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장. 발 씻은 물
다시 일각의 시간이 지났다.
아직 시험장 입장 마감 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왕굉이 말했다.
“아직도 시험장에 입장하지 않은 학생이 있다니, 정말 황당하고 어이가 없군. 두변이 이 시험을 신성하게 여기긴 하는 건지 모르겠군.
이건 엄당을 멸시하고 폐하를 멸시하는 행동이니, 당장 두변의 책상을 치워버리거라.”
엄당 무사 두 명이 두변의 책상과 의자를 시험장 밖으로 끌어냈다.
감독관 어만루가 말했다.
“왕 산장, 아직 3각이나 남았는데, 그 정도 시간도 못 기다려주는 건가?”
어만루도 속으로는 화가 났다.
졸업 시험이 어린아이 장난도 아닌데, 아직까지 시험장에 오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너를 돕고 싶다고 한들, 이렇게 건방진 모습을 보이면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왕굉이 말했다.
“어르신들, 두변이 이렇게 건방지게 시험을 무시하는데, 그의 책상과 의자를 시험장 밖으로 치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세 명의 감독관들이 왕굉의 행동에 대해 동의하였고, 어만루와 다른 한 명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3대 2의 찬반이니, 시험장 밖으로 옮겨진 두변의 책상은 다시 시험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바로 그때, 격렬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두변이 야생마를 탄 채로 급히 환관 학원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는 말을 멈춰 세우기도 전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다시피 내려와서는 시험장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학생 두변, 졸업 시험에 출석합니다.”
아무리 체력이 무적인 야생마라고 하더라도, 며칠 동안 몇천 리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터라 체력이 완전히 고갈되었다.
말에서 굴러떨어지다시피 내려온 두변의 몰골도 차마 봐주기 힘들 정도였다.
몇 날 며칠의 질주로 예쁘장하던 얼굴이 수척해지고, 살이 족히 십 근 넘게 빠진 듯했다. 피부는 푸석푸석했고, 두 다리가 덜덜 떨려서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들어했으며, 두 눈이 깊이 파여서는 새빨갛게 충혈된 것이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는 열흘 넘는 시간 동안 왕복 팔천 리를 달리면서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을 자지 못했다. 오는 길에 지쳐 쓰러지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을 한 두변은 시험은커녕 시험장 안까지 들어가기도 힘들어 보였다.
오늘의 시험인 국학은 총 세 문제로 구성되어 있고, 시험이 장장 열 시진 동안 치러진다. 국학은 매 문제를 심혈을 기울여서 답해야 할 정도로 고난이도이며, 정신을 바짝 차린 상태로 시험을 치른다고 해도 맥이 빠지는 과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두변 같은 몰골로 시험을 치른다면, 시험을 치르다가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그가 국학에서 높은 점수를 얻기는커녕, 붓을 제대로 쥐고 문장 하나라도 제대로 쓸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국학 시험 시작까지 2각이 남아 있으니, 그의 시험 참가 자격을 박탈할 수는 없었다.
왕굉이 말했다.
“두변 네가 이 신성한 시험에 예의를 보이지 않은 탓에 책상과 의자를 시험장 밖으로 옮겨버렸다. 이왕 옮긴 거, 두변은 그대로 차양 밖에서 시험을 보도록 해라.”
왕굉이 내린 벌이 지나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왕굉이 아닌 다른 엄격한 산장이었다고 해도, 왕굉과 똑같은 벌을 내렸을 것이다.
이문회가 산장이었다면, 시험 시작까지 2각의 시간을 남겨둔 채 허둥지둥 시험장에 도착하고, 하늘과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은 죄로 그를 시험장에서 내쫓았을 것이다.
왕굉은 두변이 눈엣가시이기는 했지만, 그를 완전히 시험장에서 내쫓을 정도로 고의로 골탕 먹일 생각은 없었다. 그럴 가치가 뭐가 있을까.
하지만 두변이 시험장 밖에서 시험을 치르게 된다면, 지붕과 벽이 없는 탓에 뜨거운 뙤약볕 바로 밑에서 사람이 타 죽을 수도 있었다. 혹은 이런 상황에서 비라도 오게 된다면, 시험지가 비에 젖어 무효가 될 것이다.
