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61화 (161/648)

161장. 옥진 군주의 결정

옥진 군주가 대꾸하더니, 갑자기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다그쳐 물었다.

“눈을 감은 지 얼마나 됐다고 꿈까지 꾸지?”

옥진 군주가 두변을 흠씬 패버릴 생각으로 한 손으로 그를 바닥에 눕히고 눌렀다.

옥진 군주의 아래에 깔린 두변은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아직도 꿈속 세계에서 봤던 장면의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만약 옥진 군주를 막을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한다면, 꿈속 장면은 잔인하게도 제 눈앞에 그대로 나타날 것이다.

옥진 군주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는 두변을 내려다보면서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뭐 하자는 거지?”

두변이 넋이 나간 얼굴로 대답했다.

“계림부에서부터 저를 패고 싶었잖습니까. 지금이 기회이니 얼른 때리세요.”

호기롭게 말한 두변은 곧바로 가볍기 그지없는 제 입이 원망스러웠다.

옥진 군주가 정말로 인정사정없이 개 패듯 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맞았을까.

두변이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땐, 그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코에서는 코피가, 등부터 다리 곳곳에는 피멍이 들어있었다.

평아 누이보다 훨씬 더 세게 때리네. 평아 누이야 사람을 살짝 꼬집는 걸 좋아하는 정도지만, 이 여인은 작정하고 주먹질을 하잖아!

너무 아픈 탓인지, 두변이 멍한 눈빛으로 잠시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 이걸로 지난 원한은 다 푼 겁니다? 제가 오늘 말실수한 거랑, 우연히 엉덩이를 스치고 가슴을 만진 일도 다 지나간 일이 되는 겁니다? 앞으로 이 일로 또 저를 때린다고 하지 마세요.”

두변이 퉁퉁 부은 입술로 말했다.

“거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더 맞을 줄 알아라.”

옥진 군주가 경고하듯 말하자, 두변이 서둘러 입을 꾹 다물었다.

두변을 흠씬 팬 뒤에 마음이 좀 풀렸는지, 옥진 군주는 두변과 함께 이곳에서 나갈 방법을 열심히 찾았다.

심지어 옥진 군주는 견사 대사를 향해 검을 찌르기도 했지만, 다 쓸모없는 짓이었다.

이곳에 앉아 있는 견사 대사는 하나의 환영일 뿐이고, 심지어 그것도 안개 속에 싸여 있어서 얼굴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옥진 군주가 견사 대사를 아무리 공격해도, 그건 허공에 칼질하는 것에 불과했다.

시간이 끊임없이 흘렀다.

한 시진, 두 시진, 세 시진…….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이대로라면, 틀림없이 졸업 시험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먹을 게 없더라도 꽤 오래 살아있을 수 있지만, 마실 물이 없으면 며칠 만에 죽는다. 이건 무공과 무관한 자연의 섭리였다.

두변과 옥진 군주는 극한의 탈수를 겪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온갖 방법을 생각해봤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곳에서 나갈 수 없었다.

처음엔 견사 대사가 단순히 두 사람의 인내심과 심성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두 사람을 정말 죽일 생각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국보급 대사이자 곧 열반에 오를 고승이라면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아하니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견사 대사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두변이나 옥진 군주의 생명 따위는 중요치 않은 사람이었다.

두변조차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비로움의 끝은 결국 무정함이라고.

견사 대사의 눈에 모든 생명이 동등한 것이라면, 두변이나 옥진 군주의 목숨도 개미 두 마리에 불과할 것이다.

두변은 이 상황에서 죽게 될 사람이 자신이란 걸 알고 있었다.

옥진 군주는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고, 견사 대사의 정신력 계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옥진 군주의 신체 능력이 두변보다 좋으니, 탈수 때문에 탈진이 오더라도 두변보다는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대로 두변이 탈수로 죽는다면, 옥진 군주는 그 어떤 죄책감도 느낄 필요가 없게 된다. 옥진 군주의 무공이 두변보다 월등히 뛰어나니, 그저 손끝을 살짝 튕기기만 해도 두변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조차 두변을 죽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최선을 다하는 셈이었다.

