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장. 대사의 열멸
하지만 문무 대신들은 이렇게 검소하고 영명한 황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창하게 연회를 열고, 그 틈을 타서 여기저기서 뒷주머니를 채울 기회를 주는 황제를 좋아했다.
황제의 가노(家奴)인 엄당이 황제의 지천명 만수절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전국의 환관 학원 중 절반이 광서 엄당과 함께 졸업 시험을 앞당겼다.
그리고 광서 환관 학원과 똑같이 만수절 3일 동안 가산점을 얻을 수 있는 추가 대회를 열었다.
원래대로라면, 경성의 문무백관도 황제의 지천명 만수절을 축하하기 위해 뭐라도 했겠지만, 이문회와 여여해의 일 때문에 만수절을 챙길 겨를이 없어졌다. 조정의 대신들과 국자감 학생들이 궁문 앞에서 농성하고 있었고, 이 사태에 대한 황제의 묵묵부답을 질타하는 상주서가 황궁으로 쏟아졌다. 그러니 이런 와중에 황제의 만수절을 축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들이 황족에 성의를 표할 기회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내년이 바로 황태후의 예순아홉 번째 생신이기 때문에, 문무백관은 그때 황태후의 은덕을 감사하기 위한 추가 회시(會試)를 열 계획이었다.
퇴직한 노환관 다섯 명이 광서 환관 학원에 도착했다. 이들은 동창, 사례감, 어마감의 대환관 출신으로, 이번 광서 환관 학원의 졸업 시험을 감독하고 평가할 심사관들이었다.
이 다섯 명은 모두 3품 이상의 고급 관리직에서 퇴직한 이들로, 관록이 상당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다들 나이가 있다 보니, 재물 같은 것보다는 자신의 명성을 훨씬 더 중요시하는 사람들이었고, 그 덕에 졸업 시험은 생각보다 공평하게 치러질 것이다.
광서 환관 학원의 새로운 산장인 왕굉과 부산장 낭정이 다섯 노환관을 맞이했다.
“만수절의 첫날에는 무도 대회를 열 것이고, 이튿날에는 시문 대회, 그리고 셋째 날엔 화단 대회를 열 예정입니다.”
화단이란 연단을 통해 만드는 불꽃놀이로, 환관 학원은 만수절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어서 화단 대회를 추가했다.
“대회마다 1등에겐 10점, 2등에겐 5점, 3등에겐 3점의 가산점을 줄 것입니다.”
왕굉이 상세히 설명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르신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견이 없으신지요?”
다섯 명의 노환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추가 시험을 치르는 건 광서 환관 학원만의 특혜가 아니었으니, 다들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이때, 한 노환관이 물었다.
“두변이라는 아이는 어디 갔느냐?”
이 노환관의 이름은 어만루로, 동창 출신에 이연정보다도 몇 살 더 많았고, 동창 제독 직에서 퇴직한 자였다.
왕굉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어르신께 아룁니다. 두변 학생은 휴가계를 쓴지라 지금 학원에 없습니다. 그 휴가계는 이문회가 특별히 내준 것이고요.”
어만루가 곁눈질로 왕굉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졸업 시험을 앞당긴다는 소식은 두변에게 알렸느냐?”
왕굉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예, 통지했습니다.”
어만루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두변에게는 50점의 가산점이 있었는데, 그렇게 마음대로 없애버리는 게 어딨나.”
왕굉이 난색을 표하면서 대답했다.
“어르신, 그런 가산점은 선례가 없었습니다. 만수절에 진행되는 추가 시험은 몇십 년 동안 해온 것이고, 광서 학원만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데 3대 학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해서 50점을 턱하고 내주는 건 조금 학칙에 어긋난 게 아닌가 싶어서요.”
어만루가 냉소를 지으면서 대꾸했다.
“쯧쯧쯧. 내가 자네들이 무슨 꿍꿍이인지를 모를까 봐?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보아라. 그렇게 제멋대로 하다가 엄당이 망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겠지.”
