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장. 네 놈의 머리통
여여룡에게 정예병을 내어주고 남하하라고만 한 이유는 사륭과의 전투에서는 그 어떤 전술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륭 부족과의 전투는 전면 충돌이 최선이고, 이는 맹장 여여룡이 가장 잘하는 전술이었다.
그리고 북상할 나머지 부대를 이끄는 자는 유연한 정치적 수완이 있고, 최적의 시기를 노릴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는지라, 여여해가 남아야만 했다.
둘째 동생 여여룡이 명령을 듣더니, 망설이면서 “주상?” 하고 되물었다.
여씨 토사 직속 부대는 총 오만에서 육만 정예병으로 이뤄져 있다. 여여해가 여씨와 사륭 토사부의 경계 지역에 이미 일만 주둔병을 남겨두었고, 여기서 여여룡이 삼만 명의 정예병까지 끌고 홍하성으로 향한다면, 여여해에게는 일만 명의 여씨 정예병과 사만 명의 토사 연합군만 남게 된다.
여여해가 여여룡의 표정을 읽고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아라. 여기 북풍관만 뚫고 나면 고전을 치를 만한 곳이 없을 거다. 운남, 광서에 있는 몇만 대군은 황제에게 이문회를 죽이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으니,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맹우에 가깝다.”
“예,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여여룡이 말했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라. 홍하성 근처에 도착하는 대로 짧게 재정비를 한 뒤 바로 전투를 시작해라. 명심하거라. 사륭 놈을 한 놈도 빠짐없이 죽여야 한다.”
여여해가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잠시 뒤, 사실상 팔만여 명 병사로 이뤄진 ‘십만 대군’이 두 군대로 나뉘었다.
여여룡이 여씨 토사 소속 기마병 오천 명과 보병 이만오천 명을 이끌고 빠르게 홍하성으로 달려갔다.
여여해의 곁에는 오만 병사만 남았다.
그중 만 명은 여씨 정예병이었지만, 나머지 사만 명은 토사 연합군이었다.
“정렬하라!”
오만 대군이 다시 한 번 진열을 정리했다.
여여해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성벽 위를 노려보았다.
‘사륭 부족이 내 후방을 급습했다 한들, 달라질 건 없다. 예전이었다면 내가 군대를 이끌고 부리나케 돌아갔겠지만, 지금의 내겐 성화 마녀가 있다. 성화 마녀 덕에 서남 토사 전체가 병사들을 내어줬고, 그 덕에 팔만 대군이 만들어졌다. 삼만 대군이 없어도, 내겐 오만 대군이 있다. 오만 대군이라면, 썩어빠진 대녕 제국의 황제를 협박하기에 충분하다.
저홍엽, 네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바람 한 번 불면 날아갈 사천 명 병사들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가끔 지나친 용감함은 무식함이라고도 하지.
퇴각하라고? 내가 여태 쌓아 온 공을 수포로 만들라고? 이문회를 구하고 싶다고?’
여여해가 콧방귀를 뀌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 깨라, 이 자식들아!’
여여해가 대검을 뽑아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성 안에 숨이 붙어 있는 모든 것들을 죽여라. 가장 먼저 성벽을 넘은 자에겐 삼천 냥의 포상을 줄 것이고, 머리 하나 당 오십 냥 은자를 포상하겠다.”
돈 앞에 장사가 없다 했다. 여여해가 외친 액수는 단순히 포상 수준이 아니라 벼락부자가 될 수 있는 액수였다.
“성을 공격하라!”
여여해가 대검을 휘두르면서 명령했다.
슉, 슉, 슉, 슉.
궁수부대가 활시위를 놓자, 북풍관 성벽 위로 화살비가 쏟아졌다.
수백 구의 투석차에서도 커다란 돌덩이를 미친 듯이 발사했다.
북풍관을 사이에 둔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백 리 밖, 이문회의 심복 이위가 동창 무사 이천 명을 이끌고 저홍엽 장군을 지원하기 위해 북풍관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위는 경성에서 돌아오자마자 여여해가 십만 대군을 이끌고 북상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터라, 쉴 시간도 없이 곧바로 계림부 근처의 모든 동창 무사를 모아서 북풍관을 향해 질주했다. 몇백 리 길을 달려온 이위와 동창 무사들은 마침내 다행히도 시간에 맞춰서 북풍관에 도착할 듯했다.
