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장. 의부를 구하라
염주부, 혈관음 저택 안.
“공주 전하, 혹시 마음에 둔 사내가 있으신지요?”
두변의 질문에 영설 공주는 놀라고 말았다.
제국의 가장 존귀한 공주로서 이런 질문은 몹시 무례했다.
하지만 영설 공주는 품행과 덕목이 바른 사람인지라,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려 들지 않았다. 게다가 두변은 자신의 사제이기도 하고, 이문회의 의자이기도 하니, 동생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덕분에 영설 공주는 두변의 질문이 황당하긴 하지만, 무례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없다. 다만, 내가 열두세 살 때 잠시 동경하던 사람이 있긴 했지.”
그러더니 영설 공주가 이내 손을 내저었다.
“됐다. 어린애는 그런 질문 하는 거 아니다.”
두변은 올해 열여덟이었다. 영설 공주가 그와 몇 살 차이 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두변이 마냥 어린아이인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다. 아직 저쪽에서 무슨 조치를 하기 전에 이 공공을 데리고 경성으로 가야 한다. 나머지 일은 다 네게 맡기마. 꼭 기억해라. 여여해가 반란을 일으키는 걸 막아야만 이 공공을 살릴 수 있다. 네가 수많은 기적을 만들어 냈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도 널 믿어도 되겠느냐?”
두변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영설 공주가 대답했다.
일각 후.
영설 공주가 수백 명 기마병을 이끌고 이문회를 경성으로 ‘압송’하기 시작했다.
이문회는 쇠사슬을 두른 채로 함거 앞에 멈춰 섰다.
영설 공주는 이문회를 함거에 태우기 싫었지만, 이문회가 기어이 원칙을 지키겠다며 함거에 타겠다고 했다.
두변이 이문회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 머리를 살짝 기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다짐했다.
‘의부, 제가 꼭 의부를 살려내겠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꼭 구해드리겠습니다.’
이문회는 두변의 모습을 뇌리에 깊이 기억하려는 듯이 자상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두변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종정, 무천추.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게 된다면, 두변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해도 되겠느냐?”
이문회가 시선을 거두고 물었다.
“주인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종정과 무천추 등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참으면서 울먹였다.
“가시지요.”
이문회가 영설 공주를 향해 말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함거에 몸을 실었다.
영설 공주의 수백 기마병들이 이문회를 중앙에 두고 방어진을 친 채 빠르게 경성으로 향했다.
“소주인, 어떻게 해야 주인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동창 형제들은 목숨을 던져서라도 소주인의 명령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만약 주인이 아니었다면, 저는 벌써 감옥에서 처참하게 죽었을 겁니다.”
염주 동창 천호 무천추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말했다.
“의부는 내가 꼭 구해낼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구해야 할지 생각해야 하니, 생각이 끝나는 대로 명령을 내리겠다.”
두변이 말했다.
두변은 홀로 안채로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꿈속 세계에서 계시가 있기를 바라면서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역시, 꿈속 세계에 들어가자마자 기이한 불빛이 나타났다.
- 신규 임무: 이문회를 구하라.
- 임무 목표: 두변은 여여해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혼자서 막아야 한다.
- 임무 포상 1 : 이문회 구하기 성공.
- 임무 포상 2 : 영설 공주 호감도가 15포인트 증가해 40포인트에 달성한다.
- 임무 포상 3 : 두변의 현기 수준이 7품에 달하게 되며, 7품 무사로 진급한다.
- 임무 포상 4 : 두변이 졸업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하게 될 확률이 70%가 된다.
두변은 놀라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번 임무는 지난번 3대 학부 대회 때의 포상보다 훨씬 풍성했다.
포상 중, 이문회를 성공적으로 구해내는 건 두말할 것 없이 가장 중요한 포상이었다.
영설 공주의 호감도가 15포인트나 증가하는 것도 좋았다. 영설 공주와 혼례를 올리는 것이 이 세계에서 두변이 꼭 해내야만 하는 목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번에 현기 수준이 7품에 달하게 되는 것도 놀라웠다.
