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69화 (169/648)

169장. 두변의 압승

성화 마녀 여완완은 두변을 한 번 만난 뒤, 빠르게 여씨 토사 문산성으로 돌아왔다.

이곳에 모인 토사들은 허둥대며 불안해했고, 여씨 가문의 자제들도 겉으론 평온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토사들 못지않게 불안해했다.

사륭석의 이만여 병사가 홍하부 주위를 폐허로 만들고 있었고, 여씨 가문의 군대가 그들을 뒤쫓고 있지만 단 한 번의 승전보도 들려오지 않았다.

만약 사륭석이 계속해서 홍하부를 짓밟고 다닌다면, 여씨 가문의 손해는 눈덩이 불어나듯 더욱 커질 것이다.

여완완이 잠시 여여해의 곁을 지킨 뒤, 성화교군 삼천을 이끌고 사륭석의 만병을 토벌하러 홍하부로 향했다.

그녀는 비장하게 떠났을 뿐, 아무런 호언장담도 남기지 않았다.

광서 환관 학원 졸업 시험장.

두변은 책론의 주제를 보고 무척 자신이 있었지만,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꿈속 세계로 들어가서, 조병충의 <제왕의 정치와 제왕의 마음을 묻다> 답안을 찾아냈다.

두변은 꿈속 세계에서 한 글자도 빠짐없이 몇 번을 외운 뒤에야 다시 눈을 떴다.

답안을 작성하기 시작한 두변의 붓은 마치 신들린 듯이 막힘이 없었다.

그는 조길(趙佶: 북송 황제 휘종의 이름)의 얇은 수금체(瘦金體: 자획을 가늘고 길게 뽑아 날렵하면서도 우아하며 가냘픈 것이 특징)를 써서 답안을 작성했고, 몇 글자만 교묘하게 고쳐서 천 자에 달하는 문장을 거침없이 척척 써냈다.

그는 단숨에 반 시진도 채 되기도 전에 장원이 써낸 최고 수준의 책론을 그대로 베껴 버렸……, 아니 작성했다.

책론을 쓰는 건 현대 지구에서 논문을 쓰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목차부터 시작해서 진절머리 날 정도로 주제를 이해하며 문장을 써야 하고, 한 문단에 최소 두 시진은 써야 글다운 글이 나온다.

다른 학생들이 한창 끙끙대면서 글을 구상하고 있을 때, 두변은 벌써 붓을 내려놓았다.

과거 향시에 비하면, 환관 학원 졸업 시험의 국학 과목 시험시간은 무척 짧은 편이었다. 이 때문에라도 환관 학원 졸업 시험에서 나온 문장이 향시의 답안보다 못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광동 향시 해원인 당엄이 졸업 시험에 참가한 터라, 감독관들은 그의 답안을 몹시 기대하는 중이었다.

책론 문제의 답안을 다 작성한 뒤, 두변은 두 번째 문제로 시선을 옮겼다.

두 번째 문제는 사서(四書)에 관한 것이었다.

‘참으로 인에 뜻을 둔다면 악한 짓을 하지 않는다.’

(子曰, 苟志於仁矣, 無惡也. - 논어)

조금 전에 몇몇 학생들이 조용히 환호한 것을 보면, 자신들이 아는 내용이 나와서 기뻐하는 소리일 것이다.

일부 학생들이 자기가 아는 내용이 나와서 반갑다고 기뻐하는 반면,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도리어 미간을 찌푸렸다.

이 문제는 하도 많이 출제된 만큼, 정말 닳고 닳은 사서 문제였다.

두변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이런 문제로 고득점을 어떻게 하라고. 출제자도 참.’

짧은 시간 안에 이 닳고 닳은 문제로 좋은 답안을 내놓으라는 건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두변에게는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명조 시대의 과거 시험 때 분명히 이 문제가 출제되었을 것이며, 한 번만 출제된 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두변은 다시 한번 정신술을 이용해 꿈속 세계로 들어갔다.

사실 이 시점에 ‘꿈’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표현일 것이다. 정신력이 크게 향상된 뒤로 두변은 꿈속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유자재로 깊은 명상에 빠진다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할 것이다.

두변의 눈앞에 무척 익숙한 장면이 나타났다. 방대한 양의 서적과 과거 시험 답안이 거대한 도서관처럼 질서정연하게 책장에 꽂혀 있었다.

