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장. 이 순간을 기억하라
“아아! 안 돼!”
두변의 처절한 비명이 동굴을 가득 메웠다.
끝없는 고통, 끝없는 충격 그 이상의 것이 그의 영혼을 무참히 폭격하고 있었다.
‘비열은 비열한 자의 통행증이요, 고상함은 고상한 자의 묘비명이다.’1)
과연, 두변은 비열한 자일까.
이때, 알 수 없는 엄청난 힘이 두변의 몸과 영혼으로 밀려 들어왔다. 손이 움직여지자마자, 두변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검을 집어 들고 바닥에 쓰러진 옥진 군주의 시신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안 돼. 안 된다고!”
두변이 다시 한 번 목놓아 절규했다.
그리고 견사 대사를 향해 검을 겨눈 뒤 있는 힘껏 그를 찔렀다.
쾅!
환영인 줄만 알았던 견사 대사의 몸이 폭발하면서 동굴 전체가 폭발했다.
일순간, 두변의 눈에 보이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옥진 군주는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죽지 않은 채 바닥에 누워있었고, 조금 전 견사 대사의 정신지배로 자결한 열한 명의 사람들도 모두 핏자국 하나 없는 상태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두변의 몸도 더는 극한의 탈수 증상을 보이던 몸이 아니었다.
조금 전의 모든 것은 사실 견사 대사가 만들어 낸, 더할 나위 없이 진실한 환영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견사 대사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두변은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얘야, 조금 전의 모든 것은 다 가짜이기도 진짜이기도 하다. 저 송옥진이라는 여인은 진심으로 널 보호하기 위해 죽었었고, 그녀가 했던 모든 말은 진실이다.”
견사 대사가 아직 어안이 벙벙한 두변을 향해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내가 고른 계승자는 딱 한 명, 바로 너였다.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이는 내가 어찌 사람을 죽이겠느냐?”
견사 대사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두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순간을 기억해야 한다. 영원히 이 순간을 기억하거라. 고상함은 영원한 것이다.”
견사 대사의 손끝이 두변의 이마에 닿았고, 그의 송과선을 비추었다. 이어서 견사 대사는 자신의 막강한 정신력과 일생의 가장 지혜로운 기억을 두변에게 물려주었다.
견사 대사의 손끝이 두변의 이마에 닿는 순간이 계승 의식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그렇게 견사 대사는 계승을 마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순간, 강력한 정신력이 두변의 뇌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견사 대사가 그에게 계승해준 것 중에는 극히 일부의 흩어진 기억과 고찰이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순수하고 강력한 정신력이었다.
견사 대사의 정신력 계승이 이렇게 끝이 났고, 두변의 정신력은 한순간에 크게 향상되었다.
두변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견사 대사가 앉아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보살처럼 자비롭기만 하고 선행만 베풀 것이라 생각하던 견사 대사가 갑자기 악마의 얼굴을 하고 열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게다가 그는 두변과 옥진 군주에게 둘 중 한 명이 죽어야만 끝나는 극한의 상황을 주었고, 그 때문에 옥진 군주가 두변을 위해 목숨을 끊었다. 그녀는 심지가 곧고,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사제인 두변을 위해 자결했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두변이 절규하던 그때, 갑자기 모든 게 환영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옥진 군주도, 조금 전 견사 대사의 조종으로 자결했던 열한 명의 사람들도 멀쩡히 살아있었다.
악마인 줄 알았던 견사 대사가 다시 보살의 모습을 하고, 자기가 처음부터 점지한 사람이 바로 두변이라고 말했다.
‘얘야, 이 순간을 기억하거라.’ 이 말이 두변의 뇌리에 영원히 새겨질 듯했다.
게다가 조금 전의 모든 상황은 환영인지라, 실제로 두변이 이곳에 머문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고, 졸업 시험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왜 저입니까?”
두변이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그의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는 이는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히 두변의 눈앞에 앉아 있던 견사 대사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있던 자리에 해진 승복만 남긴 채.
두변이 견사 대사의 얼굴을 드디어 볼 수 있게 되던 찰나부터 견사 대사는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영원히 이 순간을 기억하라고?
