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74화 (174/648)

174장. 너무 쉬운 거 아냐?

한 시진 반 후.

새로운 산술 문제가 완성되었고, 수십 명의 소환관이 빠른 속도로 문제를 베껴 쓰면서 230장의 새로운 시험지를 만들었다.

정확히 두 시진 후, 230장의 새로운 시험지가 왕굉의 손에 들어왔다.

어만루가 말했다.

“완전히 새로운 시험지이니, 이걸 빼돌렸다고 할 사람은 없겠지. 나조차도 구경조차 못한 시험지일세. 이제 공정한가?”

왕굉이 민망한 웃음을 보이면서 예, 하고 대답했다.

땡!

예정되었던 시간보다 한 시진 늦게 종소리가 울렸고, 환관 학원 졸업 시험의 두 번째 과목인 산술 시험이 시작되었다.

사례감 출신 대환관 어르신들은 문제를 다시 낸다는 것이 화가 나서 최초의 시험 문제보다 훨씬 더 어렵게 문제를 냈다.

물론, 어렵다는 건 다른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지, 두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시험지를 받고 문제를 확인한 두변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쉬워도 너무 쉬운 거 아니야? 눈 감고도 만점 받겠는데?

광서 순무 낙문은 광서성에서 갑자기 증발해버린 사람처럼 어디에서도 그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광주 양광(两廣: 광서와 광동) 총독부 안.

대녕 제국의 문관 거물 중 하나이자, 장차 내각에 들어갈 양광 총독 고정(高廷)이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낙문은 자기 집이 털렸다는 걸 확인하고는 한 시도 지체하지 않고 도망을 선택했다. 그는 동창 천호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여씨 영토로 피신하지 않고, 광주부로 피신했다.

보통의 경우엔 총독과 순무는 한 배를 탈 수 없는, 관계가 좋을 수 없는 사이다.

낙문과 고정도 겉으로 보았을 땐 평범한 총독과 순무의 관계였고, 웬만해서는 왕래가 없었다.

고정은 해상 무역, 동남 해역, 그리고 광동, 해남의 군사 방역을 관리하는 게 주요 직무인지라, 가끔 낙문과 충돌이 있기 마련이었다. 낙문도 고정이 광서 행정에 과도하게 개입한다며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사이가 서먹한 것을 연기할 뿐이지, 실제로는 아주 복잡한 이익 관계가 얽혀있는 각별한 사이였다.

광서에서는 매년 몇백만 냥 규모의 무역을 하는데, 그중 대략 3분의 1을 배후에서 통제하는 이가 고정이었다.

또한 고정은 양광 총독일 뿐만 아니라 대녕 제국의 백작이기도 했다.

대녕 제국에서의 작위는 조상에게서 대대로 세습되거나 군공을 세움으로써 작위를 받곤 했고, 문관이 작위를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이 고정의 경우엔 공교롭게도 훈귀 가문 자제인지라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후작 자리를 자신의 동생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과거 시험을 쳐서 스스로 관로를 개척해냈다.

그러다 3년 전, 그는 선대 총독 자리에서 군공을 세웠고, 게다가 훈귀 출신이라는 점까지 더해져서 제국의 백작에 봉해졌다.

그리고 고정에게는 또 다른 신분이 있었으니, 바로 문관 집단의 우두머리인 방씨 가문의 사위라는 점이었다.

고정은 올해 쉰다섯의 나이밖에 안 됐지만, 큰 차질이 없는 한 몇 년 이내 대녕 제국의 몇 대 거물 중 한 명이 될 것이다.

“총독 대인,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늘 여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던 낙문이 낭패스러운 모습으로 바닥에 넙죽 엎드려서는 빌고 있었다.

고정이 낙문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자네도 참. 내가 몇 번을 말했는가. 은자는 은표나 장부로 보관하고, 집 안에 현물로 두지 말라고 말이야. 수차례 알겠다고 말하더니, 결국 백만 냥에 달하는 금은보화를 밀실에 숨겨두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로군.”

낙문이 이마를 땅에 쿵쿵 찧으면서 말했다.

“총독 대인, 저는 매일 밤 그 은자들을 보고 만져야만 마음 놓고 잠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고정이 물었다.

“자네가 양광 총독부에 왔다는 사실을 또 누가 알고 있나?”

