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59화 (159/648)

159장. 자비로움의 극치

모든 사람이 원하는 건 오직 정신력 향상이지, 견사 대사의 기억과 정신적 고찰을 누가 신경이나 쓸까.

그건 두변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탈락자 열한 명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고 두변을 둘러쌌다.

옥진 군주가 재빨리 검을 뽑아 들고, 두변과 함께 싸우려고 그를 등지고 섰다.

생사가 걸린 위급한 상황인지라, 두변은 옥진 군주의 엉덩이가 얼마나 탄력적인지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두변이 흠칫 놀라자, 옥진 군주가 곧바로 이를 꽉 깨물고 경고했다.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지껄였다간, 네놈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릴 줄 알아.”

두변으로서는 정말 고의로 그녀의 엉덩이에 닿으려고 한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억울함을 잠시 내려놓고 그녀의 등과 살짝 거리를 둔 뒤 검을 뽑았다.

검을 뽑았을 뿐이지, 두변이 할 줄 아는 검법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죽어라!”

열한 명이 동시에 외치면서 두 사람을 향해 덮쳐왔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휴.”

견사 대사가 짧게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열한 명이 갑자기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이어서 펼쳐진 광경은 두변을 전율케 만들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군요.”

견사 대사가 가슴 위로 손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열한 명의 탈락자들이 갑자기 각자의 칼로 목을 베면서 자살하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선혈이 사방으로 튀고.

“난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대사, 제발 살려주십시오!”

열한 명의 탈락자들이 제 몸을 가누지 못하더니 순차적으로 자신의 칼로 목을 베었다.

동굴 안이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었고, 열한 구의 시신이 피바다에 널브러져 있었다.

두변과 옥진 군주는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견사 대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줄곧 익살스럽고 부드럽고 지혜로운 모습만 보여왔다.

수십 년 동안 견사 대사는 세상을 비탄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겼으며,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조차 마음 아파서 죽이지 못하는 자애로운 고승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자애롭던 사람이 열한 명의 생명을 죽였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손가락 하나 까닥이지 않고.

견사 대사가 천천히 말했다.

“한 사람이 선하고 자비로움의 극치를 보이면서, 개미 한 마리조차 죽이지 않는 이유가 뭐 때문인 줄 아는가요?”

두변이 대답했다.

“그 사람의 눈에는 모든 생명이 동등하고, 개미와 사람의 목숨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런 사람에겐 사람을 죽이는 게 개미 한 마리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지요.”

견사 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자비의 끝은 결국 무정이지요. 그렇게 안 봤는데, 지혜로운 구석이 있긴 하군요.”

견사 대사가 두변과 옥진 군주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내 정신을 물려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북풍관.

여여해가 엄청난 포상을 선언하자, 오만 명의 토사 연합군 병사들이 거의 눈이 뒤집혀서는 성벽을 공격했다.

저홍엽이 이끄는 낭군도 용감하기 그지없었지만, 사람이 너무 적었고 전장에 나서기엔 너무 노약했다.

공격이 시작된 지 한 시진 만에 저홍엽과 그녀의 병사들이 고전을 치르기 시작했다.

낡은 성벽은 폭풍 속의 오두막처럼 여여해의 미친 듯한 공격을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지만, 언제든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데도 전투가 계속되는 이유는 안륭 토사부 낭군의 정말 끈질긴 의지 때문이었다. 다들 상처투성이인 데다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곧 죽어도 자신들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이들은 1초도 더는 못 버티고 무너질 것만 같은 모습으로 끈질기게 반 시진을 버텼고,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적군을 무찔렀다.

아무리 죽여도 무너지지 않은 군대였다. 그들은 다들 체력이 극한에 달했음에도 정신력과 의지 하나로 지금껏 버티고 있었다. 그 의지력이 죽을 때까지 그들을 지탱해 줄 것이다.

여여해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공성전은 무릇 용기가 가장 중요하다. 한 번 전고를 울려서 사기를 북돋는다고 해도, 두 번째 울릴 땐 그 기세가 쇠해지고, 세 번째 울릴 땐 그 기세가 고갈되어 버리는 법이다.