이 순간의 뭘 기억하라는 건데?
옥진 군주가 나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거?
아니면, 내가 검을 쥐고 견사 대사를 찔렀던 거?
두변은 멍하니 서서 생각했다.
그때, 두변의 머릿속에서 기이한 불빛의 목소리가 울렸다.
- 정신 대사의 열멸 임무 완료. 두변은 견사 대사의 정신력 계승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 두변의 정신력은 영구적으로 15포인트 상승하여 총 55포인트가 되었다.
- 두변이 졸업 시험에서 1등 할 확률이 55퍼센트에서 85퍼센트까지 상승.
두변은 꿈속 세계가 아무리 신묘해도, 온전히 그들의 힘으로 확률을 100퍼센트까지 올릴 능력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두변이 졸업 시험에서 1등 할 확률이 85퍼센트라면, 나머지 15퍼센트는 온전히 두변의 몫이었다.
꿈속 세계가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자, 두변은 실망하기보다는 ‘이래야 재밌지.’ 하는 오기가 생겼다.
그때 향기로운 향이 두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바닥에 누워있던 옥진 군주가 눈을 떴다. 그녀는 누운 자세 그대로 멍한 표정으로 동굴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난 조금 전에 죽었는데?
몇 날 며칠 물 한 방울 못 마셔서, 곧 죽을 정도의 탈수 상태 아니었나? 그런데 왜 이렇게 몸이 가볍지? 조금 목이 마른 것 같긴 한데, 탈수할 수준은 절대 아닌데?
옥진 군주가 핏자국 하나 없이 주위에 널브러진 채 잠든 사람들을 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들이 죽는 걸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조금 전의 모든 건 다 환영이었습니다. 가짜였어요.”
두변이 어리둥절한 모습의 옥진 군주를 향해 말했다.
“대사는?”
옥진 군주가 몸을 일으키면서 두변에게 물었다.
“입적하셨어요. 흔적도 남기지 않으시고요. 아 그리고, 제가 대사의 정신력 계승을 받았습니다.”
옥진 군주가 아, 하고 짧게 대꾸했다.
그녀는 정신력 계승이 더는 중요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정신력 계승보다, 조금 전 환영에서 겪었던 일이 너무 충격이 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두변을 바라보는 옥진 군주의 눈빛에도 혼란스러움이 어려 있었다. 자신이 두변을 위해서 자결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조금 전의 상황이 환영이니까 자신이 이렇게 살아있는 것일 테지만, 자신이 겪은 건 환영이라고 믿기에는 너무도 사실적이었다.
옥진 군주를 바라보는 두변의 눈빛에 더는 장난기가 없었고, 경건함과 존중이 가득했다.
그는 일반인이 감히 닿을 수도 없는 높은 신분과 지위를 가진 사람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희생할 정도로 고상할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저 여인의 머릿속엔 도대체 뭐가 든 걸까.
무슨 교육을 받으면 사람이 저렇게 고상해질까.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던 두변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지금 전시 상황은 어떻습니까?”
“대녕 제국의 지원군 덕분에 안남 왕국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곳곳에서 승전보가 들려오긴 하지만, 그리 큰 규모의 전투는 아니었다. 지금 양쪽 모두 언제 대전을 치를지 벼르고 있을 거다.”
“안남 왕국의 수도에서 대전을 치르게 되는 겁니까?”
“그렇다. 대녕 제국의 지원군, 안남 왕국의 병사까지 합하면 총 오십만 명이 넘는 규모다 보니, 수도에서 치러질 전투는 안남 왕국의 앞날을 결정지을 대전이 될 것이다.”
옥진 군주가 대답하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안남 국왕이 북쪽으로 수렵을 갈 수도 있고, 안남 왕국 제2의 수도인 승룡부(昇龍府: 하노이)로 갈 수도 있으며, 아예 대녕 제국으로 바로 들어올 수도 있다.”
두변이 흠칫 놀랐다.
