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장. 흔해 빠진 문제
과연, 두변이 답안을 제출한 뒤, 먹구름이 10분도 안 되어 하늘을 시꺼멓게 뒤덮었다.
쿠르릉, 쾅쾅.
천둥 번개가 맹렬하게 내리치더니, 하늘을 쩍 가른 듯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시험장 안에 있던 학생들은 오히려 작은 소리로 환호했다.
학생들이 환호한 까닭은 오늘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고, 뜨거운 뙤약볕이 그대로 차양 위로 내리쬔지라 학생들은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후끈한 열기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폭염에 갑자기 찾아온 소나기는 주변 공기를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다.
시원한 공기에 기분이 좋아진 학생들이 두변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들은 갑작스레 찾아온 소나기가 무척 반가웠지만, 두변에게는 치명적인 날씨였을 것이다. 학생들은 두변이 소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험을 포기하고 일찍 답안을 제출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다른 곳에 한눈팔지 않고 자신의 답지 위를 묵묵히 채워가고 있던 당엄은 소나기가 오는 걸 보고 갑자기 붓을 내려놓았다. 그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은 뒤, 눈을 지그시 감고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소나기는 당엄의 예상대로 빠르게 지나갔다. 갑자기 쏟아지던 폭우가 일각 만에 빗줄기가 줄어들더니, 다시 일각 정도가 지나서는 비가 아예 그쳤다.
소나기가 온 뒤로는 태양이 먹구름 뒤에 가려져 기온이 조금 전보다 훨씬 쾌적했다.
학생들은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시험에 집중했다.
비가 그친 뒤, 당엄이 눈을 떴다. 그리고는 붓을 쥔 손을 멈추지 않고 단숨에 책론 답안을 작성했다.
당엄은 시험이 시작된 지 한 시진 만에 일천 자에 달하는 책론을 써냈다.
어리석은 사람을 크게 각성시키고, 마디마디가 묵직한 한 방이구나!
자신이 쓴 책론이 몹시 마음에 들었던 당엄은 벅차오르는 감정에 잠시 젖어있었다.
그는 매번 자신이 써낸 글이 마음에 들 때, 맨정신임에도 술을 한 잔 마신 것처럼 흥이 올랐고, 행복감에 푹 젖곤 했다.
당엄은 이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스스로가 너무도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이번 졸업 시험에서 그는 누군가를 이기려는 게 아니었다. 경쟁상대가 될 만한 자가 아무도 없는지라, 그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셈이었다.
고수가 운집한 광동 향시에서도 장원 자리를 꿰찬 자신이니, 이 시험쯤은 식은 죽 먹기 아니겠는가.
당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옮겨 다음 문제를 확인하더니, 잠시 흠칫 놀랐다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미 본 적 있는 문제 아닌가!
당엄이 광동 향시에 참가하기 전, 스승이 그에게 조언했었다.
“천재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문제는 까다롭고 수준 높은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풀어봤을 흔해 빠진 문제이다. 누구나 모범 답안을 아는 문제이다 보니, 천재들이 특출난 재능을 보여주기 힘들기 때문이지.”
스승의 조언을 들은 당엄은 몇십 개의 흔해 빠진 문제들을 모아서 수십 번이고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그가 풀었던 많고 많은 팔고문 중에 사서 문제는 빠지지 않았고, 오늘 시험의 두 번째 문제인 ‘참으로 인에 뜻을 둔다면 악한 짓을 하지 않는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 문제를 열흘 동안 고민하고, 각종 서적을 열람한 뒤에야 만족스러운 답을 써낼 수 있었다.
당시 당엄이 완성된 답안을 스승에게 제출했을 때, 그의 스승은 손뼉을 치면서 향시에서 이 문제가 나오면 장원은 필시 당엄의 것이라며 극찬했다.
물론 당엄이 참여했던 향시에서는 이 문제가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엄이 향시 해원이 됐지만, 그는 이 문제가 향시 문제로 나왔다면 더욱 자신의 명성을 떨쳤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그런데 웬걸. 향시에서 쓰지 못했던 그 답안을 졸업 시험에서 쓰게 되다니!
당엄은 이 문제가 무척이나 반갑기까지 했다.
