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장. 낙문의 절망
두변이 옥진 군주의 뒷모습을 향해 말했다.
“옥진 군주, 전장의 칼과 창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으니,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옥진 군주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제국의 암투도 치열할 테니, 몸조심해라.”
옥진 군주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두변도 심호흡한 뒤 견사 대사가 앉아 있던 곳을 향해 정중히 예를 올리고 자리를 떠났다.
두변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야생마 등 위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졸업 시험을 치르기 위해 밤낮없이 광서 환관 학원을 향해 질주했다.
지금의 두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오직 하나, 졸업 시험에서 1등을 하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실패하게 될 경우, 이 세상에서 더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될 테니까.
며칠 전, 여여해가 십만 대군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북상을 시작했고, 이 소식을 듣고 희열에 몸을 떤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문무 집단은 이 소식이 제국 전역에 퍼지기 무섭게 이문회와 동창을 향한 총공격을 시작했다.
이미 시작된 이상, 그 누구도 문무 집단의 총공격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 총공격의 신호탄을 발사한 사람은 광서 순무 낙문이었다. 이건 그의 지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그가 지리적으로 이문회와 가장 가깝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역사적인 일의 신호탄을 터트리는 건 낙문에게 너무도 영광스러운 임무였다.
신호탄을 발사한 직후, 그는 천윤제를 가리켜 수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아둔한 혼군이라고 질책하는 유래 없는 상주서를 휘갈겨서 황제에게 보냈다.
그 뒤로 낙문은 여여해가 하루빨리 대군을 이끌고 대녕 제국에 발을 들이길 기다렸다.
그때가 되면, 황제는 여여해의 모든 요구를 들어줘야 할 테니 이문회를 처형하고 이연정을 동창에서 내쫓아야만 할 테니까.
그때가 되면, 천하가 동창을 공격하는 정치전에서 문무 집단이 완벽하게 승리를 거둘 테니까.
그리고 신호탄을 제대로 날린 낙문이 이 전투의 1등 공신이 될 테니까.
그는 자신이 당장 내각까지 들어갈 순 없어도, 경성의 육부 시랑 자리까진 넘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년 더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각의 일원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문관들이 수십 년을 고생하며 글공부를 하는 게 다 그날을 위한 게 아닌가.
낙문은 며칠간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지냈다. 그는 살면서 이토록 행복하고 긴장되고 조급한 적이 없었다.
그는 거의 한 시진이 지날 때마다 밖에 있던 심복에게 묻곤 했다.
“여여해의 대군이 어디까지 왔다더냐?”
심복이 여여해의 대군이 북풍관에서 저홍엽과 사천 명 병사와 전투를 치르고 있다고 대답하자, 낙문이 크게 노하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난신적자(亂臣賊子: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를 보았나.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물론 그가 욕한 사람은 반란을 일으킨 여여해가 아니라 저홍엽이었다. 하지만 욕하는 것도 잠시, 그는 진정한 난신적자가 저홍엽이 아닌 자신이란 걸 자각하고는 잠시 민망해했다.
죽을 각오로 여여해에게 맞서는 저홍엽 같은 충신이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는 염라국 같은 정치판에서 수십 년을 굴러온 터라, 양심이란 걸 일찍이 개나 줘버렸다.
만약 그에게 양심이 있었다면,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올라오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낙문은 여여해가 저홍엽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에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여인의 몸으로 낡아빠진 북풍관에서 사천여 명의 노병과 아무리 애를 써도 십만 대군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밀릴 테니까.
기껏해야 한 두 시진 정도 버티려나.
조금만 있으면 저홍엽이 죽고 여여해가 북풍관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면 빠르면 내일, 여여해의 십만 대군이 대녕 제국의 영토에 발을 들이고 황제를 협박한다는 소식이 퍼지지 않겠는가!
그 뒤로는 이문회가 죽고 이연정이 동창에서 내쫓기는 희소식이 연달아 들릴 것이고, 그럼으로써 동창을 겨냥한 정치전은 대승을 거두는 것이다!