옥진 군주가 말한 건 군사기밀인데, 왜 자신에게 이렇게 중요한 기밀 정보를 알려주는 것일까. 두변은 이유를 모르겠어서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옥진 군주가 말했다.
“그래서 그때는 이문회 대인, 영종오 대종사의 도움이 필요해진다. 국왕에게 절대로 무슨 일이 생겨선 안 된다. 안남 왕국의 수십만 대군의 정신적 지주인데, 국왕이 쓰러지게 되면 왕국 전체가 위태로워진다.”
북쪽으로 수렵을 간다는 것은, 사실은 국왕이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피신한다는 의미였다. 한 나라의 군주가 피신하는 건 망신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도리어 일국의 군주를 전장의 최전방으로 떠미는 게 더욱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지금의 안남 왕국은 지리멸렬하여, 이미 반란군에게 절반의 강산을 빼앗긴 채 망조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국왕이 혼군인 건 아니었다. 모든 왕조의 마지막 왕이 능력 없고 어리석은 국왕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지금의 안남왕이 영명하고 무예가 뛰어난 편이라 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충분히 용감하고 검소하고 자애로운 왕이었다. 그래서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도 수십만 명의 대군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고 있는 것이고.
또한 안남왕은 대녕 제국의 황실과 진남공과도 두터운 우정을 나누었다. 태자이던 시절, 그는 대녕 제국의 경성에서 8년 넘게 머물면서 글공부와 무예를 익혔다. 왕위를 이어받기 위해 안남 왕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대녕 제국과의 친교를 더욱 중시했다.
게다가 지금의 안남 왕국의 왕후가 영설 공주의 고모이자, 대녕 제국 천윤제의 누이였다.
안남왕과 천윤제 모두 고된 운명을 타고난 자들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천부적인 문무 재능 대신, 태생이 겸손하고 꼼꼼하며, 백성을 아끼고 선조들이 남긴 강산에 강한 책임감을 느끼는 어진 군주였다.
십수 년 동안, 안남왕은 거의 전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특히 최근 몇 년은 전시 상황이 점점 더 안 좋아지다 보니, 왕 스스로가 직접 전장을 누비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야 했다. 안 그래도 건강이 좋지 않던 안남왕은 매일 몇백 리의 길을 재촉하며 전장을 누비다 보니,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대녕 제국에서 지원군이 도착했고, 진남공이 직접 나서서 연합군을 지원해주는 덕에 안남왕이 뒤로 살짝 물러나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만약 국왕 폐하가 광서에 오시게 된다면, 저도 그분을 꼭 뵐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두변이 말했다.
옥진 군주가 물었다.
“참, 최근 제국 내의 상황은 어떠하냐? 이문회 대인은 어떠하고?”
‘제국의 상황? 아주 난리도 아닙니다. 특히 여여해가 움직이기 시작한 뒤로는 정말 난장판이 되었죠.’
두변이 속으로 말했다. 그는 옥진 군주가 견사사에 오느라 아직 소식을 접하지 못한 것으로 추측했고, 굳이 그녀가 마음 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이렇게 대답했다.
“별일 없을 겁니다. 군주께서는 안남 전투에만 집중하시면 되고, 제국은 의부와 영설 공주께서 계시니, 크게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옥진 군주가 손을 먼저 내밀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제국을 구제하고자 하는 같은 배를 탔으니, 힘을 합쳐 제국을 일으켜세우자.”
두변이 옥진 군주의 손을 맞잡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을 구제하고자 하는 같은 배를 탔으니, 힘을 합쳐 제국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옥진 군주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난 먼저 가봐야겠다. 나중에 또 보지.”
“저도 광서로 돌아가서 졸업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나중에 또 뵙지요.”
옥진 군주가 검과 비수를 검집과 허리춤에 꽂은 뒤, 견사 대사가 앉아 있던 곳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이고 예를 올린 뒤, 곧장 밖으로 걸어갔다.
1) 베이다오北島의 <회답回答> 중에서. 시의 형식을 대담하게 혁신했다는 평가를 받는 중국 현대 문학가이며 저항 시인. <회답>은 톈안먼 사건을 배경으로 당시의 사회적 현상을 폭로하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