왕굉이 허리를 숙이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어르신, 진정하십시오. 제가 일부러 두변을 억압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선례가 한 번도 없었잖습니까. 게다가 가산점이 몇 점도 아니고, 무려 50점이나 되는 건 다른 학생들에게 너무 불공평한 처우입니다. 그리고 이번 만수절에 진행될 추가 시험 중, 두변의 장기인 시문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어만루가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왕굉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어만루는 이문회가 특별히 초청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문회가 환관 학원 학생일 때 산장 직을 맡고 있었고, 이문회를 무척이나 아꼈다. 그리고 이문회가 이연정의 의자가 된 것도 어만루의 추천 덕분이었다.
엄당의 몇몇 어르신 중, 이문회를 지지하는 가장 큰 세력이자 힘이 바로 어만루였다.
어만루가 왕굉에게서 시선을 떼고 말했다.
“지나간 일은 차치하고, 내가 분명히 말할 게 하나 있다.”
어만루가 손끝으로 탁자를 톡톡 치면서 말을 이었다.
“이번 졸업 시험에서 수작을 부리는 놈이 있거나 불공정한 사건이 발생한다면, 내가 싹 다 엎어버릴 것이야.”
왕굉이 서둘러 손사래 치면서 말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저희가 감히요.”
왕굉은 겉으로는 무척 공손한 태도지만, 사실 속으로는 하찮을 뿐이었다.
두변은 환관 학원에서 만년 꼴찌였었다. 영종오 대종사의 제자로 다섯 달을 보냈다고 해도, 그가 얼마나 성장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두변이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한 과목이라도 제대로 배웠으려나 싶은 마음에 굳이 그를 일부러 억압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졸업 시험이 두 달 반이나 앞당겨졌는데, 두변이 지금 이문회를 위한다고 사방팔방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두변이 졸업 시험에 참여한다고 해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두변의 시문 능력이 천부적이라고 해도 뭐가 다를까. 두변 그놈은 완전 초급 검술조차 할 줄 모르는데. 여천천이 벼락에 맞아서 죽은 게 아니었다면, 그놈은 벌써 여천천의 손에 갈기갈기 찢겼겠지.’
왕굉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생각했다.
환관 학원의 졸업 시험은 국학과 무도, 그리고 연단학이 가장 중요하지만, 두변은 절반의 과목도 못 배웠으니 졸업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기적이었다.
게다가 두변은 염세와 내기를 했었다. 두 사람 중 졸업 시험에서 더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는 잡역 환관이 되는 내기 말이다.
애초부터 두변이 당엄에게 비빌 상대가 아니니, 굳이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하도록 방해하거나 짓누를 필요조차 없었다.
“어르신들께서 이견이 없으시다면, 저희는 말씀드린 대로 며칠 뒤에 시작될 만수절 추가 시험과 정식 졸업 시험을 준비하겠습니다.”
왕굉이 가식적인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어만루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졸업 시험은 엄당의 인재를 뽑는 중요한 시험이고, 제국을 위해 헌신할 충신을 키워내는 중요한 과정이다. 엄당의 근간을 잊지 말고, 바깥세상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절대로 졸업 시험에 영향이 가선 안 된다.”
왕굉이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다섯 시험관의 동의를 얻은 뒤, 광서 엄당 전체가 전력을 다해 만수절과 졸업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염주부, 혈관음 저택 안.
두변은 여전히 꿈속 세계에서 기이한 불빛과 대화하고 있었다.
- 네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 번째는 즉시 환관 학원으로 돌아가서 사흘 동안 진행되는 만수절 추가 시험에 참여하는 것이다.
두변은 만수절 추가 시험이 10년에 딱 한 번 돌아오는 소중한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문회는 허례허식을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고, 만수절을 맞아 흥청거릴 생각도 없는지라 일찍이 산장 자리를 내려놓고 더 중요한 일을 하러 학원을 떠났다.
여우 같은 왕굉은 황제에게 아첨 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산장 자리에 앉자마자 만수절에 추가 시험을 치르고, 졸업 시험을 앞당긴다고 공표한 것이다.
기이한 불빛이 이어서 말했다.
- 만수절 추가 시험은 한 시험당 최고득점 10점이고, 총 30점을 얻을 수 있다.
두변이 물었다.
“제가 만약 추가 시험에 참여한다면, 몇 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기이한 불빛이 곧바로 대답했다.