낙문으로서는 그저 승리 직전의 흥분과 긴장감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신호탄을 날린 그 순간부터 그는 승리의 날만 손꼽아 기다리면서, 그렇게 흥분과 조급함 속에서 하루를 1년처럼 보내고 있었다.
그는 매일 서재에서 계속 왔다 갔다 했고, 극도의 흥분을 견디지 못하고 벌써 며칠째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래서 그냥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쥔 뒤 이문회가 죽게 되면, 그날부터 두 발 뻗고 며칠 밤을 자겠노라 결심했다.
낙문은 거의 일각이 지날 때마다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새로운 소식이 없냐고 물었고, 그의 심복은 매번 난감해하면서 없다고 대답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낙문은 자신의 두 눈이 충혈되다 못해 곧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광서 순무 낙문은 뛸 듯이 기뻐하면서 서재 밖으로 뛰쳐나갔다.
“여여해가 북풍관을 뚫고 북상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냐?”
소식을 들고 온 관졸이 허둥대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대인, 큰일 났습니다. 사륭 부족이 이만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여씨 토사 홍하부를 공격했습니다.
북풍관 전투에서는 여여해가 예상치 못하게 영종오 대종사와 마주쳤는데, 영종오와 한 수를 겨룬 여여해의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여여해가 이끄는 서남 토사 연합군은 완전히 퇴각했다고 합니다.”
순간, 낙문의 눈앞이 새하얘졌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왔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뿜어져 나오는 식은땀이 그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추웠다.
그는 제발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이 순간이 허상이기를 바랐다.
“아아,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낙문이 가슴을 움켜쥐고 비통하게 소리치더니, 갑자기 심하게 쿨럭이고는 혼절하여 바닥에 쓰러졌다.
여여해가 다치고 서남 토사 연합군이 퇴각했다는 놀라운 소식은 삽시간에 제국 방방곡곡에 전해졌고, 몇백 마리 까마귀와 비둘기가 끊임없이 연달아 경성을 향해 날아갔다.
가엾은 황제는 벌써 몇 날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은 데다, 수차례 각혈을 한지라 이 희소식이 하루빨리 경성에 도착하길 바라는 이들의 마음이었다.
이 전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는 이문회가 아니었다.
그는 제국을 위해, 의자를 위해, 황제를 위해, 구인득인(求仁得仁: 인仁을 구하여 인仁을 얻는다는 뜻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음을 의미)하였으니, 황제에게 처형을 당한다고 해도 이번 생에 여한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 싸움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황제였다. 그는 조금 박정하고 의리 없는 한경제와 달랐다. 한경제가 조조를 죽인 건 그의 위신에 타격이 갔을지언정 감정적으로 타격을 입은 건 그리 크지 않았다.
천윤제는 사람과 인정을 중시하는 황제였다. 이문회는 그의 심복이자 지음이자 충신이다 보니, 만약 그가 정말로 이문회를 처형해야 할 날이 온다면 영설 공주의 말대로 수명이 적어도 10년은 짧아질 것이다.
일이 터진 뒤로, 천윤제는 나은 지 몇 년 된 고질병인 폐병이 다시 재발했고, 매번 발작할 때마다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하루에 수차례 각혈했고, 밥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특히 여여해가 연합군을 이끌고 출정했다는 급보를 듣게 되었을 때, 눈앞이 시커메지면서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그 뒤로 그는 줄곧 병상에 누워서 몸을 일으키지 못했고, 혈색은 점점 더 나빠졌다.
황궁 밖에는 아직도 국자감 학생과 대신들, 그리고 더 많은 문무 관리들이 농성을 펼쳤고, 경성에는 이미 몇 번 크고 작은 난이 일어났다.
앙상한 천윤제의 어깨로는 산도 허물고 바다도 메울 기세로 휘몰아치는 압박감을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낙심한 그는 더는 제국에 실낱같은 희망조차 찾을 수 없었다. 살아있는 게 마치 지옥과도 같았고, 황제라는 자리는 그를 지옥에 묶어두는 족쇄와도 같았다.