아무리 꿈속 세계에서 수련한다고 해도, 절대로 한 번에 7품 현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임무를 완수하면 곧바로 7품 무사로 진급하게 된다니, 두변은 좋아서 펄쩍 뛸 지경이었다.
그런데 왜 나 혼자서 반란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거지?
기이한 불빛이 물었다.
- 임무를 받아들이겠는가?
두변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예, 받아들이겠습니다.”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 두변은 ‘이문회를 구하라’ 임무를 받아들였다.
- 임무 실패 처벌 : 이문회 사망. 두변 높은 확률로 사망.
두변이 경악하면서 물었다.
“왜 높은 확률로 사망한다는 겁니까?”
기이한 불빛이 담담하게 말했다.
- 임무를 실패하게 되면, 내가 널 죽이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널 죽일 것이다. 그러니 높은 확률로 사망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두변이 미간을 찌푸렸다.
- 임무 제한 시간 120시간.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곧이어 두변의 머릿속에 초 단위로 빠르게 흘러가는 타이머가 나타났다.
120시간!
120시간이 1초, 1초 줄어드는 것이 보이니 한없이 긴박감이 돌 수밖에 없었다.
120시간은 꿈속 세계가 정한 시간이 아니라, 여여해가 실제로 반란을 일으키기까지의 시간이었다.
여여해는 군대 정비가 끝나기만 하면, 곧바로 병사들을 이끌고 북상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황제는 이문회를 죽일 수밖에 없다.
여여해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가 변방 지역을 뚫고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적수는 사륭 토사의 사륭석이었다.
사륭 토사부는 원시적이고 강력한 힘을 지닌 토사였다. 여씨 토사부가 아직도 서남 토사 연맹을 평정하지 못한 것도 사륭 토사부 때문인 만큼, 사륭석은 여여해의 눈엣가시였다.
사륭 토사의 세력이 여씨 토사보다 훨씬 작지만, 사륭 토사인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든 무기를 쥐고 전장에 뛰어들 정도로 호전적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이 깊은 산속이나 동굴 속에서 살고 있는지라, 사륭 토사 전체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서남 지역의 다른 토사에게는 성화교라는 도구가 통하겠지만, 하필 사륭 토사부에는 자체 신앙인 독사신(毒蛇神)이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사륭 토사가 걸림돌이자 눈엣가시여도 어찌하지 못하고 견제만 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 시국에 사륭 토사 사륭석이 먼저 군대를 일으켜서 여씨 토사부를 공격한다면, 여여해는 당장 반란을 일으키기 어려울 것이다.
얼마 전, 이문회가 사륭 토사에게 오십만 냥 은자를 주면서 여씨 토사의 영지를 침범하라고 사람을 보내서 부탁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문회의 명령을 받고 떠났던 이륜이 깜깜무소식이었다.
사륭 토사부가 무척 빈곤하다 보니, 오십만 냥 은자라도 군대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사륭 토사부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는 건, 분명 무슨 변고가 생겼다는 뜻이리라.
두변의 유일한 돌파구는 사륭 토사부였다.
두변은 조금 전 기이한 불빛이 말했던 조건들을 떠올리며 이번 임무에 대한 공략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꿈속에서 깨어난 두변은 옷을 갈아입고 깔끔하고 몸을 단장했다.
“서둘러야 한다. 안남 왕국까지 나를 호위해줘.”
두변이 종정과 무천추, 이삼, 이사 등에게 말했다.
두 눈이 벌겋게 된 종정과 무천추는 두변의 말에 기뻐하면서 물었다.
“소주인께서 벌써 주인을 구해내실 방법을 찾으신 겁니까?”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부터 일각의 시간도 지체해선 안 되니, 서둘러 움직여야 한다.”
“알겠습니다.”
무천추와 종정 등이 대답했다.
불과 일각 뒤, 백여 명의 동창 고수가 두변을 호위하면서 염주부를 떠나 안남 왕국으로 향했다.
두변이 탄 말은 여천천과 경마 시합을 할 때 탔던 그 야생마였다. 야생마는 밤하늘 아래서 바람을 맞으며 질주했다.
