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67화 (167/648)

167장. 양심도 없는

정말 양심도 없지 않은가!

폐하께서 속옷을 기워 입을 정도로 가난한 이유가, 진남공이 해적질을 해서까지 군비를 마련해야 하는 이유가 다 여기 있었구나!

금자 은자가 죄다 이런 사람들 손에 숨겨져 있었구나!

동창의 세 천호는 이를 부득 갈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비밀창고의 존재가 까발려지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콧구멍이 보일 정도로 턱을 치켜들고 있던 순무 여 부인과 낙 공자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광서 동창 천호 세 명은 아예 백만 냥 금자 은자를 낙문의 대문 앞에 와르르 쏟아냈다. 그리고 몇백 명의 동창 무사들이 이 금산 은산을 겹겹이 포위해서 지키게 했고, 목청 큰 몇 사람을 뽑아서 소리치게 했다.

“이리 와서 구경해보시오. 광서 순무 낙문이 여태 빼돌린 백성들의 피눈물이오. 어서 와서 구경하시오!”

무수히 많은 백성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고, 번쩍이는 금산 은산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범한 백성들이 어디 이렇게 많은 금은보화를 본 적이 있던가!

그들은 낙문이 꽤 괜찮은 순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더러운 탐관오리일 줄이야!

격분한 백성들이 낙문의 저택을 에워쌌고, 일부는 순무 관아로 몰려갔다.

백성들의 원성은 거센 불길이 되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심취해서는 상주서를 쓰고 있던 낙문은 동창 무사들이 저택에 들이닥쳤다는 가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부아가 치밀어오른 그가 냅다 붓을 집어던졌다.

‘당당한 봉강대리의 저택을 황제의 지의도 없이 수색해? 이 동창 개새끼들이 미친 거냐?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들이로구나!’

하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려움이 그의 분노를 잠식시켰다. 만에 하나 동창 무사들이 땅속에 숨겨둔 비밀창고를 찾아낸다면, 그 누구도 그를 구해줄 수 없었다.

낙문은 순무 관아의 몇백 명 관졸을 이끌고 자신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그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동창 무사들이 자신의 집을 조사하게 둘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관아의 관졸로는 동창 무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는 필요하다면 동창 무사들을 모조리 죽일 생각으로 계림에 있는 축무애의 저택으로 가서 그에게서 병사들을 빌려왔다.

축무애는 전 광서 총병관인지라, 지금은 물러났더라도 그의 저택에는 정예 병사가 무려 오백여 명이나 있었다.

축무애 수하의 오백여 명이라면 동창 무사들과 맞서 싸우기 충분했다.

축무애는 낙문의 말을 듣고는 두말없이 그에게 병사들을 빌려줬다. 동창이 그 누구의 명령도 없이 순무의 저택을 조사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낙문이 이끄는 관졸과 병사들이 그의 저택에 도착하기도 전에, 동창 무사들은 벌써 낙문의 금산 은산을 대문 앞에 내놓았다.

동창 무사들은 마치 낙문의 저택 땅속에 이 많은 금산 은산이 숨겨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너무나 빠르게 비밀창고를 찾아냈다.

백만 냥 은자가 저택 대문 앞에 쌓이고, 수많은 백성이 자신의 저택을 둘러싼 채 삿대질과 욕지거리를 하는 것을 보는 순간, 낙문은 자신이 완전히 끝장났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알아서 하시오.”

축무애가 이 광경을 보더니 오백여 명 병사를 이끌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축무애도 제 코가 석 자인지라, 빠르게 손을 털 수밖에!

거리에 멍하니 서 있던 낙문은 하늘과 땅이 핑핑 도는 느낌이었다. 늪에 빠진 것처럼 몸이 점점 더 아래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지하 십팔 층까지 떨어져서 지옥에 갈 것만 같았다.

이젠 아무도 그를 구해낼 수 없다. 내각의 어르신이 나선대도, 염라대왕이 그의 뒷배라고 해도 그를 구할 수는 없었다.

