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장. 간덩이가 부은 놈들
정능이 데려온 흠차 시위는 고작해야 수십 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문회를 죽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광서성에서 수백 명을 모아다가 어마감 무사로 변장시켰다.
정능 등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꼴이 되었다.
정능이 데려왔던 수십 명의 어마감 무사의 시신은 이미 이문회가 흔적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깨끗이 처리한 상태였다.
“정능 공공은 왜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오? 폐하의 성지를 전하는 흠차인데, 왜 이곳에서 죽었냔 말이오.”
낙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문회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문회가 대답했다.
“죽다니요? 누가요? 공공은 두 다리가 잘리고 혀가 잘렸을 뿐입니다. 성지를 전하는 흠차라고 하셨습니까? 그런데 왜 전 폐하의 성지를 보지 못했을까요. 우리는 흠차 시위대로 변장한 놈들에게서 정능 공공을 구해낸 것뿐입니다. 정능 공공은 제 환관 학원 사형인지라, 저와도 사이가 몹시 각별합니다. 그런데 왜 제가 정능 공공을 죽이겠습니까?”
어마감 부제독 환관 정능이 고통스럽게 입을 벌렸지만, 혀가 잘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두 팔까지 잘린 터라 바닥에 대고 뭐라고 글씨를 쓸 수도 없었다.
“아주 간덩이가 부은 놈들이지요. 어떻게 정능 공공의 혀를 자른 것도 모자라서 두 손까지 잘라낼 수 있을까요. 이놈들이 흠차를 납치해서 살해한 뒤, 가짜 흠차로 변장하여 무슨 일을 벌이려던 게 틀림없습니다. 이번 일은 꼭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
광서 순무 낙문과 축무애는 부아가 치밀어 올라서 미칠 지경이었다.
영설 공주가 말했다.
“그렇게 된 일이로군. 이 대인의 말처럼 이 일은 꼭 철저히 조사해야겠군.”
영설 공주가 낙문과 축무애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이문회 공공에게 전할 성지가 있는데, 두 대인도 계속 이곳에 남아 있을 건가?”
이문회가 한 말에 빈틈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낙문과 축무애는 영설 공주가 있는 한 이문회를 광서 내에서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문회, 어차피 넌 죽을 고비를 넘기기 힘들 것이다. 나중엔 폐하께서 친히 네놈을 처형하시겠지.”
낙문과 축무애가 분을 삭이면서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서 모아온 병사 오천 명도 두 사람을 따라 깨끗하게 물러났다.
이문회가 반드시 죽을 거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만, 광서에서 죽지 않은 탓에 막대한 손실이 생기고 말았다. 낙문 등은 치가 떨릴 정도로 영설 공주가 증오스러웠다.
“황제의 성지를 내리니, 사건 심문을 위해 이문회를 경성으로 압송한다.”
영설 공주가 성지를 읽었다.
이문회가 무릎을 꿇고 외쳤다.
“신, 이문회. 명 받들겠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가 이문회를 경성으로 잡아들이라는 성지를 내린 뒤, 영설 공주는 동창 이연정이 사람을 보내는 게 아니라 어마감 사람이 이문회를 체포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한 영설 공주는 이익 집단이 이문회를 산 채로 경성까지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했고, 이문회에게 성지를 거역했다는 죄목을 씌워서 광서에서 이문회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
영설 공주는 즉시 황제에게 똑같은 성지를 한 부 더 받은 뒤, 수백 명의 친위 부대를 이끌고 빠르게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녀와 그녀의 친위 부대는 쉬지도 않고 밤낮없이 염주부를 향해 달렸고, 그 덕분에 영설 공주가 때맞춰 도착하면서 최악의 국면은 피할 수 있었다.
영설 공주는 커다란 키의 이문회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바라보았다. 그의 야윈 모습을 보자, 영설 공주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공공, 정말 미안하네.”
이문회가 황제와 함께 보낸 시간은 겨우 2년 남짓이었다. 당시 무척 어렸던 영설 공주는 이문회의 등에 업히거나 목마를 타고 놀았다.
이문회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폐하를 위해서, 제국을 위해서, 목숨이 꺼질 때까지 온몸을 바치겠습니다.”