사륭 토사부의 위치는 현대 지구의 중국 운남, 베트남, 미얀마가 교차하는 골든 트라이앵글에 위치해 있다.
현재 지구이든 이 세계이든, 물자가 풍부하면서 경계 지역에 걸쳐진 만큼 혼란스럽고 위험한 지역이라 할 만했다.
두변은 여씨 토사부 영역을 지나지 않기 위해서 안남 왕국까지 돌아서 갔고, 총 거리는 이천삼백 리에 달했다. 물리적인 거리가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촌각을 다투며 말에 박차를 가해야만 했다.
잠도 자지 않고 쉬지도 않고 사륭 토사부까지 달려 간다고 해도, 길 위에서 최소 50시간 이상을 보내야 했다.
백여 명의 동창 무사가 한꺼번에 움직이다 보니, 광서 문무 집단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하지만 동창 무사가 향하는 곳이 안남 왕국이라는 것을 알자, 문무 집단은 동창이 진남공 송결에게 지원요청을 하러 간다고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
진남공 송결이 대단한 인물이긴 하지만, 이문회를 구할 수 있을 정도의 위인은 아니었다. 황제조차도 지켜줄 수 없는 목숨을 송결이라고 지킬 수 있을까.
열 몇 시간 뒤, 두변은 수백 명 동창 무사의 호위를 받으며 안남 왕국에 진입했다.
21시간 뒤, 두변은 저홍면 노장군의 낭군 구역에 도착했다. 이미 안남 왕국 안쪽으로 육백 리 깊숙이 들어온 상태였다.
“여기는 이제 안전하다. 여기부터는 나를 쫓는 자들이 없을 테니, 너희는 그만 돌아가라.”
두변의 말에 무천추와 종정 등이 말했다.
“소주인, 어딜 가시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너희를 데리고 움직이는 건 너무 느려. 내가 혼자서 움직인다면, 정신 기마술을 써서 훨씬 빨리 도착해. 그리고 이번 일은 꼭 나 혼자서 처리해야 한다.”
두변도 당연히 이삼과 이사를 데리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꿈속 세계의 기이한 불빛이 이번 임무는 꼭 혼자서 해내야 한다고 조건을 달았다.
왜 혼자서 해야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꿈속 세계가 괜히 그런 조건을 단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주인, 정말로 저희도 따라가면 안 되는 겁니까?”
이삼과 이사가 물었다.
두변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서 작별하자.”
이삼과 이사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명, 따르겠습니다. 대신 적어도 어딜 가는지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여기서 사흘 동안 기다리다가, 소주인께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저희가 찾으러 가겠습니다.”
“사륭 토사부로 갈 것이다. 만약 내가 이레가 지나도 소식이 없다면, 나를 찾으러 와라.”
이삼, 이사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두변은 이곳에서 동창 무사들과 헤어졌다. 그리고 혼자서 야생마를 타고 사륭 토사부가 있는 서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두변은 자신이 이 야생마를 탄 게 매우 다행스럽다고 생각했다. 야생마의 최고 속도가 한혈보마, 혹은 천리마만큼 빠르진 못해도, 체력과 지구력이 엄청났다. 지구상의 흔한 야생마와 달리, 아무리 달려도 지칠 줄을 모르는 기계와 같다고나 할까.
매일 24시간 중 두변은 최대 5시간만 휴식을 취하고, 나머지 19시간은 야생마와 함께 쉬지 않고 질주하고, 달리는 내내 빠른 속도를 유지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야생마는 가파른 숲길을 달리든, 장애물이 많은 협곡을 달리든, 늘 평지를 달리는 것처럼 빠르고 잽싸게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염주부에서 출발한 시점부터 벌써 59시간이 지났다.
두변은 염주부에서 출발한 뒤로 매일 5시간 이상의 휴식을 취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시간은 계속 말 등에 업혀 있었다.
닷새가 되지도 않은 시간 만에 두변의 체중이 십 근 이상 줄었다.
드디어, 두변은 목적지인 사륭 토사부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