곧이어 정능이 큰소리로 명령했다.
“죄인 이문회와 두변을 체포하라. 체포에 불응하는 자는 즉살하도록.”
수십 명의 무사가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이문회와 두변을 포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