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장. 금산은해
무천추가 동창 무사 오백 명을 이끌고 낙문의 별원 앞에 도착하자, 문을 지키던 군관이 화들짝 놀랐다.
“네 이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감히 들이닥치는 것이냐.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냐!”
낙문의 아들인 낙 공자가 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검을 쥔 채 등장한 그가 동창 천호 무천추를 향해 삿대질하면서 외쳤다.
“웬 놈이냐. 감히 내 아버지의 저택에 쳐들어오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이로구나. 여봐라, 저놈들의 사지를 분질러버려라.”
낙문의 본처는 고향에 있고, 그가 순무 직에 오르면서 함께 이곳에 오게 된 부인은 여(如) 부인으로, 북명검파 두령의 여식이었다.
여 부인은 바깥의 소란을 듣고 무장한 가복 백여 명을 이끌고 무천추 등과 대치했다.
“이곳은 순무 대인의 저택이다. 동창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냐. 문 입구에 있는 이 돌사자를 넘어서는 순간, 네놈들은 다 죽은 목숨이라는 걸 알아라.
우리 북명검파에서 동창 놈들을 죽인 게 한둘이겠느냐. 네놈들이 모시는 그 대단하다던 이문회가 곧 우리 집 노야의 손에 죽게 될 텐데, 뭘 믿고 이리 설치는 게냐!”
역시 순무 대인의 가족들다웠다. 아들과 부인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자, 백여 명의 무장한 가복들이 여 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무천추 등을 노려보았다.
이들은 정말로 동창 무사들을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 순무 대인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의 기세로 그들에게 맞섰다.
대녕 제국는 다른 지구의 명조 시대가 아닌지라, 문관이 무도 집단과 힘을 합칠 땐 세상 무서울 게 없었다.
광서 동창 천호 세 명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미 벌이기로 한 일이니, 책임질 일이 있으면 떠맡으면 그만이지!
세 사람은 이 일로 아무리 큰 책임이 따른다 하여도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늘 반드시 낙문의 집을 샅샅이 조사하고, 그의 집에 숨겨진 장물과 뇌물을 만천하에 공개해서 그의 죄명을 확정해야 했다.
그 누구의 명령도 없이 천호 세 명이서 순무의 저택을 조사하는 건 엄청난 뒷감당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황제의 지의도 없이 낙문의 집을 조사했다가, 만에 하나 장물이나 뇌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세 사람은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문지기의 말이 맞았다. 천호 세 명이서 순무의 저택을 조사한다는 건,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와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죽을 각오로 주인인 이문회를 위해 복수하고자 했다.
뒷감당이 죽음일지언정, 세 사람은 낙문의 퇴로를 완전히 없앨 마음이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낙문은 증거를 인멸한 뒤에 사직서를 내고 사지 멀쩡하게 대녕 제국에서 살아갈 테니까.
세 사람이 결심한 듯 대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천호 허광창이 이를 악물고 명령을 내렸다.
“저택을 수색하라. 조사를 막는 자는 모두 죽여라.”
동창 무사 오백 명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기고 화살을 쏘았다.
불과 일각 후.
여 부인이 이끌고 나온 무장 가복 백여 명이 모조리 목숨을 잃었다.
몇백 명의 동창 무사가 굶주린 호랑이처럼 저택 안으로 휘몰아쳤고, 닥치는 대로 물건을 뒤졌다. 그들은 앞을 막는 자라면 누구든 죽이면서 길을 텄다.
“황제가 말하노니, 이문회를 임시 광서 동창 진무사 직에 임명하고, 즉시 광서로 돌아가 문관, 무장의 부패를 조사하라.”
젊은 환관 하나가 조서를 큰소리로 읽었다.
이 환관은 황제의 심복 환관인 운주의 의자 운봉이었다. 황제의 지의가 떨어지기 무섭게 운봉은 직접 말을 몰아 이문회에게 왔다. 그는 팔십 리에 한 번 말을 바꿔 타면서 꼬박 열 시진을 쉬지 않고 구백 리 길을 달려 최단 시간에 이 희소식을 이문회에게 전했다.
