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장. 퇴각하라
“쿨럭.”
영종오 대종사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저홍엽은 자신이 쥐고 있는 대종사의 팔을 보면서 눈물을 쏟아냈다.
영종오 대종사의 무공 실력이 절반밖에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여여해는 그의 검을 피하지 못했다. 피하려는 동작이나 도망치려는 그 어떤 행동도 영종오의 검 아래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심지어 여여해가 옆에 있던 병사를 잡고 자신의 앞을 막았어도, 영종오의 검은 그 병사를 뚫고 여여해의 목숨을 앗아갔을 것이다. 영종오 대종사의 검기라면, 앞에 있는 사람을 가뿐히 찢어버리고 뒤에 있는 여여해의 몸도 절단낼 수 있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여여해는 가장 짧은 시간 내에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렸다. 그는 영종오의 검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대검으로 영종오의 공격에 정면으로 맞섰다.
여여해의 검기가 영종오의 검기와 충돌하면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그 때문에 영종오의 검기는 여여해를 아예 반으로 가를 수 있는 만큼의 힘이 남지 않았다.
그때, 여여해의 남은 검기가 허공을 가르며 영종오를 향해 날아왔고, 검을 쥐고 있던 영종오의 오른팔을 그대로 잘라버렸다.
“괜찮다. 이 정도면 운이 꽤 좋은 거지. 팔을 다시 이어서 봉합하면 못 쓸 정도는 아닐 테고. 독한 술로 잘린 팔을 소독한 뒤에 좀 굵은 혈관을 먼저 이어주고, 더 얇은 혈관과 근맥을 이으면 될 일이다. 날 위해 손재주가 정밀하고 세심한 군의 한 명을 찾아주겠소? 혈관과 근맥을 이은 뒤에 팔을 봉합하고 단옥고(斷玉膏)를 바르고 응근단(凝筋丹)을 복용하면 괜찮을 거요.”
영종오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저홍엽이 애써 정신줄을 붙잡고 대종사가 말한 처치방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했다.
뒤에 서 있던 이위는 두말하지 않고 동창의 수십 명 무사를 이끌고 빠른 속도로 가까운 성을 향해 달려갔고, 그곳에서 최상의 약재와 실력이 가장 뛰어난 연단사를 데리고 북풍관으로 돌아왔다.
“쿨럭.”
영종오 대종사가 또 한 번 피를 토하더니 득의양양하게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여여해는 나보다 훨씬 더 끔찍한 상태일 거요. 하하하.”
영종오 대종사는 자신이 다칠 때마다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이었다.
북풍관 아래.
여여해의 명령 하에 오만 대군이 흔적도 없이 물러났다.
여여해의 마음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억울함과 고통이 서려 있었다.
이로써 여씨 가문의 반란과 황제를 협박하는 모든 계략이 수포가 되어버렸다.
이문회를 죽이는 건 물론이거니와, 이연정을 동창에서 내쫓는 것도, 영설 공주의 혼사를 얻어내는 것도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여여해의 음모를 깨부순 1등 공신은 단연 두변과 사륭석이었다. 만약 사륭석이 여씨 토사부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여여해의 팔만 대군이 벌써 북풍관을 박살 냈을 것이고, 여여해가 다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영종오가 북풍관에 숨어있었다고 해도, 직접 최전방에 뛰어들지 않는 한 여여해를 암살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의 계략을 망친 2등 공신은 영종오 대종사였다. 만약 영종오 대종사가 목숨을 걸고 일격필살로 나서지 않았다면, 저홍엽은 벌써 여여해의 검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영종오 대종사가 아니었다면 북풍관도 벌써 함락되었을 것이고, 여여해는 순조롭게 오만 대군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대녕 제국을 지르밟으면서 황제를 협박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운남이든 광서의 몇만 대군이 와도 여여해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3등 공신은 저홍엽 장군이었다. 만약 그녀가 몇천 명의 노병을 이끌고 북풍관을 지키지 않았다면, 여여해는 이곳에서 지체할 필요도 없이 곧장 대녕 제국 안으로 들어갔을 테니까.