이위는 북풍관의 함락을 막고 저홍엽 장군을 살려내는 게 이문회를 살리는 것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삼백 리 밖.
말을 타고 북풍관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사람은 대종사 영종오.
그는 얼마 전까지 너무 심한 부상 때문에 땅굴 속에서 자가 치료를 하고 있었지만, 두변의 학습 진도가 걱정된 나머지 조금 회복이 되자마자 땅굴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그는 두변이 염주부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는 동시에 여씨 토사가 십만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영종오 대종사는 부아가 치밀어올라서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가 입으로야 대녕 제국이 금방이라도 망할 것처럼 말하고 다니던 사람이긴 하지만, 애국심 하나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무공이 이제야 절반 회복되었다는 것도 망각한 채 보검을 집어 들고 곧장 북풍관을 향해 달렸다.
‘여여해, 네놈이 감히 반역을 일으키다니. 이 영종오가 친히 나서서 네놈의 목을 따주마.
이문회를 위해, 폐하를 위해, 대녕 제국을 위해, 내가 네놈의 십만 대군 속에서 네놈을 찾아내 죽이겠다.’
감수성이 풍부한 이 노년의 대종사는 일찍이 대녕 제국에 실망하여 속세를 떠나 살고 있었다.
하지만 여여해가 반역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피가 거꾸로 솟는 사람도, 곧장 보검을 들고 전장으로 뛰쳐나가는 사람도 영종오 대종사였다.
그는 평생 자유를 갈망했지만, 어쩌면 이번 생에는 유유자적하게 살 수 없는 게 그의 운명이 아닐까 싶었다.
말등 위에서 바짝 엎드린 채 질주하는 영종오는 마음이 벌써 몇백 리 밖에 가 있었다.
“여여해, 내가 네놈의 머리통을 가지러 가니 기다려라!”
한편, 두변은 열한 시진 전부터 야생마를 타고 전변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대녕 제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고, 대녕 제국의 앞날은 이제 하늘에 맡기기로 했다.
이어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졸업 시험에서 1등을 거머쥐는 것이었다.
그는 졸업 시험 때 무조건 당엄보다 높은 점수를 얻어서 1등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그가 이 세계에서 이룬 모든 게 수포가 되고, 이 세계에서 더 살아갈 수 있는 자격조차 모두 잃게 된다.
두변은 하루에 네다섯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길 위에 쏟으면서 앞만 보고 달렸다.
두변은 가는 길에 여러 차례 검문을 당했다.
대녕 제국의 병사들과 안남 왕국의 병사들에게 검문을 당했지만, 영패(令牌) 세 개를 가진 두변은 막힘없이 검문을 통과했다. 그는 대녕 제국 동창 영패, 진남공부 영패, 그리고 영설 공주의 영패를 가지고 있었다.
두변이 병사들에게 영패를 보여줄 때마다 병사들이 술과 먹을 것을 그에게 선물했고, 심지어 값비싼 소고기를 주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두변에게 이백 리마다 준마를 제공해주겠다고도 제안했다.
그중에서도 안남 왕국의 병사들이 유독 친절하게 두변을 대했다.
진남공이 안남 왕국을 지원하기 전까지, 안남 왕국의 군대는 반란군에게 패배하여 끝도 없이 밀려나고 있었다. 국왕은 이미 절반의 강산을 반란군에게 내어주었고, 군대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대녕 제국의 지원군 덕분에 안남 왕국 군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으니, 대녕 제국의 친선 지원에 감동했다.
그래서 그런지, 안남 왕국의 병사들은 두변이 몹시 긴박하게 갈 길을 재촉하는 것을 보고 백여 명의 호송단을 붙여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두변의 야생마가 너무 빨리 달리는 탓에 몇십 리를 호송하던 호송단은 하는 수 없이 호송을 포기하고 되돌아가야 했다.
