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장. 또 다른 요구
이문회는 또 한 번 무언가 깨달은 표정이었다.
여씨 토사가 반란을 일으킨다는 건 너무도 중대한 일이기에, 이익 집단이 이문회의 목숨만 가져가기엔 자신들이 밑지는 장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번에 이문회가 광서에서 몇천 명의 여씨 가문 사람을 죽인 건 그렇다 치지만, 여씨 가문의 수백만 냥 은자를 빼돌려서 이익 집단에 막대한 손실을 안겨주었다.
그러니 지금 이문회를 죽이는 건 죽이는 것이고, 뒤이어 여씨 토사가 정말로 반란을 일으킬 땐 황제에게 또 다른 요구를 할 작정인 것이다.
예를 들면 이문회가 빼돌린 수백만 냥의 은자를 돌려달라고 하거나, 그 값의 두 배가 되는 은자를 황제에게 요구하는 것.
혹은, 이문회의 의부인 동창 주인 이연정을 끌어내리는 것?
‘이 몹쓸 것들!’
이문회의 눈에 또다시 살기가 어렸다.
이익 집단은 이왕 이렇게 요란하게 일을 벌인 거, 이문회 하나 죽인다고 끝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만천하가 동창을 공격하고 있는데, 어찌 말로만 그치고 말 것인가.
“간신 이문회가 성지를 따르지 않고, 황제의 성지를 전하는 흠차(欽差: 황제의 명령으로 보내던 파견인)를 죽였다. 반역자 이문회를 당장 숙청하고, 반항하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려라.”
낙문이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광서 참장(參將) 임효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말하자면 임효라는 자도 꽤 익숙한 사람일 것이다. 이 사람은 최병정의 예비 신랑인 임필의 숙부이자, 광서군 호족 임씨 가문의 일원이었다.
뒤이어 밖에서 전고가 울리는 소리, 갑옷과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혈관음 저택 밖으로 무장한 병사 대열이 집결했다.
일천, 이천, 삼천, 사천, 오천 명.
진남공 송결이 십만 대군을 이끌고 안남 왕국으로 향하면서, 광서성 내의 정예병을 거의 모두 데려갔다. 지금 광서에 남은 정예병은 많아야 삼사천 명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대는 정예병 무려 오천 명까지 이끌고 왔다.
낙문이 광서 내에 남은 정예병을 모두 끌어모은 것뿐만 아니라, 호족 가문의 사병까지 모아온 것이다.
게다가 낙문은 몰래 선박까지 동원해서 어둠을 틈타 병사들을 염주부로 옮겼다. 모든 걸 벼락치기로 끝내겠다는 기세로 조용히 급습을 도모했다.
이익 집단들이 어떻게든 이문회를 광서 안에서 죽이기 위해 정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고 칭찬할 만하지 않은가.
2각이 지날 무렵, 낙문, 축무애, 참장 임효가 이끌고 온 병사 오천 명이 혈관음의 저택을 빽빽하게 포위했다.
그리고 바깥에는 몇백 구의 대형 쇠뇌와 투석기가 장전을 마친 상태로 혈관음의 저택을 겨누고 있었다.
이문회에게는 기껏해야 천여 명의 무사가 있을 뿐, 완전무장한 정예병 오천을 상대하기에는 몹시 벅찬 상황이었다. 게다가 엄청난 살상력을 가진 무기까지 동원했으니, 이문회와 무사들이 이번엔 목숨을 걸고 싸워도 질 가능성이 높았다.
낙문 등은 이문회를 어떻게든 이곳에서 죽이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고, 이 상황이라면 이문회를 정말로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 보니, 사례감의 왕설뿐만 아니라 정능도 희생물이었던 것이다.
만약 어마감의 정능이 이문회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낙문, 축무애, 임효가 이렇게 요란하게 병사들을 이끌고 올 필요가 있었을까.
하지만 그들은 정능이 절대로 이문회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익 집단은 이문회가 성지를 전하는 흠차인 정능까지 죽이는 것을 계략으로 짰고, 이문회가 성지를 거역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한 후 정당한 명분으로 이문회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이것을 사마귀가 매미를 잡느라 등 뒤에 있는 참새를 못 본다고 하지 않던가.