낙문도 여여해가 퇴각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정말 재빨리 반응한 편이었다. 하지만 동창이 황제의 지의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를 줄 누가 알았을까. 설마 저들이 자신의 금산 은산을 공공연하게 사람들에게 전시할 줄 누가 알았을까.

미친놈들! 미친놈들!

이문회도, 그의 수하도 전부 다 미친놈들이었다.

이제 그는 끝장이었다.

해가 뜨기까지 아직 세 시간이 남은 무렵, 두변은 야생마를 타고 쉴 새 없이 질주했다.

계림부까지 아직 이백 리가 남아 있었고, 졸업 시험 시작까지 약 네 시간이 남아 있었다.

천만다행히도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졸업 시험에 제때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이때, 어디선가 나는 매혹적인 향이 두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두변이 눈을 한 번 깜빡이자, 텅 비어있던 관도(官道) 위에 절세미인 하나가 나타났다. 멀리서 보아도 폭발적인 몸매를 가진 여인이 서 있자, 두변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귀, 귀신을 본 건가? 여천천은 분명히 죽었는데, 어째서 내 눈앞에 있는 거지?’

착각인 건진 모르겠지만, 두변은 안 그래도 무거워 보이던 여천천의 가슴이 훨씬 더 풍만해 보인다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두변은 갑자기 나타난 이 여인이 여천천과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단순히 이 여인의 가슴 굴곡이 여천천보다 더욱 화끈해서는 아니었다. 이 여인은 여천천과 눈빛이 달랐고, 기질도 달랐다.

여천천은 누굴 보든 아주 노골적인 오만함을 숨기지 않았는데, 이 여인의 눈빛에는 신비로움과 냉랭함이 공존했다.

여천천의 몸매가 직관적으로 굴곡진 몸매라면, 이 여인의 몸매는 뭔가 다르게 마력에 가까운 매력이 있었다.

여천천이 사람을 볼 때 난 너를 무시한다, 내가 너를 죽이겠다, 식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났지만, 이 여인은 사람을 사람 보는 것처럼 보지 않았다.

생김새만 따지자면 여천천과 거의 똑같다고 할 수 있지만, 여천천보다는 좀 더 아름다웠고 영설 공주와 거의 동급에 가까웠다.

그래서 두변은 이 여인이 여천천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 여인이 바로 사륭석이 말한 성화 마녀라는 걸 눈치챘고, 재단에서 부활했다는 것은 하나의 음모에 불과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관도 위에 갑자기 나타난 여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두변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두변의 야생마도 앞발을 들면서 제자리에 급히 멈춰서더니, 말굽을 땅에 박은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저 여인이 뭘 하려는 거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나타난 거야?’

두변이 의아한 얼굴로 여인을 바라보았지만, 여인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두변을 몇 분 동안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두변이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 여인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두변의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마치 조금 전 자신이 본 게 환각인 것만 같았다. 그도 아니라면 귀신을 본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두변은 자신이 본 게 환각이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그 여인이 나타나는 순간, 정신력 깊은 곳에서 치명적인 위험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여인은 나타날 때부터 초자연적인 기운을 내뿜었다.

하지만 너무나 시간이 촉박했다.

그는 더는 그 여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광서 환관 학원을 향해 박차를 가했다.

세 시간 뒤면 졸업 시험이 시작될 것인데, 아직 학원까지 이백 리 길이 남아 있었다.

야생마가 정말 기진맥진한 상태임을 알지만, 두변은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달렸다.

광서 환관 학원.

다섯 명의 시험 감독관이 하늘을 향해 제사를 지내며 졸업 시험의 공정함을 맹세했다.

환관의 졸업 시험이 제국을 위해 인재를 뽑는 일인 만큼, 몹시 엄중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제사를 마친 감독관들은 학생들과 함께 황제를 향해 큰절을 올린 뒤, 역대 엄당 선조를 향해 절을 하고, 환관 학원 설립을 위해 큰 공헌을 한 선열에게까지 절을 올렸다.