반가움도 잠시, 당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서 썼던 그 팔고문을 고작 학원 졸업 시험에 쓰자니, 모기 보고 칼 뽑는 수준이라서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시험 감독관들이 시시하기만 한 다른 학생들의 답안을 보다가 자신의 답안을 보게 된다면, 처음으로 빛을 얻은 사람들처럼 황홀해하지 않겠는가!
당엄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예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반 시진 만에 팔고문을 써냈다.
이어서 세 번째 문제를 확인한 당엄은 흠칫 놀랐다.
‘영결무정유.’
당엄의 구미를 당기는 수준 높은 주제이긴 했지만, 이 주제로 책론을 쓰는 게 아니라 시를 쓰라는 말에 놀랐다.
당엄은 눈을 지그시 감고 고뇌에 빠졌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을 때, 당엄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영감이 떠올랐다.
당엄은 그 영감을 놓치지 않고 곧장 붓을 들고 거침없이 시를 써 내려갔다. 당엄이 완전히 붓을 내려놓았을 땐, 시험시간이 세 시진이나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쓴 답안을 반 시진 동안 꼼꼼히 확인했고, 더는 빈틈이나 수정할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여유 있는 모습으로 답안을 제출했다.
당엄이 답안을 제출하겠다고 하자, 모든 학생들이 선망의 시선을 보내왔다.
같은 시각. 염세는 두 번째 팔고문을 어떻게 답할지 구상하고 있었다.
구상을 끝낸 염세는 흡족한 표정으로 천천히 붓을 들었다.
그는 애초에 당엄을 경쟁상대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당엄은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질투조차 할 수 없는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염세는 이번 시험에서 3등 안에 드는 게 목표였다.
그리고 한 시진 만에 답안을 제출한 두변을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시험을 포기해버린 사람과 대결을 해봤자, 자기 체면만 깎이는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내기는 내기이니, 예정대로 두변에게 발 씻은 물을 뿌리겠지만, 그를 이겼다고 해서 성취감 따위를 느끼진 못할 듯했다.
해가 질 무렵, 광서 환관 학원 졸업 시험의 첫 번째 국학 시험이 끝났다.
학생들의 모든 답안이 이름을 가린 채 꼼꼼하게 밀봉되었고, 앉은 자리로 사람을 추측하지 못하도록 순서까지 무작위로 섞은 뒤에 시험관 앞으로 보내졌다.
국학 시험은 사례감 출신인 문직 환관 세 명 위주로 채점이 진행된다.
다섯 명의 어르신들이 답안지를 한 부씩 꺼내 진지하게 채점했지만, 답안을 넘기면 넘길수록 한숨만 나와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특히 주요 채점을 맡은 세 명의 사례감 출신 시험관은 죽을 맛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어린 환관 학원 학생들이니 수준이 높아봤자 얼마나 높겠냐는 마음으로 채점에 임했지만, 기대에도 못 미치는 답안에 실망스러운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학생들의 국학 수준은 수재(秀才)만도 못했다.
이들의 문장은 눈에 안 들어오는 수준이 아니라, 평범함 그 이하였다. 심지어 도대체 어디서 뭘 보고 온 건지 써내는 말들이 모두 비슷했고, 책에 적힌 구절만 그대로 답습해서 천편일률이었다.
시험관들은 처음에는 그래도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지하게 채점에 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답안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져서는, 한 장당 열 줄 이상을 읽지도 않고 채점을 했다. 그것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결국 오늘은 과거 시험을 보는 게 아니라 환관 학원의 졸업 시험을 보는 것이니, 기대가 높아서도, 채점 기준이 너무 높아서도 안 된다고 시험관들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시험관들은 학생들이 졸업은 할 수 있도록 애써 합격점에 가까운 점수를 줬고, 열 개의 답안 중 두어 줄 읽을 만한 문장이 있는 것에 만족했다.
시험관들이 흐린 눈을 하고 기계처럼 답안을 넘기며 채점하던 도중, 한 시험관이 눈을 반짝이며 답안을 고쳐들었다.
글씨체부터 남달랐던 답안은 내용까지도 남달랐다.
시험관은 미녀 선발 대회에서 계속 외모가 평범한 수준의 미인들만 심사하다가 갑자기 100점 만점에 90점에 달하는 슈퍼 미녀를 본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두피가 저릿해 오는 짜릿함과 후련함이 더할 나위가 없구나!
