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65화 (165/648)

165장. 빠져나갈 구멍

만병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곳곳을 돌며 약탈과 대살육을 이어갔다. 그들이 한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때마다 여씨 쪽 병사들의 사기는 완전히 떨어졌다.

하필 이때 여씨 가문의 정신적 지주인 여여해가 혼수상태인지라, 여씨 가문 사람들은 기댈 곳이 없었다.

여여해가 퇴각한 이후로, 성화 마녀 여완완으로 인해 치솟았던 명성도 차츰 사그라들었다.

문산성에 모여 있던 토사들은 성화 마녀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며 그녀를 찾아갔다. 성화 마녀야말로 성화교의 예언대로 불 속에서 부활한 성화신의 사자이니, 토사 연맹의 사기를 북돋고 이 국면을 만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때 성화 마녀는 여씨 토사의 영지에 없었다.

그녀가 누구를 만나야겠다며 떠난 이후로, 지금껏 아무도 성화 마녀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광서 환관 학원.

사흘 동안 이어진 만수절 기념 추가 시험이 끝났고, 내일부터 졸업 시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정이었다.

이 졸업 시험이야말로 두변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지금껏 두변이 환상적인 기적을 만들어 낸지라, 어떤 이들은 그가 졸업 시험에서 충분히 1등을 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원칙은 원칙이니, 두변은 꼭 졸업 시험 시작 전까지 환관 학원에 도착해야 했다.

“만수절 추가 시험이 끝났음을 정식으로 알리겠다. 세 번의 추가 시험에서 모두 1등을 한 당엄에게 가산점 30점을 주겠다.”

환관 학원의 벽에 홍방(紅榜: 시험 등에 합격한 사람을 발표하는 방榜)이 걸리고, 당엄의 이름 뒤에 30이라는 숫자가 적혔다.

환관 학원 졸업 시험의 특징은 시험 과정이 공개되며, 매 시험이 끝난 다음 날 아침에 점수가 홍방에 공고된다는 점이었다.

모든 게 공개되는 만큼 투명성은 보장되겠지만,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엄청난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당엄을 바라보았다.

경쟁이 이토록 잔인하다. 졸업 시험이 아직 시작하기도 전인데, 당엄은 벌써 다른 사람들보다 30점을 앞서나갔다.

학생들은 당엄이 모든 과목을 특출나게 잘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거의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을 실력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학생들은 당엄이 1등 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며, 그와 1등 자리를 두고 경쟁할 용기조차 생기지 않았다.

보통 광서 환관 학원 졸업 시험에선 세 명에서 다섯 명 정도가 동창에 들어가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한 명만 동창에 들어가게 되고 무려 총기관(總旗官)으로 임명된다. 엄당 세력은 당엄이 아예 출발선에서부터 철저히 이겼으면 하는 바람에 그야말로 이번 졸업 시험에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물론 이건 이문회가 이곳에 없고, 어만루는 시험 감독관 권한만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환관 학원 졸업 후 환관을 배치하는 권력은 거의 산장이 장악하고 있었다.

물론 이문회가 무죄가 되면서 곧 복권이 된다면, 제때 돌아와서 이 상황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문회가 이곳에 도착했을 땐, 아마 졸업 시험이 끝났을 것이다.

만수절 추가 시험은 무예, 시문, 연화단 등 총 3종이었는데, 당엄은 이 시험들에서 모두 1등을 차지했다.

가산점 발표가 끝난 뒤, 당엄은 우쭐해하지도 않고 무척 담담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번 졸업 시험에서 당엄은 자신이 독고구패(獨孤求敗: 홀로 외로이 패배를 구한다는 뜻으로,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절대 고수를 의미)일 것이며, 아무도 자신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어차피 두변은 최근 다른 일로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불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두변은 다른 일 때문에 졸업 시험을 준비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고, 졸업 시험 자체가 두 달 반이나 일찍 시작되었으니 승산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당엄은 자신과 겨룰 기회조차 없는 두변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두변의 또 다른 원수인 염세는 기쁜 마음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세 번의 추가 시험에서 그는 3등을 두 번, 2등을 한 번 했던 터라, 총 11점의 가산점을 얻었다.