운봉의 허벅지 안쪽은 이미 살이 짓눌려 피가 나기 시작했다. 말에서 내린 뒤 제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은 채 황제의 지의를 꿋꿋이 전달했다.
“신, 명 받들겠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이문회가 무릎을 꿇고 황제의 지의를 받들었다.
이문회는 거의 황제와 비슷한 시간에 여여해가 퇴각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문회와 영설 공주는 당시 그 어떤 말로도 가슴에 밀려오는 감격과 감사의 마음을 형용할 수 없었다.
그들 마음속에 벅차오르는 감격스러움과 감사함은 결국 한마디가 되었다.
“하늘이 대녕 제국을 보우하는구나.”
영설 공주가 말했다.
“신 이문회, 대녕 제국을 위해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안남 왕국에서 결전을 준비하는 진남공 송결 등과 의부를 위해 몇천 리 길을 달려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는 두변, 그리고 달걀로 돌을 치는 격으로 여여해의 앞을 막았던 저홍엽 장군, 아직 몸이 회복되지도 않았지만 죽을 각오로 일격을 가한 영종오, 동창 무사를 이끌고 낙문의 저택을 급습한 종정, 무천추까지.
다들 몇천 리 떨어져 있음에도 한마음 한뜻으로 대녕 제국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었다. 이런 게 바로 진정한 지동도합(志同道合: 뜻이 같으면 지향하는 바가 같다.)이 아닐까.
이 사람들은 이문회를 구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제국과 황제를 위해 불길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피를 토할 정도로 모든 것을 쏟아냈다.
이들의 관직과 신분은 모두 다르지만, 대녕 제국의 마지막 기둥이자 희망이라는 건 확실했다.
이문회는 온몸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고, 감격스러움에 피가 끓었다. 그는 이 길을 걷는 게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는 감개무량함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대녕 제국이 차츰 망해가고 있다는 건 피부로 와닿는 사실이었지만, 아직 대녕 제국을 지킬 호걸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 충성스러운 영웅들이 존재하게 된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천윤제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황제가 아니며, 용맹하고 결단력이 넘치는 황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백성을 아끼고 자애로우며, 늘 성실하고 검소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그 덕에 아직도 그를 위해 한 몸 바쳐 충성하는 신하들이 끊이지 않았다.
전지 환관 운봉이 말했다.
“폐하께서 따로 추신으로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짐도 벗을 몹시 보고 싶으나, 광서로 가는 게 더욱 급선무이다. 이건 짐의 장손의 태모(胎毛: 배냇머리)로 만든 태모 붓이다. 황후가 직접 만든 것인데, 이걸 벗에게 선물하고자 한다. 앞으로 그대는 이 붓을 볼 때마다 짐과 황후를 떠올려 주게.
이상입니다.”
운봉이 황제의 장손 태모 붓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든 뒤 이문회에게 건넸다.
이문회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높이 들고 태모 붓을 받으면서, 끝내 참아왔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신, 폐하와 제국을 위해 죽을 때까지 충성하겠습니다.”
이문회가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큰절을 올렸다.
그는 이 말 외엔 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황제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내지 못할 듯했다.
영설 공주가 이문회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운봉이 이문회를 향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조카 운봉, 숙부를 뵙습니다. 의부께서 숙부께 안부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의부께서 숙부를 무척 그리워하신다고, 나중에 경성에 오게 된다면 꼭 거하게 회포를 풀자고요.”
이문회가 운봉을 부축해서 일으킨 뒤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반갑구나. 경성으로 돌아간 뒤에 네 의부에게 내 안부도 전해 다오. 건강 유의하고, 생각은 적게 하고, 음식은 많이 드시라고 말이다. 무공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고 해도, 꼭 하루도 거르지 말고 신체 단련을 해야 한다고 잔소리도 전해주거라.”
“예, 알겠습니다.”
운봉이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이문회가 영설 공주를 향해 말했다.
“공주 전하, 신은 이만 남하하여 광서로 돌아가겠습니다.”
영설 공주가 말했다.
“광서까지 데려다주겠네.”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그들이 이제 더는 저를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저를 죽이고 싶다고 해도, 이도진 같은 종사급 무도인이 나서는 게 아니라면 죽이지도 못합니다. 공주 전하께서는 군대를 만드는 중요한 임무가 있으시니,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됩니다.”
