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장. 황제의 반격
다시 입을 굳게 닫은 황제의 표정이 복잡했다.
그는 꾀부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가족에게 꾀를 부리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조금 전 그가 태자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황제는 정말로 이문회를 처형하고 싶지 않았고, 이연정을 내쫓고 싶지 않았으며, 동창을 없애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태자의 반응은 조금 과해서, 연기를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천윤제가 선천적으로 매우 총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스무 해를 황제로 지내다 보니 사람 보는 눈도 길러졌다. 그 덕에 그는 한 사람이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연기를 하는 건지 거의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천윤제는 영설 공주를 가장 총애했다.
그렇다고 태자가 이런 모습을 보인 것에 실망하진 않았다. 태자가 적어도 자기보다는 지혜와 계략이 있고 제왕술이 있어서 신하들이 자길 대할 때처럼 대하진 못할 거라는 생각에 안심했다.
‘일찍 퇴위해서 태자에게 제위를 넘겨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그럼 대신들이 조당에서 뻔뻔하게 난리 치는 꼴을 더는 안 봐도 될 테니.’
낙심한 천윤제가 속으로 생각했다.
바로 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의 귀가 번쩍 뜨이고,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데다, 폐가 쪼그라들어서 숨쉬기도 힘들었다.
황제가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한참 동안 자신을 진정시킨 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여해가 이끄는 대군이 대녕 제국 안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인 게냐?”
‘마지막 결정의 순간이 드디어 와버린 건가.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지푸라기마저 끊기는구나.’
중년 환관이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으로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쿵쿵 소리가 날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하, 희보입니다. 희보입니다!
사륭 토사 사륭석이 근 삼만 병사를 이끌고 여씨 토사의 홍하부를 공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륭석이 자신을 토사로 책봉해달라는 청과 함께 사절단을 경성으로 보냈다고 하고, 자신의 의자 한 명을 경성으로 보내 글공부를 시키겠다고 합니다.
사륭석이 보낸 사절단과 그의 의자가 이미 경성으로 오는 길이라고 합니다.”
황제는 너무 흥분하여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중년 환관을 빤히 바라보았다.
요 며칠 전해지는 소식은 모두 나쁜 소식뿐이었고, 하루가 갈수록 더 나쁜 소식만 전해졌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좋은 소식이 들려온 것이냐?
황제가 기뻐하기도 전에, 중년 환관이 이어서 말했다.
“여여해가 홍하부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두 개로 나눈 후에도 그가 직접 이끄는 오만 대군은 북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륭 토사부 저홍엽 장군이 북풍관을 지키고 있던 터라 여여해와 그 대군이 그곳에 잠시 발이 묶였습니다. 저홍엽 장군이 이끄는 노병의 수가 사천 명에 불과한지라, 북풍관이 함락당할 위기에 처해있었는데, 영종오 대종사가 다 낫지 않은 몸으로 여여해를 향해 일격을 날리셨다고 합니다.
여여해는 생사불명의 상태이고, 서남 토사 연합군 전체가 퇴각했습니다.”
“뭐라?”
중년 환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제가 8도 음은 올라간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황제는 어디서 갑자기 힘이 솟은 건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백지처럼 창백하던 그의 얼굴에 불그스름한 혈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이 황제의 가슴을 들끓게 했다.
황제는 이 엄청난 희소식이 믿기지 않아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한 소식이더냐. 정말로 확실하냔 말이다.”
“확실하고말고요! 운남 어마사의 이옥당, 안륭 토사부의 저홍엽 장군, 광서 동창 진무사부에서 다 전서구를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각지의 사자도 급보를 알리려 팔백 리 길을 달려오고 있습니다.
이미 이틀 전에 일어난 일인데, 이 소식을 경성에 계신 폐하께 알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비둘기와 까마귀가 길 위에서 죽었는지 모릅니다.”
환관이 활짝 웃으면서 대답하자, 황제가 그제야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황제는 마치 선단이라도 먹은 사람처럼 완전히 멀쩡해져서는 단숨에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태자의 손에 있던 죽그릇을 뺏어와 두세 모금 만에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좋구나! 좋아! 참으로 좋은 소식이로구나! 대녕 제국에는 아직 충신이 있었다. 대녕 제국의 기둥이 아직 건재했구나!”