염세 입장에서는 두변을 경쟁상대로 볼 가치도 없었고, 제 목표는 졸업 시험에서 최소 3등, 되도록이면 2등을 하는 것이었다.

졸업 후에 염세가 배치될 곳도 대강 정해졌다.

운남에서도 말을 키우는데 광서라고 못 키울 것 없다는 의견이 있었고, 엄당 내부에서 광서에 어마사를 설립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염세는 새로 설립한 광서 어마사의 초창기 인원이 될 것이니, 졸업 시험만 끝나면 앞길이 창창한 셈이었다.

이문회가 두변을 지키기 위해서 칼을 휘두르며 갖은 노력을 했지만, 이문회 본인도 곧 죽을 목숨이 아닌가! 의부의 보호가 사라진 두변은 이제 돌봐 줄 주인 잃은 상갓집 개만도 못한 신세구나!

왕굉 등은 여여해가 퇴각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염세는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러니 염세는 상갓집 개가 어딜 감히 자신의 경쟁상대가 되겠냐며 턱을 치켜들고 두변의 존재를 무시했다.

내일이면 바로 환관 학생들의 운명을 결정할 졸업 시험이 있는 날!

그때 두변은 이제 막 광서에 도착했고, 계림부까지 팔백 리의 길이 남아 있었다.

두변은 쉴 새 없이 말에 박차를 가하면서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 졸업 시험 직전에 환관 학원에 도착할 수 있겠지만,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졸업 시험에 참여해야 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사람은 광서 순무 낙문이리라.

여여해가 퇴각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그는 그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소식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한 뒤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감 속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황제가 이번에 칼을 갈고 자신에게 반격할 걸 알기에, 빠르게 냉정함을 되찾고 자신을 구제할 방법을 모색했다.

천윤제는 늘 대신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인자한 황제였다. 하지만 이번 문무 집단의 협공은 황제를 거의 사지로 내몰았고, 토사의 반역을 이용해 황제가 스스로의 팔을 자르도록 협박했다. 그런데 지금은 여여해가 퇴각했으니, 아무리 인자한 황제라고 해도 자신이 당한 것과 참았던 화를 되돌려 주려고 할 것이 아닌가.

낙문은 황제가 이번 사건의 신호탄이었던 자신을 가장 먼저 겨냥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도화선에 불을 지핀 것도, 총공격 신호를 내보낸 것도 낙문이었으니, 황제가 그를 먼저 손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낙문은 자신이 죽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천윤제 즉위 이래 대신을 처형한 적은 전례가 없었다.

대녕 제국는 다른 지구의 명조(明朝)대와 달랐다. 이 세계에서는 관직이 어느 정도 이상이 되었을 때, 처형당해 죽지 않는 금패가 생긴다.

낙문은 한 성의 순무이자 봉강대리(封疆大吏: 지방 수석 장관)로서, 아무리 죄명이 커도 기껏해야 삼천 리 밖으로 유배 가는 수준이었다.

이건 대녕 제국의 철칙이기도 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건 다른 지구의 중국처럼 아주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중한 죄를 지어도 사형에 처하지 않는 것과 같아서, 어쩌면 지배 계급을 지키기 위한 묵약 같은 것이었다.

낙문은 죽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지만 유배를 가는 것도 싫고, 지금 손에 쥔 권력을 놓기도 싫었다.

그는 좌천당해도 좋으니 옆 나라에 가서 주재 대신을 해도 좋다고 생각했고, 그것도 안 된다면 자진 사직해서 고향으로 내려가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 구양담처럼 한 학원의 산장으로 남아 명예와 존엄을 지키며 여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게다가 문관과 무장 집단의 학원과 도장은 제국 편제에서 벗어나면서도 권력이 대단했기에 황제가 간섭할 수는 없었다.

낙문은 눈알을 굴리며 자구책을 찾았다.

황제의 윤허를 거쳐야 하니 좌천이나 옆 나라에 가서 주재 대신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단 하나, 황제가 성지를 내리기도 전에 자진 사직하는 것이었다.