졸업 시험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조용히 시험장 안에 앉아서 시험이 시작되길 기다렸고, 두변도 그늘막 하나 없는 책상에 앉아서 시험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학생들은 두변을 원숭이 보듯이 비웃음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두변이 믿기지 않는 기적을 이뤄낸 건 맞지만, 이곳의 학생들이 그걸 알 길이 없었다.
염세도 두변이 영설 공주 송별연에서 얼마나 대단한 시문을 지었는지, 여천천과의 경마 시합에서 어떻게 이겼는지 알지 못했다.
이문회와 영설 공주 등을 제외하고는 두변이 진평을 대신해서 과거 원시에 참여해서 장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가 사륭석을 설득해서 여씨 토사를 공격하게 만든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학생들이 기억하는 두변은 몇 개월 전에 3대 학부 대회에서 활약하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졸업 시험은 칠현금을 켜는 것도 아니오, 서예를 쓰거나 시문을 짓는 것도 아닌데, 네가 아무리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다 해도 무슨 소용 있겠어?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해도, 그 재능은 여기서는 똥덩어리라고!
모든 사람이 국학 시험이 시작되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때, 염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두변, 참 똑똑해 그치? 그렇게 불쌍한 꼴을 하고 나타나면, 나중에 졸업 시험에서 꼴등을 하게 되더라도 사람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해줄 것 같아서 그 꼴로 나타난 거 아냐?
내가 질문 하나만 하자. 너랑 내가 졸업 시험 성적을 두고 걸었던 내기는 유효하냐? 졸업 시험에서 점수가 더 낮은 사람이 변소나 치우는 하등 잡역 환관이 되는 거 말이야.”
두변이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유효하지.”
“이야, 배짱 좋네. 예전에 내가 네놈의 발을 씻게 했었지? 국학 시험이 끝나고 나서, 네 성적이 내 성적보다 낮으면 사람들 앞에서 내 발을 씻겨주는 건 어때?”
염세가 비아냥대면서 물었다.
왕굉과 환관 학원의 학생들은 이문회가 복직했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 이문회는 이미 쓰러진 나무요, 두변은 주인 없는 상갓집 개일 뿐이었다.
감독관 어만루가 미간을 찌푸리고 왕굉에게 말했다.
“왕굉, 이게 학생들의 수준이오?”
왕굉이 어만루의 눈치를 보면서 두 사람을 제지하려던 찰나, 두변이 염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좋지. 국학 시험에서 내가 지면, 내가 네 발을 씻겨주마. 그렇지만 만약 내가 이긴다 해도, 네가 내 발을 씻겨줄 필요는 없다. 대신, 내 발을 씻은 물을 네 몸에 버리는 건 어때?”
“쯧. 정말 황당하군.”
화가 난 어만루가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신성한 졸업 시험에서 저런 저급한 내기를 하다니, 참으로 실망스럽구나!’
안 그래도 지각한 것 때문에 두변에 대한 인상이 안 좋던 어만루는 더 기분이 안 좋아졌고, 이문회의 의자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청년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사실 어만루는 현대 지구에서 흔히 말하는 꼰대 중의 꼰대일 뿐이라서 학생들의 내기에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졸업 시험이 엄숙한 건 맞지만, 조정의 과거 시험만큼은 아니었다. 졸업 시험에서 학생들이 성적을 가지고 내기를 하는 경우야 늘 비일비재했고, 감독관이 그것까지 간섭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약속하지. 국학 시험에서 내 성적이 더 좋다면, 너는 내 발을 씻겨줘야 하고, 내 발을 씻은 물을 네 얼굴에 버리겠다.”
염세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좋다. 나도 약속하지.”
두변이 대꾸했다.
“정숙하지 못할까!”
왕굉이 참다 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엄은 졸업 시험에서 이런 저급한 내기나 하고 있는 두변이 그저 한심해 보였다.
저런 사람이 무슨 엄당의 차기 후계자가 되겠냐며 황당해하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반 시진 뒤,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댕!
종소리가 울리고, 왕굉이 시험의 시작을 알렸다.
“광서 환관 학원 졸업 시험 첫 번째 과목, 국학 시험을 시작한다.”
다섯 명의 시험관이 꼼꼼하게 봉인해 두었던 국학 시험지를 꺼내 학생들에게 빠르게 나눠줬다.