“알겠네. 그럼 내가 시위 백 명을 함께 보내겠네. 그리고 이 대인, 두변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주게. 그가 해준 모든 것이 고맙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이문회의 얼굴에는 두변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대견함이 묻어났다.
이번에 여여해를 퇴각하게 만든 가장 큰 공신은 두변이었지만, 그의 공헌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또 뵙겠습니다. 공주 전하.”
이문회가 예를 올렸다.
“이 대인도 몸조심하고.”
영설 공주가 이문회를 눈으로 배웅했다.
이문회가 먼저 말 위로 몸을 날리고 말머리를 돌려 곧장 광서를 향해 질주했다.
그의 뒤로 영설 공주의 시위 백여 명이 이문회를 호위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광서 순무 낙문은 출신이 가난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뼈를 깎는 노력으로 글공부를 하여 어린 나이에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다. 게다가 그는 오십이 채 되기도 전에 한 성의 순무가 되었다.
그는 봉강대리로 지낸 지 몇 년 됐지만, 어렸을 적의 가난과 배고픔을 완전히 잊지 못했는지 남모를 괴벽이 있었다.
낙문은 종이로 된 은표를 좋아하지 않고, 무게감이 느껴지고 빛이 나는 금덩이와 은덩이를 좋아했다.
비록 특별히 돈 쓸 곳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별일 없으면 꼭 금자와 은자를 한가득 쌓아놓고 과거의 배고팠던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낙문은 눈치껏 관리 생활을 한 터라, 웬만해선 수하가 주는 뇌물을 받지도, 나서서 돈을 챙기지도 않았다.
그가 가진 모든 재물은 대부분 불법 해상 무역을 통해서, 여씨 가문의 분배를 통해서, 일부 무도 문파가 바치는 전답을 통해서 축적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금산은해이며, 사사로운 뇌물을 받지 않는 대신 대녕 제국의 뿌리를 갉아 먹는 것이 아닌가.
수년 이래 쌓아온 재산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많은지, 그 자신도 잘 모를 정도였다.
하여튼 많았다.
낙문이 별원의 지하 밀실에 숨겨둔 은괴와 황금을 다 더하면 천문학적인 금액에 달할 것이다.
그가 일과 중 가장 행복해하는 시간이 바로 금자와 은자 더미 중간에 앉아서 소년 시절 가난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었다.
그의 이런 버릇을 아는 사람은 무척이나 적었다.
낙문은 알고 있었을까. 이 버릇이 아주 치명적인 결점이 될 것이라는 걸.
웬만해선 관리의 저택에 금은을 숨기는 건 아주 안전한 일이었다.
대녕 제국을 통틀어 봤을 때,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고위 관리는 없었다. 그런 것 치고 낙문의 명성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가 아랫사람이 바치는 뇌물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설령 낙문의 재산을 조사하고 싶다고 해도, 봉강대리인 그를 건드리려면 내각 어르신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광서 동창 천호 몇 명이 겁도 없이 순무의 저택을 조사하는 미친 짓을 벌인 것이다. 황제의 지의가 도착하기도 전에 몇백 명의 무사를 이끌고 다짜고짜 그의 저택에 쳐들어갈 줄 누가 알았을까!
몇백 명의 동창 무사들은 낙문의 저택을 핏빛으로 물들이면서, 결국 삼 척 깊이의 땅을 파내어 그의 비밀창고를 발견했다.
비밀창고에서 꺼내온 금은보화를 바라보고 있자니, 무천추, 종정, 허광창 세 사람은 입을 떡하고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낙문이 숨긴 은자가 대략 40~50만 냥이 정도일 것이라 추측했지만, 실제 액수는 그들의 예상을 배로 뛰어넘었다. 게다가 그것도 은자와 금자뿐이었다.
백만 냥에 가까운 은자와 황금이 눈앞에 놓인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순무 자리에 오른 지 5년도 채 되지 않은 데다 평판도 좋은 관리가 백만 냥이 넘는 현물 재산이 있다니. 게다가 이 금액에는 그가 가진 점포나 전답, 저택 따위는 포함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