그는 책론 문제를 빠르게 읽은 뒤, 팔고문을 감상하며 읽었고, 시를 한 글자씩 음미하면서 읽었다.
“이런 시험에서 이 정도 수준 높은 문장을 읽게 되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군. 마치 사흘 동안 물 한 방울 못 마시다가, 시원한 냉수를 단숨에 들이켠 기분이야. 여러분도 어서 이 답안을 봐보시오. 이런 문장은 환관 학원의 졸업 시험이 아니라, 향시에 내놓아도 장원급제할 문장이오.”
말을 마친 시험관이 답안에 채점 점수를 적었다.
그는 이 답안에 책론 67점, 팔고문 48점, 시문 25점 등, 총 140점을 주었다.
정말 놀라운 점수였다.
국학 시험에서 만점을 받는 건 기본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장이 길어지다 보면 어떻게든 허점이 생기기 마련이니 점수가 깎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답안이 차례로 다른 시험관의 손에 넘겨졌다.
시험관들은 모두 그 답안을 보고 감탄했으며, 특히 사례감 출신의 세 명은 그 답안을 당장 향시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며 극찬했다. 그리고 향시 수준이 낮은 지역에다 이 답안을 가져다주면서 이 사람을 해원으로 발표하라고 할 정도이며, 절강성처럼 좀처럼 인재가 나지 않는 지역에서는 거인도 충분히 노려볼 만하다고 소리높였다.
“이 답안을 작성한 학생이 바로 재능이 출중한 해원 당엄이겠군.”
한 시험관이 조용히 말했다.
왕굉이 옆에서 답안을 슬쩍 보더니, 당엄의 글씨체를 알아보고는 속으로 히쭉 웃었다.
‘역시 당엄이군. 한 번도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지. 이번 졸업 시험에서 당엄이 군계일학이겠어.’
다른 시험관들도 당엄의 답안에 채점을 했고, 그의 최종 점수는 140점이었다.
140점은 역대 졸업 시험의 국학 시험 최고점을 넘어도 한참 넘은 말도 안 되는 점수였다.
동시에 대다수 학생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점수이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 채점하던 백 개 넘는 답안 중 대부분은 70점도 채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엄과 그나마 가장 가까운 2등의 점수는 110점이었다. 사실 그 답안도 특출나게 좋은 건 아니었지만, 기본기가 탄탄해서 점수를 깎을 구석을 많이 찾지 못해서였다.
부산장인 낭정은 답안지를 채점할 자격은 없지만, 옆에서 같이 답안을 볼 수는 있었다. 그는 110점짜리 답안을 슬쩍 보더니, 그 답안이 자신의 의자인 염세의 것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비록 당엄의 점수와 30점이나 차이 나지만, 낭정은 염세가 2등이라는 것이 매우 자랑스러웠다.
낭정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생각했다.
‘두변 그 자식은 시험을 제대로 볼 정신도 없었겠지. 한 시진 만에 답안을 제출하는 미친놈이 어딨어? 그놈의 답안은 볼 가치도 없겠군.’
“쯧. 만찬이 벌써 끝나버렸군. 나머지는 다 그저 그런 요리만 남았겠지.”
사례감 출신의 시험관이 탄식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다른 시험관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당엄의 답안이 지나간 뒤, 시험관들은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무료해하면서 꾸역꾸역 채점을 이어갔다.
시험관들은 답안을 넘기면 넘길수록 한숨이 절로 나왔으며, 안색이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심지어 몇몇 시험관은 이런 답안을 채점하고자 여기에 있는 거냐며 화가 나기 시작했고, 이윽고 무표정한 얼굴로 답안을 휙휙 넘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졸업 시험이 과거 시험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떠올리며 최대한 후하게 점수를 주었다.
그런데 이때, 사례감 출신의 시험관이 갑자기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헉 소리를 냈다.
채점이 너무도 지루한 탓에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던 그는 갑자기 고농도 흥분제를 맞은 사람처럼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가 쥐고 있는 답안지 위에는 그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갈한 글씨체가 쓰여 있었다. 내용은 차치하고 글씨체에 혼이 빼앗겨버린 시험관은 그 글씨체를 향해 경배를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