이익 집단은 이문회가 스스로를 쇠사슬에 묶어서 경성으로 간다고 해도, 절대로 황제의 처분을 거칠 일 없도록 이곳에서 이문회를 없앨 작정이었다.
어떻게든 이문회를 죽이고자 하는 이익 집단의 집념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이문회가 성지를 거역했으니, 이 자리에서 반역죄로 주살한다!”
“안에 있는 모든 동창 무사는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모두 격살할 것이다!”
낙문이 이끌고 온 병사들이 밖에서 한 번, 또 한 번 외쳤다.
때가 됐다고 판단한 광서 참장 임효가 큰소리로 외쳤다.
“준비!”
축무애는 전 광서 총병관으로, 지금은 남해도장의 산장이었다. 그리고 낙문도 문관이다 보니, 이번 전투를 지휘하는 최고 지휘관은 광서 참장 임효였다.
수천 명의 병사가 화살촉에 불을 붙이고 혈관음의 저택을 향해 화살을 겨눴다.
몇십 구 대형 투석기에는 독유탄과 거대한 돌덩이가 장전되어 있었다.
낙문 등이 바라는 건 저택 안에 있는 동창의 무사들, 이문회, 그리고 두변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죽이는 것이었다.
이문회가 두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고는 두 손으로 검을 쥐었다.
그가 비장한 눈빛으로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형제들, 사생결단하라!”
그러자 동창 무사 천 명이 일제히 검을 들었다.
“주인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문회에게 충성하는 모든 무사들이 이를 악물고 생에 마지막 결전이 될지도 모르는 전투를 준비했다.
임효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수천 명의 병사를 쳐다보면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광서 참장이긴 하지만, 이렇게 제대로 된 전투를 지휘하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첫 전투의 상대가 그 유명한, 제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이문회이지 않은가.
임효는 이문회를 죽이는 데 성공해서 큰 공로를 세우리라 다짐했다. 내각이 됐든, 병부가 됐든, 임효는 자신이 이 일을 끝내고 최소 총병관까지 승진할 것이라 예상했다.
이제야 마흔이 된 임효는 이 나이에 벌써 총병관이 된다면, 분명 제국 전장의 기적이 될 거라는 생각에 한껏 들떠있었다.
임효가 소리쳤다.
“두변, 네 이놈! 네놈이 내 조카 임원여를 죽일 때, 오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느냐!”
임원여는 두변을 포위해서 금지된 살상 무기를 썼다가, 일이 틀어지고는 곧바로 자결한 여경사의 만호이다.
임원여가 광서 임씨의 먼 친척이긴 하나, 사실 임효는 그의 생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다.
‘두변, 네 이놈! 네놈이 우리 임씨 가문의 추문을 퍼트릴 때, 오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느냐!’
두변 때문에 최병정이 다른 사내와 내통했다는 추문이 온 세상에 낱낱이 공개되었고, 임씨 가문은 그 일 때문에 갖은 치욕을 겪어야 했다.
임효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하하하. 이문회. 너는 영웅 행세를 하느라 바빠서 나 임효를 안중에 두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오늘 네놈이 결국 내 손에 죽게 되었구나.”
임효가 두변에게 시선을 옮기고 외쳤다.
“두변, 네 이놈. 이 몸이 너를 죽인 뒤에, 네놈의 뼈를 깎아서 재로 뿌려주마.”
기세등등한 임효가 한껏 큰소리를 치더니, 살기 어린 눈빛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서 그가 손짓 한 번 휘두르기만 하면, 수천 명의 병사가 이문회, 두변과 동창 무사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이문회, 두변. 죽…….”
다음 순간.
어디선가 아름다운 그림자 하나가 사람들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매혹적인 향기가 사람들의 코끝을 간지럽히고,
눈부시게 반짝이는 검광이 황홀한 곡선을 그리면서 허공을 갈랐다.
푸슉.
광서 참장 임효의 큰 머리가 잘린 채 그대로 허공에 붕 떴다.
열 걸음에 사람을 하나씩 죽이니, 천 리를 나아가도 감히 거칠 것이 없어라!
(十步殺一人,千里不留行 - <협객행>, 이백)
무공 절정, 절세 미모, 넘치는 의협심!