이문회의 스승이자, 이번 시험의 감독관인 어만루는 시험 시작까지 반 시진이 남은 시점인데도 두변이 모습을 보이지 않아 몹시 불안했다.

첫날 치러지는 시험은 무도만큼 중요한 국학이었고, 총점이 150점이나 되었다.

신성하게 치러지는 졸업 시험인지라, 만에 하나 시험에 늦는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은 졸업 시험에 참가할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광서 환관 학원의 새로운 산장인 왕굉이 마지막 연설을 했고, 그의 연설이 끝난 뒤에는 졸업 시험에 참가하는 모든 학생이 시험장에 들어가게 된다.

“오늘 너희가 졸업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건, 엄당 선배들의 분투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부디 오늘 같은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해 시험에 임하도록 하여라.

오늘은 너희가 엄당의 일원으로 맞이하는 가장 신성한 날이 될 것이다. 엄당이라는 이름이 썩 좋게 들리진 않겠지만, 합심하여 하나의 독립된 당파가 되고, 제국의 문무 집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엄청난 영광임을 명심하라.

하나의 당파가 쇠하지 않고 역사를 이어갈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인재다. 졸업 시험은 엄당에서 인재를 뽑는 유일한 행사이고, 모두에게 가장 공평한 기회를 주는 시험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렇게 신성한 시험에 뒤늦게 찾아와,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폐하께 절을 하지 않고, 역대 엄당 선열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지 않는 건 본분을 잊었다는 뜻이다.”

왕굉이 누군가를 의식하는 듯한 말을 한 뒤, 학생들을 한번 쓱 둘러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부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학생들이 최선을 다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기 바란다. 그 길만이 폐하를 위해, 제국을 위해 충성을 다할 수 있는 길이다. 지금부터 모든 시험생은 시험장 안으로 입장한다. 반 시진 뒤에도 시험장에 도착하지 못한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의 응시 자격을 박탈하겠다.”

왕굉은 어떤 면에서 이문회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는 번지르르한 겉치레 말 대신, 직설적인 화법을 좋아했다. 하긴 이는 많은 대환관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물론 사례감의 환관은 제외하고.

왕굉의 연설이 끝나자, 몇백 명 학생들이 차례로 시험장 안으로 입장했다.

두변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걸 봐도 당엄은 개의치 않고 그저 웃기만 했지만, 염세는 낄낄대며 말했다.

“이문회 대인의 의자가 이번 시험에서 꼴찌를 면하지 못할 테니, 아예 시험을 포기하려나 보군.”

염세 주위에 있던 학생 몇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사실 염세와 그의 동료들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람이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두변이 아직도 나타나지 않은 걸 보고는 그가 시험을 포기하고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두변이 그동안 환관 학원에서의 만년 꼴등이었으니, 아무리 몇 개월 동안 분발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5년 동안 착실히 쌓아온 내공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게다가 졸업 시험이 갑작스럽게 두 달 반이나 일찍 치러지게 되었으니, 두변에게는 반년도 아닌, 딱 석 달 동안의 시간밖에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두변이 신선의 점지를 받았다고 해도, 그가 꼴찌를 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두변과 염세가 내기를 했다는 건 이미 다 알려져 있었다. 두변이 아무리 발악해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고 해도, 염세보다 1점만 낮아도 변소나 치우는 하등 잡역 환관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두변이 이런 터무니 없는 내기에 응했다는 게 마냥 우스웠다.

게다가 만수절 추가 시험을 통해 염세는 총 11점의 가산점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사람들은 두변이 절대로 염세를 이기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염세도 이기지 못하는 두변이 당엄과 겨룰 일은 더더욱 없었다.

당엄의 성적은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팔방미인인 데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아무도 두변이 당엄과 경쟁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두변이 감히 당엄을 한 번 쳐다보는 것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변이 이번 졸업 시험에 불참하는 것은 당연지사이고, 옳은 일이라고 여겼다.

학생들은 그저 두변이 몇 개월간 사라졌다는 것만 알지, 그간 두변이 어떤 기적들을 만들어 냈는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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