사실 여여해는 굳이 북풍관을 통해 대녕 제국으로 갈 필요가 없이 안륭 토사부를 거치지 않고 백색부(百色府)를 통해 우회해서 대녕 제국으로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여해가 일부러 이 길을 택한 이유는 눈엣가시인 안륭 토사부를 후환 없이 싹 다 죽이고 가려던 속셈 때문이었다.
그리고 백색부가 대녕 제국의 주부이긴 하지만, 그곳은 이미 여씨 가문의 손아귀에 있는 땅덩어리였다. 주부의 관리부터 잡역들까지, 심지어 주둔병까지 여씨 가문의 사람이니, 그곳을 뚫고 가는 건 괜히 자기네 자원 손실을 보게 되는 경로였다.
안남 왕국 국경 부근, 견사사 경내.
견사 대사가 다시 한번 말했다.
“둘 중 한 명만 내 정신력을 계승할 수 있습니다. 누가 포기하겠습니까?”
두변과 옥진 군주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비록 당신의 몸매가 폭발적이지만, 엉덩이가 완벽하고 얼굴도 이 세상에서 보기 드문 미인이고 예전에 나를 도와준 적 있지만, 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두변이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옥진 군주는 그보다 더욱 단호했다.
게다가 옥진 군주는 조금 전에 두변이 한 파렴치한 말과 엉덩이를 스친 것 때문에 이 자리에서 두변을 때려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두변이 그녀의 맹우이기도 하고 영종오 대종사의 제자이기도 하니, 아무리 죽이고 싶다고 해도 정말로 죽일 순 없으니, 눈탱이가 밤탱이 되도록 흠씬 패버리고 싶었다.
“전 포기 못 합니다.”
두변이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옥진 군주가 말했다.
한 치의 양보도 할 생각 없는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군요.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되잖습니까?”
견사 대사가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사람처럼 말했다.
옥진 군주와 두변이 화들짝 놀랐다.
‘둘 중 한 명이 죽어야 한다고? 우리 둘이 결판을 내라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두변이 자기 입으로 옥진 군주와 하고 싶다고 말했고, 의도치 않게 그녀의 엉덩이를 스치기도 했지만, 그는 진남공 송결과 옥진 군주에게 무한한 존경심과 감사함을 품고 있었다.
그러니 두변이 옥진 군주를 공격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변은 공격할 마음이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아예 검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옥진 군주가 흠칫 놀라더니, 두변처럼 검과 비수 등을 모두 바닥에 던졌다.
옥진 군주는 진심으로 두변을 패버리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죽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녀는 자신의 사제이자, 진남공부의 제일 맹우인 두변을 절대로 죽일 수 없었다.
새파랗게 어린 사내자식이 허구한 날 하는 거라곤 음란하고 저속한 생각밖에 없는 게 한심하긴 했지만, 심성만큼은 누구보다 착해 보였다.
두변으로서는 어이없는 상황이긴 했다. 두변은 영설 공주나 옥진 군주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지만, 두 여인은 두변을 마냥 어린아이로 취급했다.
“아무도 공격할 마음이 없고, 서로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인가요?”
견사 대사가 물었다.
두변과 옥진 군주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당연하죠.”
견사 대사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그럼 두 사람은 영원히 이곳에 갇히는 수밖에요. 굶어 죽든 목말라 죽든 알아서 하세요. 두 사람 중 한 명은 무조건 죽어야만 합니다. 둘 중 한 명만이 내 정신력 계승을 받을 수 있고, 모든 일이 끝난 뒤에야 이곳에서 나갈 수 있습니다.”
옥진 군주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 곧바로 바닥에 던졌던 검과 비수를 챙겨 들고 밖을 향해 걸어갔다. 꼭 이런 식으로 정신력 계승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아예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 전까지 있던 동굴의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 동굴에 입구가 존재하지 않았던 듯, 사방이 단단한 돌벽으로 막혀 있었다.