요 몇 년간, 그는 오직 태자를 위해서 제위에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는 태자가 아직 젊기도 하고 경험을 더 쌓아야 한다는 생각에 앞으로 그를 위해 몇 년은 더 제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대로 선조가 물려준 강산이 망해가는 걸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 때문에 그는 완전히 절망했다.
발언권이 있는 자들이 말도 안 되는 말로 백성을 현혹하고, 구멍이 난 속옷을 기워 입는 자신을 혼군이라고 손가락질했다.
그런데 뻔뻔하고 파렴치한 간신들은 성인마냥 떠받들어졌다.
이문회가 만에 하나 죽게 되고 동창의 주인인 이연정이 내쫓기게 된다면, 동창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고, 황제의 손에 유일하게 남은 무기마저 사라지게 된다.
이 세계에는 산업화 시대에 들어가지 않았고 혁명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입헌 군주제가 시행되지도 않았지만, 황권을 위협하는 힘이 따로 있었다. 이 세계에서 그 힘은 바로 무도였다. 무도만 있다면 굳이 황가에 잘 보이지 않아도 가문을 일으키고, 세력을 만들 수 있었다.
문관과 무장, 그리고 무도라는 세 세력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 황제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제국이 망해가는 중이니, 황제의 역할이 더욱 눈에 띄지 않았다.
고대 중국에서는 폐위되거나 심지어 신하에게 죽임을 당한 황제가 양손에 꼽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그 대단하던 수양제(隋煬帝)도 세가(世家)의 살육의 손아귀에서 자유롭지 못하지 않았나.
다른 지구의 중국 역사에서는 문무가 곧 죽어도 힘을 합쳐 공존하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동풍이 서풍을 압도하거나, 서풍이 동풍을 압도하는 등 쉼 없이 엎치락뒤치락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무도의 궐기 때문에 문무 집단이 하는 수 없이 무도를 포용하게 되었고, 수없이 많은 무도 문파와 동맹 관계를 맺었다. 이들은 한쪽에서는 금전적 권력을, 다른 한쪽에서는 절대 무력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공존했다.
물론 문무 집단이 언제 서로의 뒤통수를 칠지 모를 일이었지만, 두 세력이 힘을 합쳐서 엄당을 없애기 전까지는 이 불신 가득한 동맹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어찌 됐든, 만약에 황제가 이문회를 죽이고 이연정을 내쫓게 된다면, 황제의 심장은 얼음장처럼 차게 굳어버릴 것이다. 이 일로 황제는 완전히 생명력을 잃은 목각인형이 될 것이고, 황권이 더없이 우스워질 것이다.
아직 그에게 충성하는 신하들과 진남공 같은 귀족이 있긴 하지만, 전장에서 빛을 발하는 진남공을 조당으로 끌고 와서 정치전을 치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를 보살피기 위해 들어온 황후와 태자가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태자가 따뜻한 죽 한 그릇을 손에 쥐고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부황, 조금만 드셔주십시오. 벌써 이틀째 아무것도 드시지 않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제는 대답하지 않은 채 침상 위의 모기장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모기장 역시 처음에는 명황색이었는데, 다 낡아서 잿빛이 되어버렸구나. 하지만 그래도 새까맣게 탄 내 마음보다야 낫구나.
“부황, 아신(兒臣)이 이렇게 빕니다. 제발 한 모금이라도 드셔주세요.”
태자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간곡히 말했다.
그때 천윤제가 갑자기 뜬금없이 물었다.
“태자, 짐이 만약 지금 제위를 이어받으라고 한다면, 넌 어떻게 할 것이냐?”
화들짝 놀란 태자가 무릎을 꿇은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가 이마를 바닥에 세게 찧으면서 울부짖었다.
“부황, 그런 말씀은 하시면 안 됩니다. 아신에게는 그 말씀이 청천벽력과도 같습니다. 부황께서는 아직 한창이실 때이고, 만수무강하실 겁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을 또 하신다면, 아신이 이 자리에서 머리를 찧어 박아 죽겠습니다.”
말을 끝낸 태자가 엎드린 채로 아예 목놓아 울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