황제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짐이 어찌 포기하겠느냐. 그들은 충신이 아니라 짐의 은인이자 제국의 은인이다.”
황제가 맨발로 침상에서 내려와 남쪽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나 영백윤(寧伯允), 그대들에게 감사를 전하오.”
천윤제가 ‘짐’이라는 호칭도 빼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정중하게 감사를 전했다.
허리를 곧추세운 황제가 환관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영종오 대종사는 무사하시냐?”
황제의 심복 환관이 대답했다.
“동창과 저홍엽 장군이 보낸 밀서에 따르면, 영종오 대종사의 오른쪽 팔이 절단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팔을 이어붙이긴 했지만, 밥을 먹거나 젓가락질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검을 다시 쥐는 건 힘들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 대종사께서는 왼손으로만 검을 쥘 수 있으십니다.”
황제의 두 눈이 새빨개지더니, 다시 한번 남쪽을 향해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짐이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하겠습니까? 이번 생을 다하더라도 이 은혜를 다 갚진 못할 것입니다.”
“부황께서 옥체를 보존하시는 게 스승인 대종사에게 가장 큰 보답일 것입니다.”
황후가 태자의 말이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만약 태자가 대종사에게 작위를 주거나 물질적인 보상을 줘야 한다고 했다면, 황제는 태자에게 몹시 실망했을 것이다.
영종오라는 사람은 돈도, 명예도 필요 없는 사람이니까.
그가 염원하는 게 딱 하나 있다면, 제국이 다시 예전의 흥성을 되찾아 그가 마음 편히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이니까.
“문회는 어디쯤 왔느냐?”
황제가 물었다.
“지금 산동을 지나고 있다고 들었으니 이틀만 더 기다리시면 폐하께서 문회 현제(賢弟: 아우뻘 되는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심복 환관이 말했다.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운주야, 네가 짐이 문회와 가까이 지내는 걸 시기하던 때를 기억하느냐? 네가 문회를 몇 번 골탕 먹이고 싶어 했지만, 너도 심성이 착한 탓에 이렇다 할 만한 골탕도 못 먹였었지.”
황제의 심복인 환관은 중년의 나이임에도 황제의 말을 듣고 민망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폐하, 그만 놀리시지요. 소인이 멍청한 사람이라는 건 10년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소인이 총명하고 대단한 인물이었다면, 벌써 밖으로 나가서 폐하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었겠지요. 소인은 충성심만 있지, 능력은 없는 놈입니다. 폐하를 위해 한 몸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별다른 힘이 없어서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천윤제가 모처럼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도 네 말솜씨 하나는 인정해주마.”
이어서 황제가 명령했다.
“성지를 내리겠다. 이문회에게 경성으로 돌아오지 말고 곧바로 광서 동창으로 가서 잠시 임시 진무사 직을 맡으라고 하거라. 짐도 그가 몹시 보고 싶지만, 지금은 그가 광서로 가는 게 더 급선무일 게다.”
천윤제로서는 이문회의 죄명이 완전히 철회되지 않은 탓에 임시 진무사 직을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몇 개월만 더 지나면, 그 ‘임시’라는 두 글자도 깨끗이 지워버릴 것이다.
아직 사건을 정식으로 조사하지 않았으니, 이문회가 무죄라는 것도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황제가 곧바로 이런 식으로 이문회를 복직시킨 건 유래가 없기도 하고 격식에도 맞지 않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문무 집단이 자신을 사지로 내몬 게 먼저였는데, 황제가 되어서 이 정도 원칙을 안 지킨 게 뭔 대수일까!
황제가 평소에는 절대로 쓸 일 없는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짐은 줄곧 착하기만 한 무골호인(無骨好人)이었다. 짐이 얼마나 괴롭히기 쉬운 사람이었으면 짐을 이렇게까지 사지로 내몰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문회의 말이 맞다. 인의와 도덕만 지킨다고 해서 될 게 아니다. 가끔은 비바람도 불어줘야 하고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 폭풍도 일으켜 줘야지.”