- 10점에서 20점이 전부다. 네 정신력이 부족한 탓에 당엄을 이기지 못할 것이야. 네가 유일하게 승산이 있는 건 이튿날 진행될 시문 대회뿐이다.
두변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물었다.
“그럼 두 번째 선택지는 무엇입니까?”
기이한 불빛이 대답했다.
- 임무 하나를 완수하는 것이다.
“무슨 임무요?”
- 정신 대사(大師)의 열멸(涅滅)이다.
“제 정신력을 강화하는 임무입니까?”
- 그렇다.
무도인에게 있어서 정신력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고, 정신력은 무도인의 최고 한계를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다.
하지만 두변의 정신력은 고작 40포인트밖에 안 되니, 그의 최고 수양이 7품 무사밖에 안 되는 것이다.
정신력이 부족하다면, 더 많은 내력과 현기를 다룰 수 없다.
두변이 궁술, 연단 등 과목에서 만점을 얻을 수 없는 이유 또한 그의 정신력 부족 때문이었다.
고작 40포인트의 정신력 가지고는 당엄의 발치에도 닿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정신력을 향상하지 못한다면, 그가 졸업 시험에서 1등 할 가능성도 매우 희박해진다.
두변이 말했다.
“저번 3대 학부 대회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냈을 때, 제 정신력이 10포인트 증가했습니다. 그건 댁들이 제 정신력을 충분히 향상시킬 수 있다는 뜻인데, 왜 또 이 긴박한 시기에 추가 임무를 해야만 정신력 포인트를 얻을 수 있는 겁니까?”
기이한 불빛이 보기 드물게 썰렁한 농담을 했다.
- 너 개고생시키려고.
두변이 지금 뭐 하자는 거냐는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뜨고 기이한 불빛을 노려보았다.
기이한 불빛이 두변의 시선을 피하면서 이어서 말했다.
- 큼큼, 지난번에 정신력이 10포인트가 증가한 것은 내 조종 하에 네 두 영혼이 하나로 결합하게 되면서 증가한 것이다. 그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그 기회가 또 올 땐, 네 영혼이 죽어버려서 또 다른 새로운 숙주가 네 몸을 쟁탈할 때이겠지. 그렇게 세 영혼이 하나로 합쳐지면, 정신력이 10포인트 증가할 수도 있겠지.
두변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침을 뱉었다.
“퉤퉤퉤! 그런 불길한 소리 좀 태연하게 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정신 대사 열멸이라는 임무는 뭡니까?”
- 아주 아주 강력한 국보급 고승(高僧) 한 명이 열반에 달할 것이다. 그가 임종 전에 자신의 기억 중 일부와 정신력을 이전할 것이야. 일종의 계승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그럼 그 고승의 정신력이 내 뇌에 들어와서 내 의지에 영향을 줄 가능성은요?”
- 그럴 가능성은 없다. 기억과 정신력의 계승은 8할이 송과선에서 이뤄지고, 나머지 2할만 네 대뇌에 남는다. 두변은 영종오 대종사가 자신의 이마에 손가락을 댔을 뿐인데 엄청난 정신력이 송과선에 작용하여 정신력 각성 상태를 일시적으로 느꼈던 적이 있던 터라, 기이한 불빛이 말하는 게 그런 원리가 아닐까 추측했다.
두변이 물었다.
“이번 임무로 정신력이 얼마나 증가합니까?”
- 보통 사람이라면 5포인트 증가하고, 넌 15포인트 증가할 수 있다.
두변이 경악했다.
‘국보급 정신 대사라면서, 고작 5포인트 증가하는 게 다라고? 짜도 너무 짠 거 아니야? 그래서 영종오 대종사께서 늘 강조하셨구나. 정신력은 천부적인 것이지, 후천적으로 정신력을 개조하거나 증진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정신 대사가 열반에 오르면서 정신력 계승을 하는 일은 수십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두변이 다른 사람과 달리 정신력이 15포인트씩이나 증가할 수 있는 건 꿈속 세계 덕분에 두변이 정신 대사의 정신력을 남김없이 빨아들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 만수절 추가 시험에 참가할 것이냐, 아니면 정신 대사의 열멸 임무를 받아들이겠느냐?
두변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임무를 받아들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