두변의 운명을 결정지을, 세상 사람들에게 또 한 번 놀라움을 선사할 시간이 다가왔다.
두변은 시험지를 펼쳤다.
국학 시험은 총 세 문제로, 첫 번째 문제는 책론(策論), 두 번째 문제는 팔고문(八股文), 세 번째 문제는 시문이고, 총점 150점이었다.
여기서 비중이 가장 높은 문제는 첫 번째 문제로, 배점이 무려 70점이나 되었다. 이는 지금까지의 졸업 시험과는 사뭇 다르고, 오히려 과거 향시와 비슷한 점수 배분이었다.
책론의 주제를 본 두변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독고구패의 싸움을 하라는 건가? 운이 좋아도 너무 좋잖아!’
이런 운이 우연이기도 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연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엄당은 역시나 엄당이었다. 책론의 주제는 황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즉 ‘제왕의 정치와 제왕의 마음’에 대해 논하라는 것.
두변은 꿈속 세계에 들어갈 필요도 없이 어떻게 써야 할지 알았다.
명조 시대 만력 26년에 조병충(趙秉忠)이라는 천재가 과거 시험에 나타났다. 전시를 참가할 때 그의 나이는 불과 스물다섯이었지만, 오직 이 책론 하나만으로 일갑 장원이 되었다.
스물다섯에 과거 시험 장원이라니, 조병충은 당백호보다도 대단한 인물이라 할 만했다. 공교롭게도 과거 지구에서 조병충이 이 책론을 써냈을 때가 지금과 비슷한 17세기였다.
문장 수준만 따진다면 조병충이 써낸 전국 1등의 책론 문장은 당백호가 과거 시험 때 써냈던 시문보다도 훨씬 수준이 높았다.
환관 학원의 졸업 시험에서 조병충의 문장을 쓰려니, 왠지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기분이었다.
당엄이 아무리 광동 향시 해원이라고 해도, 조병충의 문장 앞에서는 먼지 한 톨보다도 못한 존재가 될 것이다.
계림부.
낙문이 숨겨두었던 백만 냥의 금괴와 은괴가 공개적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의 인생은 이제 완전히 끝장이 났고 삼천 리 밖으로 유배된다는 사실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
광서 동창 천호 세 명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구든 황제의 지의 없이 순무를 체포하는 건, 제국을 겨냥한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황제의 지의 없이 집을 조사한 것도 이미 하늘을 거스른 크나큰 모험이지만, 그래도 관아를 턴 게 아니라 개인 저택을 턴 것이라서 제국의 존엄과 연관될 일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광서 순무를 체포하는 건 제국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고, 동창 천호 주제에 봉강대리를 체포한다는 건 반역죄에 해당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낙문을 잡지 않고 이대로 놔둔다면, 그는 분명히 도주할 것이 아닌가.
번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종정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지금 순무 관아 앞에서 난동을 부리는 자들이 있다는군. 순무 대인이 위태로운 상황이니, 우린 동창의 일원으로서 조정의 대신을 지킬 의무가 있지 않겠소.”
무천추가 눈을 반짝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당장 동창 무사를 이끌고 순무 낙문 대인을 보호하러 갑시다.”
이어서 세 사람이 할 일은 무척 간단했다. 몇백 명의 동창 무사를 이끌고 순무 관아로 가서 낙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그곳에 감금시키는 것이었다. 그 뒤엔 황제의 지의가 계림부에 도착하기까지 기다리다가, 지의를 받자마자 낙문을 체포하면 그만이었다.
동창 천호 허광창이 동창 무사들을 이끌고 빠르게 순무 관아로 향했다.
‘어서 가서 광서 순무 낙문을 체포해…… 아니지, 보호해야지!’
하지만 허광창이 동창 무사들과 광서 순무 관아에 도착했을 때, 낙문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이런 빌어먹을. 그 늙은 여우가 벌써 도망쳤다니.’
격노한 허광창 등은 동창 무사들을 계림부 전체에 파견해서 낙문을 찾게 했다.
특히 낙문이 서남 여씨 토사로 도망칠 가능성이 높은 터라, 동창 무사들은 계림부 밖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검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당당한 순무 대인은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그 어디에서도 머리카락 하나 찾아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