이대로 이 전투를 다음 날까지 끌고 가게 되면,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될 수밖에 없으니 날이 어두워지기 전까지 공성전을 끝내야만 했다.

결국 여여해는 어쩔 수 없이 주장(主將)은 절대로 전방에 나서지 않는다는 철칙을 깨기로 했다.

여여해는 직접 최전방에 뛰어들어서 자신의 막강한 무공으로 단번에 저홍엽을 죽이고 이 전투를 끝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저들은 어차피 우두머리가 없으면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방법이다.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주장은 절대 최전선에 뛰어들면 안 되며 직접 검을 뽑아 들고 앞장서는 건 더더욱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적진에 자신을 암살할 수 있는 무공 고수가 숨어있을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주장의 막강한 무공은 오직 자신의 목숨을 보호할 때만 써야 한다.

진남공 송결을 떠올려 보자. 그날 규일의 자객단이 그를 급습했을 때, 송결이 죽지 않은 데다 규일의 자객단을 물러가게 할 수 있던 이유도 그가 이 철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만약 송결이 전장에서 자신의 절대 무공만 믿고 직접 최전선에 뛰어들었다면, 그의 현기 내력이 다 닳을 때쯤 규일이 갑자기 나타나서 그의 목숨을 앗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여해가 최전방에 뛰어들려고 결심한 건, 북풍관에 무공 고수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영종오 대종사가 극심한 부상을 입은 터라 절대로 이곳에 나타날 리 없고, 나타난다고 한들 자신을 공격할 수 없다고 믿었다. 지금 영종오의 상태로 자신을 공격한다는 건 영종오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여여해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현기 내력을 끌어모아서 발끝으로 힘차게 땅을 디뎠다.

스윽!

여여해는 지구의 중력을 완전히 무시하고 수십 미터에 달하는 성벽을 몇 걸음 만에 올랐다.

이게 바로 종사급 무공의 위력이었다.

여여해는 야심이 가득한 일대 영웅이기도 하지만, 종사급 무공을 가진 절대 강자이기도 했다.

성벽 위에 도착한 여여해는 곧장 저홍엽을 향해 검 끝을 겨눴다.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강기(罡氣)는 마치 땅에 떨어진 폭탄처럼 주위에 있던 낭군들을 모조리 튕겨냈다.

여여해는 종사급 무공자답게 일격 필살을 시전하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여여해는 놀라서 혼비백산했다.

검영(劍影)이 갑자기 어둠을 뚫고 여여해를 향해 그대로 덮쳐왔다.

대종사 영종오,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여여해, 죽어라!”

대종사 영종오가 눈에 불을 켜고 외쳤다. 그의 모든 현기 내력이 응집된 검망(劍芒)이 여여해를 향해 맹렬하게 덮쳐왔다.

지금 여여해가 얼마나 놀랐는지 그 어떤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대종사가 검을 뽑은 이상, 그의 검을 피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여해로서도 대종사의 공격을 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현기 내력이 응집된 대검을 대종사 방향으로 틀었다.

강력한 대종사의 검기와 여여해의 검기가 사납게 충돌했다.

쿠구궁.

일순간 폭탄이 터진 것처럼 굉음이 울리고, 주위의 모든 사람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성벽 위엔 숨 막힐 듯한 정적만이 남았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저홍엽이 가까스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고 피를 토한 뒤, 재빨리 영종오에게 달려갔다.

“대종사!”

영종오는 말 대신 손을 휘휘 저었다.

여여해도 아무 말 없이 영종오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여여해는 영종오가 오늘 이곳에 온다고 해도 절대로 검을 뽑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규일과의 전투에서 폐가 뚫렸으니, 여기서 더 현기를 썼다가는 영종오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은 자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여해의 곁에 검마 이도진이 없을 것이라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영종오라도 결코 그런 위험한 도박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영종오가 북풍관에 나타날 줄이야!

대종사, 죽는 게 두렵지도 않은가? 아니면 노망이라도 난 거요?