격노한 옥진 군주가 돌벽을 향해 검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벽과 검이 부딪히면서 불꽃이 튀고 부서진 돌덩이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옥진 군주가 헉헉거릴 정도로 벽을 부수는데도 단단한 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변도 서둘러 벽을 이리저리 쳐보면서 출구를 찾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아무리 동굴의 출구를 찾아보려고 해도 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두변은 두 사람이 견사 대사의 정신 감옥에 갇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견사 대사의 정신력 수완이 실로 너무 높아서, 그가 자진해서 두 사람을 풀어주는 게 아니라면 두변과 옥진 군주는 영원히 이곳에 갇히고 말 것이다.
한없이 자애로운 견사 대사가 왜 이렇게까지 나오는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도저히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한 두변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그는 이곳에서 나갈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 꿈속 세계로 들었다.
꿈속 세계에서 앞으로 일어날 일이 두변의 눈앞에 펼쳐졌다.
꿈속 세계에서 두 사람이 이곳에 얼마나 갇혀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두변과 옥진 군주의 신체는 극한에 달했고, 둘 다 입술이 트고 탈수 직전의 상태였다.
“상대를 죽이기만 하면, 내 정신력 계승을 받을 수 있고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상대를 죽이기만 하면, 내 정신력 계승을 받을 수 있고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견사 대사는 두 사람에게 세뇌하듯 한 번 또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꿈속의 두변은 자신과 옥진 군주가 이곳에서 얼마나 갇혀있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다 어쩌면 졸업 시험을 이미 놓친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두변은 기이한 불빛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임무 실패 시, 졸업 시험 불참, 심할 경우 산송장이 된다.’
동굴 안에는 물 한 방울도 없었고 먹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출구도 없었다.
두변은 이대로 가다간 자신과 옥진 군주가 모두 탈수로 죽게 될 것이고, 죽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했다.
이때, 갑자기 옥진 군주가 검을 집어 들고 충혈된 두 눈으로 두변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두변이 움찔 놀라면서 옥진 군주를 쳐다보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검을 집어 들지 않고 조용히 옥진 군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눈까지 감고 말았다.
옥진 군주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의 사저이고, 너는 나의 사제다. 내가 더 나이가 많으니 너를 보호하는 건 내 의무다. 내가 죽으면, 넌 살아서 나갈 수 있다.”
불길한 예감에 두변의 두피가 저릿해졌다. 그가 눈을 다시 뜨려는 찰나, 옥진 군주가 검으로 자신의 목을 휙 그었다.
선혈이 동굴 벽에 사방으로 튀고, 그녀의 향기가 사라지면서 그녀는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안 돼요!”
두변은 여기가 꿈속 세계라는 걸 알면서도 황급히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꿈속 세계여서가 아니라, 두변은 옥진 군주라는 여인은 실제로도 이런 결정을 내릴 여인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난감하게도 너무도 현실적인 장면 때문인지, 꿈속 세계에서 깨어난 두변은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고 옥진 군주를 향해 냅다 몸을 날렸다.
“안 돼요!”
처량한 외침과 함께 그녀의 자결을 막으려고 몸을 던진 두변은 옥진 군주의 팔이 아니라, 잡지 말아야 할 물컹한 곳을 잡아버렸다.
주위의 공기가 갑자기 뜨거워지고!
옥진 군주의 이글거리는 살기가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옥진 군주의 몸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표범처럼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두변이 안고 있는 건 사람의 몸이 아니라, 살기로 가득 채워진 폭탄이었다.
“두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난 이 자리에서 너를 때려죽일 것이다.”
옥진 군주가 넘실대는 살기를 애써 참으며 말했다.
두변은 재빨리 옥진 군주에게서 떨어지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조금 전에 꿈을 꿨는데, 당신이 나를 구하기 위해서 자결했습니다. 내가 당신의 사제이니 나를 보호해야 한다면서요. 깜짝 놀라면서 꿈에서 깨어났는데, 잠시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당신을 말리려고 달려든 겁니다.”
“내가 왜 네놈을 위해 자결해? 꿈꾼 게 맞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