쾅!
황제가 빈 그릇을 책상에 세게 내리치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광서에서 시작된 일이니 광서에서 끝을 봐야겠다. 광서 순무 낙문, 이번 일로 아주 싱글벙글했을 테지. 짐이 네놈부터 손봐주마. 동창을 시켜서 그놈을 조사하거라. 내각을 거칠 필요도 없이 그놈을 옥에 가두어라. 짐은 그놈이 패가망신하는 걸 봐야겠다.”
“명 받들겠나이다.”
심복 환관 운주가 대답하고는 곧장 나가서 밀지를 작성해왔다.
황제가 작성된 밀지를 확인한 뒤, 그 위로 붉은 인장을 찍었다.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천윤제는 성지를 내릴 땐 기본적으로 먼저 내각을 통과하고 다시 사례감을 거쳐서 하달했다. 웬만해선 지금처럼 황권의 힘으로 중지(中旨: 내각 등을 거치지 않고 황제가 바로 내리는 칙령)를 내리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 천윤제가 낙문을 잡기 위해 광서 동창에게 중지를 내렸으니, 황제가 이번 일로 얼마나 화가 단단히 났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그 잘난 대신들이 짐더러 혼군이라고 했지. 그럼 어디 한 번 짐이 혼군의 모습을 보여줘야겠구나. 낙문뿐만 아니라, 계동앙, 축무애도 죽은 목숨이다. 짐이 그놈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잡아야겠다!”
분노한 황제의 반격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여여해가 인사불성인 모습으로 여씨 부중으로 실려 들어갔을 때, 여씨 가문의 사람들은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여여룡은 삼만 정예병을 이끌고 밤낮없이 삼백 리 길을 재촉하여 사흘 만에 홍하성에 도착했다. 그는 홍하성에 있는 주둔병과 함께 성 안팎에서 사륭석을 협공하려고 했지만, 사륭석은 몇 시진 전에 이미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든 뒤 백석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몇 시진 뒤, 백석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여여해와 여여룡에게 전해졌다.
두 사람은 부아가 치밀어 올라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백석현에 있는 모든 금은보화가 약탈당하고 여자들이 사라졌다. 사륭석과 그의 병사들은 눈앞에 보이는 게 병사든 백성이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
눈이 뒤집힌 여여룡은 사륭석과 이만여 명 병사를 모조리 죽이겠다는 각오로 강행군에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쉬지 않고 백석현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여여룡이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인 건, 여여룡이 삼만 대군을 이끌고 백석현에 막 도착했을 때 사륭석은 또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어서 몇 번이고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사륭석이 이끄는 병사들은 빠르게 움직이면서 각 현과 주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한 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자리를 옮기며 여여룡의 대군을 따돌렸다.
사륭석은 적이 진격해 오면 아군은 퇴각하고, 적이 주둔하면 아군은 교란하며, 적이 피로해지면 아군은 공격하고, 적이 퇴각하면 아군이 쫓는다는 전술을 충실히 따랐다.
여여룡은 똥개훈련 당하다시피 사륭석에게 유인당하고 따돌림당하는 것을 반복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을 때, 사륭석의 병사들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서 삼만 정예병을 공격했다.
전투 시간은 짧았지만, 교전은 몹시 치열했다.
결과는 뻔했다.
원래 여여룡이 이끄는 정예병은 정예 중의 정예였지만, 며칠이나 이어지는 강행군에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상태였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독사 같은 만병들이 급습해 오자 정예병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한 번의 짧은 전투로 사천 명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여씨 가문 최정예 군단의 1할을 한 번에 잃게 되었으니, 여여룡의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가지 않겠는가.
여씨 쪽에는 오만 연합군이 있었지만, 이 막무가내인 사륭석과 만병 이만 명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이 만병들은 갑옷도 중무기도 없었다. 하지만 허허벌판과 야산을 맨발로 뛰어다니던 사람들인지라, 어딜 오가든 흔적도 남지 않았고,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의 뒤를 쫓기 힘들다고 해서 여씨 가문이 이들을 손 놓고 보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