낙문이 서둘러 대답했다.

“없습니다. 하관이 혼자서 시종으로 위장해서 이곳으로 왔고, 제 처자식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장물이 떡하니 저택 앞에 내놓아졌으니, 자네의 관로는 아예 끊긴 것 같고. 어쩌고 싶어서 날 찾아온 건가?”

“방씨 가문이 해외에 양광만큼이나 큰 땅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몇백만 토인(土人: 토착민)을 노역으로 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최근 차츰 군대를 만들고 있는지라 몇몇 무도 문파가 그리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곳에 문관이 부족하다지요? 저는 거기서 계속 순무 일을 하면서 문관으로 지내고 싶습니다.”

대녕 제국의 문관 우두머리이자, 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방씨 가문이 제국 몰래 해상 무역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해외에 비밀 영토를 개척했다는 의미였다.

고정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도 목숨줄이 짧아진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이 일은 대녕 제국의 기밀이지만, 비밀 해상 무역에 수차례 가담했던 낙문은 이 사실을 어렵지 않게 추론해낼 수 있었다.

낙문이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하관이 이 땅에서 더는 갈 곳이 없어서 그럽니다. 방씨 가문에 의탁하게 된다면, 제가 아는 게 아무리 많아도 그저 방씨 가문의 가노(家奴) 중 하나일 뿐이지 않겠습니까.”

고정이 말했다.

“해외 영지에는 순무라는 관직이 없고, 기껏해야 지부 정도의 직급이 있네.”

낙문이 움찔했다.

“지부, 지부도 괜찮습니다.”

순무에서 지부까지 관직이 수직 하락하게 된 게 가슴 아팠지만, 대녕 제국의 감옥에 갇히거나 인적이 없는 삼천 리 밖으로 유배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고정이 말했다.

“해외의 영지는 주군의 사유재산이다. 만약 그곳에서 멋대로 뒷주머니를 채웠다가는 목이 날아가는 수가 있어. 주군은 천윤제처럼 물러터진 분이 아니시거든.”

낙문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주군께서 제가 풍족하게 생활할 수준의 은자만 주신다면, 죽을 때까지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고정이 잠시 낙문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뭐 하나만 묻겠네. 자네가 조와(爪哇: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게 뭔지 알고 있나?”

낙문이 엎드린 자세로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대녕 제국과의 해상 무역을 철저히 차단하여 대녕 제국이 절대로 그곳에 눈을 뜨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대녕 제국의 풍부한 물자를 빼돌려서 주군의 독립왕국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두변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영국이 동인도를 식민지화했던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중국 고대 관리와 사대부들의 시야가 무척 좁다고만 생각했을 테지만, 방씨 가문을 필두로 한 이익 집단의 야심은 그야말로 감탄할 정도가 아닌가.

해외에 왕국을 세운다? 시공간을 초월한 두변도 못 하는 일을 대녕 제국의 토박이가 해내다니!

고정이 말했다.

“일단 사람을 시켜서 배를 태워주겠네. 자네의 관직은 주군께서 결정하시는 것이니, 차후에 알려주겠네. 서둘러 출항 준비를 하게.”

낙문이 난감하다는 듯이 고정에게 말했다.

“그게, 죄송하지만 딱 이틀 시간만 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일인데?”

고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소식 하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제가 죽어서도 분이 안 풀릴 것 같아서요. 어차피 아무도 제가 총독부에 있다는 걸 모를 테니, 제 안위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광서 환관 학원.

엄당에서 두변의 진정한 산술 실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환관 학원에서 지낸 몇 년 동안 두변은 질리지도 않게 늘 0점을 도맡아 왔었다.

두변의 산술 실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수준인지는 오직 영종오만이 알 것이다.

현대 지구에서 온 두변은 나름 명문대 석사 출신이었다. 그리고 현대 수학은 17세기의 수학에 비해 몇백 배, 아니 몇천만 배는 더 앞서갔다.

“아니, 세상에.”

“너무 어렵잖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개념인데, 이걸 어떻게 풀라고?”

“이거 산술 시험 맞아? 여기 써진 글자는 다 알아보겠는데, 문제의 뜻을 못 알아먹겠어.”

여기저기서 학생들의 탄식과 우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시험관들은 속으로 웃으면서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학생들을 내려다보았다.