시대 배경이 비슷하다 보니, 두변은 곧장 17세기 명조 시대의 과거 시험 답안을 찾아 나섰다.

‘역시 흔해 빠진 문제로군. 저번에 진평을 대신해서 원시를 볼 때는 답안이 없어서 울고만 싶었는데, 지금은 꿈속 세계에서 반 시진 만에 원하는 답안을 찾아냈네.’

두변이 미소 띤 얼굴로 원하는 답안을 척척 찾아냈다.

그는 찾아낸 답안을 펼쳐놓고 어떤 걸 선택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덕제(正德帝) 시기의 내각 수보였던 이동양(李東陽)이 향시 때 썼던 답안을 쓸까, 아니면 가정제(嘉靖帝) 시기의 수보 대신이었던 양정하(楊廷河)가 원시 때 써낸 답안을 쓸까?’

답안을 좀 더 뒤져보니, 뒤에는 명 희종(熹宗)의 스승인 손승종(孫承宗)이 전시 때 차석을 하게 된 답안도 있었다.

답안을 뒤지면 뒤질수록 더 대단한 인물들의 답안이 나오니, 몇백 년 치를 뒤져도 한 장조차 안 나오는 까다로운 문제에 비해 답안 찾기는 훨씬 수월했다.

이렇게 흔한 문제로 우열을 가리긴 힘들겠지만, 그건 보통 평범한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이동양, 손승종, 양정하 등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들이었다. 그들이 써내는 문장이라면, 아무리 흔한 주제여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입이 떡 벌어지고 손뼉을 치면서 쾌재를 외치게 한다.

이런 사람들의 답안을 환관 학원 졸업 시험에 쓰게 된다면 그 누구든 압살해버릴 수 있다. 당엄이 우수한 학생인 건 맞지만, 이렇게 대단하신 분들 앞에서는 공손하게 무릎을 꿇어야 할 것 아닌가!

잠시 고민한 두변은 손승종의 답안을 골랐다. 몇몇 답안 중에서 손승종의 답안이 수정할 구석이 많지 않았고, 문체가 가독성이 좋고 호방하여 시험 감독관의 입맛에 맞을 것 같아서였다.

팔고문은 책론에 비해 글자수가 비교적 적어서 보통 천 자도 되지 않는다.

두변은 다시 붓을 들고 얇은 수금체로 막힘없이 답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학생은 답안을 작성하기 전에 초고를 작성하지만, 두변은 초고의 ‘초’자도 고민할 필요 없었다.

그의 붓이 종이에 닿기 시작했다 하면 문장을 다 쓸 때까지 붓이 멈추는 법이 없었다. 화려하고 날카로운 문장들이 파도처럼 종이 위로 몰아쳤다.

명 희종의 스승이자, 전시의 차석 출신인 손승종의 문장은 휘몰아치는 강물처럼 시원시원한지라, 백 번을 외운 뒤에 답안을 옮겨적는 두변도 마음이 트이고 기분이 유쾌하여 빠르게 답안을 작성할 수 있었다.

우르릉, 쾅쾅!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낮은 천둥소리가 울리고, 이내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두변은 움찔했다.

‘운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은 거 아니야? 아까까지만 해도 해가 쨍쨍했는데 갑자기 비가 온다고?’

시험이 시작된 지 한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았고, 앞으로 시험이 끝나기까지 다섯 시진이나 남았다.

시험장 안에 있는 학생들은 차양이 있으니 비가 오든 말든 상관없지만, 밖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는 두변에게는 치명적인 날씨였다.

아무리 엄청난 문장을 써낸다고 해도, 비가 오면 완전히 끝장난다. 빗물에 흠뻑 젖는 순간, 글자가 살아남겠는가!

두변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먹구름이 생각보다 빨리 모이고 있었고, 천둥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빠르면 일각 뒤부터 비가 내릴 것이고, 일각이 지날 때까지 답안을 완성하지 못하면 그의 운명은 여기서 완전히 끝이 난다.

두변은 서둘러 세 번째 문제를 확인했다.

세 번째 문제는 시문 문제였다.

문제를 확인한 두변은 생각보다 수준 높은 문제에 살짝 놀랐다.

세 번째 문제는 ‘영결무정유(永結無情遊: 주고받은 정 없어도 맺은 인연 영원하다.)’를 주제로 시를 한 수 지으라는 문제였다.

국학 시험에서 출제한 것 중에 이 문제가 가장 수준 높았고 난도도 있는 편이었다.