여여해가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영종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영종오가 자가 치료을 하긴 했지만, 무공 실력이 절반도 채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그가 종사급 강자인 여여해를 공격했다는 건,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여여해를 죽이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이놈의 대녕 제국은 이미 썩을 대로 썩었건만, 왜 아직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키는 이들이 있는 것일까.

그들은 서로 교류하지도 않고, 그 아무런 서신도 주고받지 않지만, 언제나 같은 곳을 바라본다.

여여해가 대종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려서 성벽 아래로 뛰어내린 뒤, 자신의 군대 진열로 돌아갔다.

일만 정예병을 지휘하는 여여해의 넷째 아우 여여산이 여여해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일단 여여해의 안색이 그대로인 데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안심했다.

여여해가 짧게 명령했다.

“퇴각하라.”

이제 막 안심하던 여여산이 놀란 눈빛으로 여여해를 쳐다보았다.

퇴각이라니요?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곧 있으면 북풍관이 함락될 것이고, 이곳만 뚫고 지나가면 그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는데요?

그때가 되면, 황제가 순순히 우리 요구를 모두 들어줘야 할 텐데요?

이문회가 탈취해간 몇백만 냥의 은자를 보상하고, 이문회를 처형하고, 이연정을 동창에서 내쫓은 뒤, 영설 공주를 여씨 가문의 사람으로 맞이하는 게 일사천리로 진행될 텐데, 지금 여기서 퇴각이라니요!

여여산은 여여해의 결정을 믿을 수가 없었다.

“주상?”

여여산이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확신하면서 되물었지만, 여여해는 단호하게 소리쳤다.

“퇴각하라.”

여여해는 한 글자도 더 뱉기 싫다는 듯이 입을 꾹 닫고 자신의 화려한 마차 안으로 몸을 실었다.

여여해는 출정한 뒤로 한 번도 자신의 마차에 오른 적이 없었건만, 전투가 한창인 지금 갑자기 퇴각하자면서 마차에 올랐다.

성벽에서 뛰어내린 뒤 착지할 때나 마차를 향해 걸어갈 때나 마차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여여해는 평소와 똑같았다.

하지만 마차 문을 닫은 순간, 여여해의 가슴팍이 쩍 갈라지면서 족히 일 척(尺: 약 30센티미터)이 넘는 상처가 드러났다.

그의 가슴팍에서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는데, 오장육부가 훤히 보일 정도로 상처가 심각했다. 그중 폐는 거의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깊게 패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여여해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그대로 쓰러졌다.

마차 안에는 성화교 제사장이 앉아 있었다. 그는 처음엔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여여해를 살리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성벽 위.

또 한 번 피를 토한 저홍엽이 즉시 영종오 곁으로 뛰어갔다.

‘대종사! 무사하셔야 합니다. 제발요!’

저홍엽은 이대로 영종오가 죽는다면 자기 자신을 수십 번 찔러 죽인데도 제국의 손실을 만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국에 남은 대종사의 수가 손에 꼽았고, 제국을 위해, 폐하를 위해 충성하는 대종사는 더욱 적었다.

어떤 의미로 보았을 때, 영종오 대종사는 제국의 기둥이자 무도 세계의 기둥이었다.

적국의 무도 종사, 혹은 제국에 적대적인 무도 종사들이 진남공이나 황실에 마수를 뻗으려고 할 때면, 항상 영종오 대종사의 보복이 두려워서 차마 그들을 건드리지 못했다.

제국을 위해 충성하는 소수의 대종사조차 없었다면, 영설 공주, 태자 전하, 진남공 송결은 아마 매월 자객의 암살 공격을 막아내야만 했을 것이다.

남쪽에는 영종오가 있고, 북쪽에는 이연정이 있었다.

각지에 흩어져있는 대종사들은 현대 지구의 핵무기급과도 같다고 할 것이다.

저홍엽이 대종사의 상태를 살피려고 본능적으로 대종사의 오른쪽 팔뚝을 잡았다.

그런데.

대종사의 오른쪽 팔뚝이 그가 손에 쥐고 있던 검과 함께 스르륵 끌려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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