쪽잠을 자면서 미친 듯이 달리던 두변은 꼬박 36시간 만에 이천여 리의 거리를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야생마의 체력이 무궁무진한 건 맞지만, 야생마도 36시간의 강행군에 많이 지쳐있었다.
만약 지구상의 평범한 말이었다면, 아마 오는 길 내내 열댓 마리 말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견사 대사에게는 국적이 없어서 그 누구도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어딜 가든 국빈 대접을 받았고, 몇 년 전 대녕 제국의 경성에 들렀을 땐, 천윤제가 친히 그를 맞이하면서 몇 시진의 대화를 나누었고, 정진(精進) 음식을 같이 먹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 황제의 서재에 서예 작품이 하나 더 걸렸는데, 그 작품이 바로 견사 고승의 작품이었다.
그의 국적처럼, 견사 대사의 무도 능력이 정확히 얼마나 뛰어난지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야말로 진정한 정신 대사이자 불교 대사이므로, 확실한 국보급 인물이었다.
올해 여든아홉이 된 그는 이제 슬슬 열반에 오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견사사는 아주 조용하고 외진 마을에 있었고, 마을 사람들조차 이 늙은 승려가 유명한 견사 대사라는 걸 몰랐다.
견사 대사는 늘 같은 옷을 입고 마을로 내려와 동냥했고, 죽이나 간소한 반찬만 먹었으니, 마을 사람들이 그의 정체를 모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가 묵는 견사사라는 곳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천연 동굴이었다. 하지만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고,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있으면 영수라는 말이 괜히 있는가.
비탈길을 따라 오르던 두변은 드디어 견사사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견사사에 제대로 된 문조차 없을 줄 몰랐다.
“왔으면 들어오게나.”
자상한 목소리가 두변의 뇌리에 울렸다.
정신 대사인 견사 대사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연민과 공허함이 가득했다.
두변이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마음의 안정을 찾고 천천히 산 동굴 안으로 발을 들였다.
견사사 안에 들어섰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동굴 안은 불빛 하나 없이 암흑 그 자체였다.
“제자, 대사의 정신 계승을 받고자 왔습니다.”
두변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굴 안이 갑자기 환해졌고,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도 익숙한 누군가를 발견한 두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 여인이 어떻게 이곳에?’
어떤 이들은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각골명심할 만큼 인상 깊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엉덩이가 너무 완벽하기 때문이다. 특히 잘록한 허리 아래에 풍만한 엉덩이, 그리고 그 아래로 떨어지는 긴 허벅지까지 가진 사람이라면 말이다. 아무리 많은 인파 속에 있다고 해도 그 사람만큼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호르몬이 터질 것 같은 느낌!
그는 옥진 군주가 현대 지구에서 태어났어야 한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옥진 군주처럼 터질 듯이 육감적인 몸매는 무수히 많은 사내를 혼절하게 할 것이고, 그 같은 고자도 없던 게 벌떡 서게 할 테니까.
바로 그때, 견사 대사의 목소리가 두변의 머리에서 울렸다.
“시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두변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자신의 생각을 외쳤다.
“저 여인과 하고 싶습니다!”
동굴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변을 향했다. 그중에는 옥진 군주도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오묘한 인정과 경멸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중 살기가 가득한 시선은 단연 옥진 군주의 시선이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서 해괴망측한 말을 한 사람이 두변이라는 걸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가, 이내 두변을 노려보면서 손등으로 목을 베는 시늉을 했다.
두변이 이를 부득 갈면서 속으로 욕했다.
‘여긴 견사 대사의 정신력이 지배하는 곳이 분명해. 그 멍청한 말을 내 의지로 입 밖으로 꺼냈을 리가 없잖아.’
두변이 힘겹게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굴 안에는 자신을 포함해 열세 명이 있었다.
옥진 군주를 포함한 이 사람들이 바로 두변의 경쟁자이자 견사 대사의 정신력 계승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었다.
정신력 향상은 최고 무도 수양을 더 끌어 올릴 수 있음을 뜻한다.
정신력이 단 5포인트만 향상해도 무도 품계를 한 단계 올릴 수 있으며, 누군가에게는 5포인트를 통해 자신의 극한을 돌파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