영설 공주가 사뿐히 땅에 발을 디뎠다. 손 안의 검은 아직 검집에 넣지 않은 채였다.
뒤이어 광서 참장 임효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고, 그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머리 잘린 임효의 시신이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명문세가 출신에 아직 나이도 젊은 광서 참장은 그렇게 영광스러운 순간을 맞이하지도 못한 채 죽어버렸다.
“감히 군령도 없이 사사로이 군대를 움직이고, 대형 살인 병기를 사용한 죄! 반역을 일으키려는 자는 이 자리에서 격살하겠다.”
영설 공주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광서 순무 낙문, 남해 도장 산장 축무애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바닥에 나뒹구는 임효의 시신을 쳐다보았다.
당연히 두 사람도 군사를 동원해 이문회를 죽이는 데에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이문회처럼 동창 소속의 특무 무장 무사들을 이끌고 온 게 아니라, 제국의 정규군을 동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낙문과 축무애가 지휘권을 젊은 장수인 광서 참장 임효에게 준 이유가 이것 때문이기도 했다. 나중에 무슨 일이 났을 때 임효에게 덮어씌우기 좋기 않겠는가.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두 사람은 이문회를 죽인 뒤에 임효에게 독박을 씌우면 씌웠지,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임효가 영설 공주에게 죽임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광서 순무 낙문이 이를 부득 갈면서 영설 공주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공주 전하, 이문회가 폐하의 성지를 거역하고, 성지를 전하는 흠차를 살해했습니다. 하여 신들은 이문회가 반역을 일으키려는 것으로 간주하여 임효 참장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임효는 조정의 공의를 위해, 폐하의 체면을 위해 나선 것인데, 공주 전하께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고 이렇게 임효를 죽이시는 것은 너무 맹랑한 행동 아니겠습니까.”
광서 순무 낙문은 강경하게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영설 공주가 물었다.
“이문회가 성지를 거역하고 흠차를 죽였다는 걸 어떻게 알지? 자네가 보았나?”
영설 공주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낙문이 멈칫했다가 말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안으로 들어가서 보시지요.”
영설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들어가서 보지.”
이때, 멀리서 다급한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수백 명의 기마병이 말에 박차를 가하며 저택 앞으로 몰려왔다.
이들은 영설 공주의 친위 기마병 부대였다. 조금 전, 상황이 너무 급박했던 터라, 영설 공주가 기마병 부대를 뒤로하고 경공으로 먼저 이곳에 왔었다.
그녀의 기마병 부대는 열심히 말을 달려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영설 공주, 광서 순무 낙문, 축무애 등이 혈관음의 저택 안으로 들어가서 이문회가 성지를 거역한 게 맞는지 확인했다.
저택 안에는 수백 명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낙문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자들은 모두 어마감의 무사들입니다. 성지를 전하는 흠차의 호위 부대인데, 이렇게 이문회의 손에 다 죽임을 당했지요. 이게 반역이 아니라면, 뭐가 반역이란 말입니까? 공주 전하, 부디 국법에 따라 역적을 죽이시어 제국의 위상을 바로잡아주시지요.”
이문회가 앞으로 나서며 공손한 태도로 무릎을 꿇었다.
“신,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영설 공주가 이문회를 부축하여 일으키면서 물었다.
“이 대인, 낙문 순무가 말한 게 사실인가?”
“사실이 아닙니다.”
이문회가 대답했다.
낙문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여기 있는 시신들이 전부 누구의 것이란 말이오?”
이문회가 낙문에게 시선을 돌리며 천천히 말했다.
“그건 나 또한 알고 싶은 겁니다. 이곳에 있는 시신은 모두 누구의 것입니까?”
이문회가 바닥에 있던 시신들을 차례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이자는 검남각 사람이고, 이자는 염주부 순검 소속의 소장군이며, 이자는 남해도장의 호위군이군요. 이중 누구 하나라도 어마감 소속의 무사가 있습니까?”
이문회의 말을 듣자, 낙문 등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검남각, 염주부, 남해도장에 사람을 보내서, 이 시신들을 인수해 가라고 전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문회가 여유로운 눈빛으로 낙문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아무도 이문회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