두변도 당연히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만약 정말로 옥진 군주를 죽이고자 한다면, 옥진 군주가 무방비상태일 때 먼저 공격하는 비겁한 방법을 택해야만 죽일 수 있고, 견사 대사의 계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이라도 광서로 돌아가서 남은 몇 과목의 시험을 치를 수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두변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옥진 군주를 공격할 생각도 없었다.

두변이 음흉하고 교활하긴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밑바닥까지 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두변은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옥진 군주처럼 정의롭고 고상한 사람을 해칠 생각이 없었다.

사람이 인간 실격의 밑바닥까지 넘어버린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금수이지 않겠는가.

탈수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두변은 혼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몸이 한계치에 달했음을 느꼈고, 극도의 탈수 상태일 때 나타나는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지가 마비되기 시작했고,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자꾸만 감겼다.

그렇게 혼수상태에 빠지나 싶던 찰나, 누군가가 다급하게 그의 몸을 흔들어 깨웠다.

옥진 군주였다.

“잠들면 안 돼. 이대로 잠들면 다시 못 깨어나.”

대꾸할 힘도 없던 두변은 속으로 생각했다.

‘영화에서 누가 죽는 장면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대사를 실제로 듣게 되네요. 좀 다른 대사 쓰면 안 될까요?’

“두변, 넌 꿈이 뭐지?”

옥진 군주가 진지하게 물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던 두변은 다시 스르륵 드러누웠다.

토 나올 정도로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죽기 직전까지 이런 질문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현대 지구에서 방영하는 <갓 탤런트> 같은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에게 항상 묻는 게 바로 이런 질문이었다.

‘누구나 다 꿈이 있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두변은 꿈이 없었다.

현대 지구에서 살던 그는 여자라면 여자, 잠자리라면 잠자리, 집도, 값비싼 스포츠카까지 원 없이 가질 수 있었다.

인성이 덜 되고 찌질한 남자다 보니, 가끔 전여친을 못 잊어서 그녀와 자고 싶다는 이룰 수 없는 바람 외엔 별로 원하는 게 없었다.

그는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꿈도, 의지도 없는 그저 그런 사내였다.

옥진 군주가 진지하게 다시 말했다.

“얼른 말해.”

“남자 구실을 할 수 있는 몸이 되어서 영설 공주, 당신, 그리고 혈관음과 혼례를 올려서 하루에 한 명씩 바꿔가면서 자고, 주말엔 동시에 다 같이 자는 게 꿈입니다.”

이미 죽기 직전인데, 속마음을 말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잃을 게 뭐가 있을까. 이런 말을 한다고 설마 옥진 군주가 때려죽이기야 할까.

그는 옥진 군주가 어차피 죽을 목숨인 자신을 때려죽이진 않을 거라고 믿었다.

두변의 꿈이 너무 대단해서인지, 아니면 터무니없어서인지, 옥진 군주는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그녀 또한 오랜 탈수 증세에 시달린지라 두변에게 주먹질할 힘조차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두변을 다시 바닥에 눌러놓고 죽을 만큼 때려놨을 터인데.

“더 원대한 꿈 같은 건 없고? 환관 주제에 허구한 날 생각하는 게 여자밖에 없어?”

옥진 군주가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더욱 원대한 꿈이라……. 잠깐 생각 좀 해볼게요.”

두변은 점점 더 마비되어 가는 머리를 열심히 굴려서 대답을 생각해냈다.

“더 큰 꿈이 있다면, 의부께서도 남자 구실을 할 수 있는 몸이 되시는 겁니다. 그리곤 저홍엽 장군과 혼례를 치르고, 반평생 누리지 못했던 것을 누리게 해드릴 겁니다.

아, 혹시 이보다 더 큰 꿈이 없냐고 묻는다면, 영종오 대종사도 도와드리고 싶어요. 옛날에 서로 눈이 맞았던 여인이 있는데, 선천적인 고자라서 퇴짜를 맞으셨거든요. 그러니까 대종사도 남자 구실을 제대로 하실 수 있는 몸이 된다면, 그 여인을 부인으로 맞아서 매일 좋은 시간을 보내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옥진 군주가 참을 만큼 참았다는 얼굴로 두변을 노려보았다.