영설 공주가 말했다.
“내가 친히 이 공공을 경성까지 호송해주마. 그 누구도 이 공공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이문회가 다시 한번 큰절을 올렸다.
“감사드립니다. 공주 전하.”
이때, 옆에 있던 두변이 조용히 영설 공주에게 말했다.
“공주 전하. 잠시 조용히 말씀을 나누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영설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변, 네가 여천천을 죽였다고 들었다. 네가 모후와 태후 마마의 울화를 풀어주어서 고맙구나. 그 버르장머리 없는 여인 때문에 태후 마마께서 화병이 나실 지경이었다.”
영설 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두변이 고개를 끄덕이고 진지하게 물었다.
“이번에 제 의부가 정말로 목숨을 잃게 되는 겁니까?”
“이문회 공공은 부황의 벗이다. 이 대인은 나를 어렸을 때부터 봐왔고, 황실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는 자 또한 이 대인이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공주 전하께서 쉬지 않고 먼 길을 달려오셔서 의부를 구해주신 것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수십 개의 주부에서 상인들이 파업을 하고, 조운이 중단되었다. 경성도 곧 있으면 식량난에 허덕이게 될 것이다.
북쪽과 서쪽에서는 이미 몇몇 대군이 훈련을 그만두고 각지의 동창 관아를 포위하고 있다. 국자감, 태학당의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면서 궁문 밖에 꿇어앉아 단식 투쟁을 하고 있다. 그로 인해 매일 죽어 나가는 학생이 무려 십수 명이다.
게다가 연로한 대신들까지 궁문 앞에서 이마를 바닥에 찧으면서 부황께 역적을 몰아내 달라고 간청을 드리고 있다.”
“그놈들의 목표는 의부에 그치지 않을 겁니다. 동창 주인 이연정 대인도 노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제국에서 폐하께 가장 충직한 신하 두 명이 바로 이연정 공공과 이문회 공공이기 때문이지. 이연정 공공은 절대 무공자이지만, 이익 집단과는 어느 정도 융통성을 가지고 계시지. 하지만 폐하를 위해서 못 할 게 없는 이 공공이 동창의 주인이 된다면, 동창은 부황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영설 공주가 잠시 말하는 걸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문회 공공은 부황의 벗이기도, 나의 벗이기도 하다. 영종오 대종사는 네 사부이지만, 내 사부이기도 하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해서 네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니, 나를 탓하지 말거라.”
두변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제가 감히요. 당치도 않는 말씀이십니다.”
“이번에 이 대인이 목숨을 잃을 확률이 7할은 된다. 부황께서 어쩔 수 없이 이 대인을 처형하게 된다면, 부황의 수명도 10년은 단축될 것이다.”
두변이 고통스럽게 눈을 질끈 감았다.
“부황은 다른 모든 압력은 감당할 준비를 마치셨다. 심지어 경성에 들이닥칠 식량난도, 몇 개 성에서 난을 일으킬 것도 대비하셨다.
경성은 제국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문관 집단, 무장 집단, 명문 세가의 근간이기도 하니까. 서쪽과 북쪽에서 군대가 병사들을 이끌고 난을 일으킨다고 해도, 파급력이 그리 크진 못할 것이다. 어차피 무장 집단도 제국의 사람이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 여여해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부황께서는 이 대인을 처형하셔야만 한다.”
영설 공주가 측은한 눈빛으로 두변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진남공이 십만 대군을 이끌고 안남 왕국으로 가신 터라, 제국의 서남부를 지킬, 여여해를 막을 병마가 없습니다. 게다가 여여해가 만약 청군측을 내세우면서 동창을 몰아낼 기세로 들이닥친다면, 여여해를 물러나게 할 방법은 오직 하나겠지요. 그리고 의부께서 처형당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최악의 경우 이연정 대인께서도 동창 주인 자리를 내놓게 되실 것이고요.”
두변의 말에 영설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해 한경제는 조조를 죽인다고 해서 칠국의 왕후들이 물러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를 죽여야만 했다.
지금의 천윤제는 이문회를 죽이면 여여해가 물러날 것을 알고 있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고 이문회를 죽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두변이 말했다.