조금 전 일부 학생들이 낙담하며 한숨을 쉰 이유가 바로 이 문제 때문이리라.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 번째 시문 문제에 분배된 점수는 그리 높지 않았다.

국학 시험의 점수 분배는 책론 70점, 팔고문 50점, 시문 30점이었다. 이전까지의 졸업 시험에서는 시문이 20점이었는데 이번 시험에선 30점인 이유는 시험 출제자가 시문 부분에서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했다.

이런 주제로 문장이나 책론을 쓰는 건 쉬울 수 있지만, 시를 짓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두변에게 또 한 번 빛을 발할 절호의 기회였다.

이 주제로 작시를 하라는 문제가 특이하긴 했지만, 다른 지구에서 시선(詩仙) 이백이 <월화독작(月下獨酌)>라는 제목의 시를 기가 막히게 썼었다.

맞다. 당대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중국 문화에서 시의 신이라 불리는 그 이백 말이다.

두변은 꿈속 세계에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이백의 시라면, 골백번도 더 외웠으니 말이다.

두변은 깊이 심호흡을 한 뒤, 가장 화려한 서체를 사용하여 짧디짧은 3분 만에 이백의 시 일부를 답안에 써냈다.

이 시가 엄청나게 유명한 시는 아니었지만, 이백의 시이니 그 수준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시선 이백이 시를 발로 써도 대녕 제국의 모든 시인을 압살할 것이고, 환관 학생들은 당연히 언급할 필요도 없다.

두변의 <월하독작> 시는 핵폭탄급 걸작으로 인정받을 것이고, 이곳에 있는 모든 학생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둘 것이다.

쿠르릉, 쾅쾅.

하늘에 모인 먹구름이 점점 더 짙어지는 걸 보니, 금방 소나기가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두변이 답안을 제출하기 전에 소나기가 쏟아진다면, 두변의 답안이 아무리 핵폭탄급이라고 해도 무용지물이었다.

학생들이 고소하다는 눈빛으로 두변을 슬쩍슬쩍 쳐다보았다.

광서 환관 학원 산장 왕굉이 말했다.

“두변, 곧 비가 올 테니 모든 학생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거라. 시험관 어르신들께도 사죄의 의미로 절을 올린 뒤에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라.”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답안 제출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시험이 시작된 지 이제 막 한 시진이 지날 시점인지라, 대부분의 학생은 아직 첫 문제의 답안도 다 써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일부 학생들은 문장 구성을 생각하느라 아직 붓을 들지도 못했는데 두변이 그 사이에 세 문제를 모두 쓰고 답안지를 제출한다고?

하지만 학생들이 이내 그러려니 하면서 두변을 비웃었다.

‘질 것 같아서 아예 기권하는 거 아냐?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던데, 붓을 쥘 힘이나 있겠어? 게다가 마지막 문제는 너무 어려워서 아마 손댈 엄두도 못 냈겠지. 그냥 대충 몇 글자 적어서 내든 백지를 내든, 저놈이 꼴찌라는 결과는 변함이 없을 테니까.’

학생들은 두변이 자기가 질 걸 뻔히 알면서도 염세와 그런 내기를 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누가 알까. 두변이 한 시진 만에 써낸 답안지는 환관 학원 졸업 시험뿐만 아니라, 향시에, 심지어 전시에 내놓아도 모두를 압살할 수준이라는 걸.

명조 만력 연간 전시 장원인 조병충의 책론, 명 희종의 스승이자 전시 차석인 손승종의 팔고문, 시선이라 불리는 이백의 시.

듣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사람들의 걸작을 누가 이길 수 있을까.

환관 학원 학생들이 작성한 답안에서 가장 특출난 부분만 모아서 한 편의 책론을 만들어 낸다고 해도 조병충의 책론 한 줄만도 못할 것이다.

두변이 가져온 걸작들로 인해서 이번 국학 시험은 경쟁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 되었다.

환관 한 명이 답안 봉투를 들고 와서 두변의 답안을 봉투 안에 넣은 뒤 밀봉하였다.

밀봉된 답안은 다섯 명의 감독관 앞에 놓였다.

이 다섯 명은 이번 시험의 감독관이자 채점자들이었다. 다섯 명 중 세 명이 사례감 출신이었고, 내정에 오래 있다 보니 국학 소양이 진사 출신의 문관과도 비슷했다.

두변은 그들이 자신의 답안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몹시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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