지금 그녀에게 검을 쥘 힘이라도 있다면, 정말 단칼에 두변의 머리를 베어버렸을 것이다.

‘이 망할 놈은 글렀네, 글렀어. 머릿속에 든 게 온통 그런 것뿐이라니!’

“하하하.”

두변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시구 하나가 떠올랐는데, 들어볼래요?

X을 달고 태어나, X 때문에 평생 X 빠지게 고생을 하고,

이러다 X 때문에 죽겠다.

그래도 X 없이는 못 살아!”

옥진 군주는 화병이 나서 죽고 싶지 않은 마음에, 두변의 말을 아예 무시해버렸다.

잠시 뒤, 그녀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겐 꿈이 있다. 대녕 제국의 백성들이 더는 추위와 허기에 시달리지 않고, 계절에 맞는 옷을 입으며,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는 꿈. 문관들은 뇌물에 눈이 멀지 않고, 무장들은 나라를 위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다퉈 폐하를 위해 충성을 바치는 꿈. 대녕 제국의 황제가 대대로 영명하고 어질어서 다시 한번 과거 대녕 제국의 흥성을 이루는 꿈.”

너무도 진지한 옥진 군주의 말투 때문에 두변의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우리 대녕 제국이 지금껏 보여줬던 퇴폐한 모습을 버리고, 다시 세계 정상에 오르는 꿈. 천하의 모든 이들이 대녕 제국을 섬기는 꿈!”

옥진 군주의 말투와 눈빛에는 결의와 희망, 그리고 힘이 가득했다.

대녕 제국을 뼛속까지 열렬히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건 바로 송결, 송옥진, 영설 공주, 이문회, 영종오 등일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사람들은 언제나 두변의 곁에서 그를 도와주고 그를 자극시키고, 그를 인간적인 매력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녕 제국이 다시 한번 세계 정상에 오르는 걸 보긴 어렵겠구나. 내일은 너무 고통스럽고, 미래는 너무 절망적이다. 그러니 내 생을 미리 내 손으로 끝내는 게 하나의 해방일 수도.”

옥진 군주가 낙담한 모습으로 말하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두변을 바라보았다.

“두변, 여기서 나간 뒤엔 허구한 날 여자 생각만 하지 말고, 내 꿈을 티끌만큼이라도 생각하며 살아라. 그 꿈을 실현할 수 없다고 해도, 네 최선을 다해서 분투해라.

너는 내 사제이고, 나는 너의 사저다.

그러니 나는 너를 보호하고 지킬 것이다.”

두변의 솜털이 삐쭉 섰다. 그는 발버둥 치면서 바닥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지금의 그는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안 돼요. 지금 무슨 소릴! 안 돼요. 안 돼!”

두변이 핏대를 세우면서 처절하게 소리쳤다.

“대녕 제국의 중흥을 바라던 내 꿈을 기억하거라.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옥진 군주가 마지막 힘을 다해 검을 쥐고 자신의 목을 그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그 가슴 아픈 장면이 다시 두변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의 선혈이 사방으로 튀고, 그녀의 향기가 사라졌다.

두변은 뇌와 영혼이 폭발할 것만 같았고, 그의 몸과 영혼이 불타올랐다.

옥진 군주는 굳이 자살할 필요가 없었다. 이대로 시간만 더 흐르면 두변은 죽을 것이고, 그녀는 바라던 대로 견사 대사의 계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두변이 죽는 건 옥진 군주 때문이 아니며, 옥진 군주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나라를 위해 충성해야 하며,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보호하라는 교육을 받아왔다.

그녀보다 어리고, 같은 스승을 둔 사제이고, 그녀보다 약한 두변이었다.

그래서 옥진 군주는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두변을 보호하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그녀도 두변이 자신보다 먼저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남는다 한들 자신의 신조를 져버리는 것이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었다.

이건 옥진 군주가 두변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녀의 신조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세상살이가 이렇다.

누군가의 저열함이 하수구 물보다 더 더럽다면, 누군가의 고상함은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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