“저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의부를 구할 겁니다.”
영설 공주가 잠시 두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는 이 대인을 경성까지 호송할 것이다. 하지만 이 대인을 이 상황에서 구해내는 건 네 몫이다. 꼭 기억하거라. 여씨 토사가 반란을 일으키는 그날이 바로, 이 대인의 처형일이 될 것이다.”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꼭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그놈들이 광서에서 이 대인을 죽이려는 계획이 실패했으니, 여여해는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여해가 반란을 일으키는 걸 반드시 막아야 한다.”
“설령 죽음의 신이 의부의 목숨을 앗아간다고 해도, 저는 지옥에 가서라도 의부를 살려내겠습니다.”
영설 공주가 가느다랗고 고운 손을 내밀었다.
“나도 너와 한마음이다. 힘을 합쳐서 반드시 이 대인을 이 위험에서 구해내야 한다.”
두변이 흠칫 놀랐다가 영설 공주의 손을 맞잡았다.
“좋습니다. 힘을 합쳐서 꼭 의부를 구하겠습니다.”
잠시 뒤, 영설 공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이 일은 이 대인만을 구하는 일이 아니다. 나를 구하는 것이기도 하지.”
두변이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영설 공주가 이어서 말했다.
“여여해를 물러나게 할 조건에는 이 대인을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나도 포함되어 있다.”
두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여여해가 폐하께 공주 전하의 혼례를 청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여여해의 아들인 여담과의 혼례를요?”
영설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변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다시 물었다.
“하지만 여담은 옥진 군주와의 혼례를 원하던 거 아니었습니까?”
“나와 혼례를 올려야만 제국의 체면을 떨어트릴 수 있으니까.”
맞는 말이었다. 여씨 가문이 옥진 군주 대신 황제의 딸과 혼례를 올려야 더욱 제국의 콧대를 꺾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영설 공주가 병마를 이끌게 되었으니, 그녀와 혼례를 올린다는 건 황제의 팔을 떼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두변은 분통이 터졌다.
물론 그는 혈관음에 대한 연정이 있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영설 공주도 무척 중요한 인물이었다. 영설 공주와 혼례를 올리는 건 그가 이 세계에서 꼭 해내야만 하는 사명이었다. 남녀 간의 정을 논하지 않더라도 절대로 영설 공주를 파렴치한 여씨 가문에게 넘길 수 없었다.
이때, 두변이 뜬금없이 물었다.
“공주 전하. 혹시 마음에 둔 사내가 있으신지요?”
같은 시각, 여씨 토사부 성화산 정상 제단.
제단 주위에는 성화(聖火)가 그려진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서남 토사가 신봉하는 게 성화교(聖火敎)였다. 심지어 성화교의 권력은 일부 토사의 세속적인 권력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제단 광장은 인산인해였고 서남 토사 연맹의 토사 수십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몇백 명의 사제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면서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제단 주위에 귀풍(鬼風)이라도 부는 듯, 제단에 피워진 성화가 쉴 새 없이 일렁였다. 광장 다른 곳은 분명 달빛에 어슴푸레한데, 유독 제단 위는 핏빛처럼 새빨갛게 타올랐다.
제단 위에 기름이 부어진 장작이 높이 쌓여 있었고, 여천천의 시신이 그 위에 놓여 있었다. 여천천은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그 미모는 꼭 살아 있을 때처럼 아름다웠다.
여천천은 성화를 닮은 화려한 붉은 옷을 입고 있어서, 흡사 마녀와도 같았다.
“성시(聖時)가 되었소!”
대사제가 큰소리로 외쳤다.
광기 가득한 춤을 추던 몇백 명의 사제들이 일제히 멈춰 서서 큰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토사와 수백 명의 거물들이 숨을 죽인 채 제단을 응시했다.
여씨 토사이자, 제국 서남부의 토후이며, 무공 절대 고수인 여여해가 용 모양으로 조각된 횃불을 들고 외쳤다.
“신성하신 화신(火神)께 비나이다. 부디 제 딸을 제물로 받아주십시오!”
곧이어 여여해가 횃불을 제단 위로 던졌다.
기름을 먹은 장작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커다란 불길이 여천천의 시신을 천천히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