‘시험 문제를 바꿔 달라고 했지? 우리는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해줬을 뿐이다.’

시험관들은 자신들의 명성을 고려해서 어쩔 수 없이 시험 문제를 바꿔 달라는 요구사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노여움이 남아 있는 바, 이렇게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시건방지게 요구한 학생들에게 매운맛을 보여주겠다며 문제를 엄청나게 어렵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 우등생인 염세도 문제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진짜 너무 어렵잖아.’

문제를 확인하고도 표정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당엄뿐이었다.

어느 정도, 당엄은 정말 천재였다. 그는 환관 학원의 학생이 되기 전까지 산술을 많이 배우지 않았었고, 최근 2, 3년 사이에 집중하여 배운 게 다인데, 그의 산술 선생은 더 이상 당엄에게 가르칠 게 없다며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했다.

이번 산술 시험은 세 시진 반 동안 산술 문제 열 개를 풀어야 했다. 고려해야 할 것은 이 세계에는 아직 주판이란 것도 없는지라 산가지에 의존해야 했고, 공식 같은 게 있기는커녕 아라비안 숫자가 보급되기도 전이었다.

당엄은 종이 위에서 계산할 필요도 없이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내는 편이었고, 조금 복잡한 문제를 풀 땐 산가지를 사용했다.

다른 학생들은 앞의 여섯 문제를 풀 때부터 오만상을 지으면서 풀었지만, 당엄은 손쉽게 여섯 문제를 풀고 아래로 내려왔다.

뒤로 갈수록 문제가 어려워지면서 당엄의 풀이 속도도 조금씩 늦어졌다.

당엄은 일곱 번째 문제를 푸는 데 반 시진이 걸렸고, 그다음 문제를 풀 때도 반 시진을 썼다.

아홉 번째 문제는 당엄도 미간을 살짝 찌푸릴 정도로 어려웠고, 족히 한 시진을 고민한 뒤에야 풀이해냈다.

하지만 마지막 문제를 눈앞에 둔 당엄은 도무지 문제 풀이의 갈피를 잡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이 문제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고, 이 문제를 출제한 사람도 이 문제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냈을 거라 확신했다.

이건 사례감 출신 대환관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 학생들이 괘씸해서 일부러 낸 문제로구나!

당엄의 추측은 절반만 맞았다.

사례감 출신 대환관들은 이 문제를 어떤 비적에서 보게 되었는데, 문제만 있고 풀이가 없었다. 이 문제는 그들조차 풀지 못하는 문제였고, 그런 문제를 출제한 심보는 딱 하나였다. 엄당 학생들에게 스스로의 무지함이 얼마나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건지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당엄의 추측대로, 이 문제는 답이 없는 문제였다.

당엄도 못 푸는 문제이니, 염세가 풀 리는 만무했다. 그에게는 앞쪽 네 문제만 쉬울 뿐, 다섯 번째, 여섯 번째부터 고전을 치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신히 일곱 번째 문제에 다다랐을 때, 염세는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뇌 즙을 짜는 수준으로 고통스러워했다.

시험을 보는 내내 염세는 시시각각 두변을 지켜봤다.

시험이 시작된 지 일각이 지났을 때, 첫 번째 문제를 다 푼 염세가 두변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런데 두변은 문제를 풀긴커녕, 잠을 자는 사람처럼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이어서 염세는 일각이 지날 때마다 두변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염세가 언제 두변을 쳐다보든, 두변은 항상 눈을 감은 채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답지 위는 한 글자도 쓰인 게 없이 새하얬다.

염세는 두변이 산술 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시험을 포기한 줄 알고 완전히 안심했다.

염세는 어차피 두변은 산술 시험에서 한 번도 꼴찌를 벗어난 적이 없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두변이 국학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음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시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점수가 나온 것도 아니었지만, 염세는 자신의 점수가 약 65점일 거라 예상했고, 두변은 늘 그랬듯이 0점일 거라고 생각했다. 두변은 아예 답안지에 손도 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염세는 얼른 점수가 나와서 두변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길 바랐다. 그러면 자신은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해서 두변의 뺨을 때릴 것이다. 때려죽이진 못하더라도, 그놈의 이빨을 부러트리고 반병신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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