낙문은 자진 사직을 하고 빠르게 고향으로 내려가 고향에 있는 악해 서원에 가서 산장을 해야겠다고 결정했다. 비록 한 성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은 잃게 되지만, 권문세가의 유망주들을 양성할 수 있고, 훗날 황제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서생들과 권문세가를 선동하는 정도의 힘은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마음을 결정한 낙문은 빠르게 상주서를 휘갈겨 썼다.

그는 상주서에서 황제에게 매우 실망했으며, 엄당을 가까이하는 건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현명한 대신들을 멀리하는 어리석은 짓이라며 질타했다. 가노가 법도를 지키지 않는 것을 포용하는 황제의 행동은 만천하 사람들을 실망하게 했다며, 이문회가 저지른 중죄를 눈감아주는 건 혼군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그는 황제에게 몹시 실망하여 제국의 미래에 기대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여생을 마감하겠다고 적었다.

자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황제의 뺨을 올려치겠다는 기세였다.

어차피 사직했으니 황제의 뺨을 올려치는 것만큼 자신의 강직하고 제국에 대한 충성을 드러내는 행동이 있을까. 이 사직서가 만천하에 알려진다면, 비록 낙문이 순무 직을 잃었지만 사림의 인정을 받을 수 있고, 문관 집단에서 영웅처럼 떠받들어질 것이다.

낙문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황제가 낙문을 조사하고 그를 체포한다면, 문관 집단은 황제가 속이 좁고 사사로이 보복하는 사람이라며 대녕 제국의 먹이 닳도록 황제를 욕할 것이다.

중국 명조 시대의 관리들뿐만 아니라 대녕 제국의 관리들도 허수아비에 불과한 황제의 얼굴을 후려치는 걸 좋아했다.

명조 시기에는 전문적으로 정장(廷杖: 황제의 명에 의해 조정에서 신하를 곤장 치는 일)의 수를 속이는 대신도 있었는데, 대녕 제국에서는 정장을 맞을 필요도 없었다.

마음을 결정한 후 낙문은 자기 평생의 글솜씨를 상주서에 쏟았고, 황제의 얼굴을 앞뒤 좌우로 거침없이 때렸다.

“천윤, 요놈아. 내가 내 손으로 사직서를 내겠다는데, 네가 날 어찌할 수 있겠느냐? 문관 집단 전체가 나를 보호하고 있는데, 어떻게 나를 건드리겠어. 내가 아주 맛깔나게 황제를 욕해서, 사림의 영웅이 되겠노라.”

자신의 글솜씨에 심취한 낙문이 흥에 취해 혼잣말을 하고 있는 바로 그때!

얼굴이 사색이 된 시종 한 명이 밖에서 뛰어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대인, 큰일 났습니다! 동창에서 대인 댁을 조사하라고 사람을 보냈답니다!”

황제의 지의(旨意)가 도착하기도 전이었지만, 이문회가 직접 키워낸 광서 동창 사람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있을까.

게다가 이문회가 문산루를 공격했을 때 찾아낸 장부에 모든 증거가 명확하게 남아 있었다.

광서 순무 낙문이 광서에 있는 3년 동안, 그가 빼돌린 은자가 무려 오십 만 냥이 넘었다.

오주 동창 천호 종정, 염주 동창 천호 무천추, 진무사 신임 천호 허광창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한 결과, 황제의 지의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낙문의 집을 조사하자고 결정했다.

황제의 지의가 도착할 무렵엔, 낙문의 집에 숨겨진 장물과 금은이 이미 옮겨질지 모르고, 낙문이 먼저 자진해서 사직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빠르게 움직이기로 했다. 봉강대리급의 인물이 황제의 지의보다 먼저 자진 사직하게 된다면,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세 명의 천호는 낙문이 빠져나갈 구멍을 막기 위해서 천하의 대죄를 무릅쓸 각오로 낙문의 저택을 조사하기로 했다.

황제의 지의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렇게 섣불리 움직이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동창에서 봉강대리의 집을 황제의 지의 없이 수색한다는 건 거의 벌집을 쑤시는 격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누구인가. 이문회의 손에서 단련된 수하들은 이문회만큼 결단력 있게, 모든 걸 자기네가 책임질 각오고, 일당백의 기세로 일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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