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장. 너무 위대한 천재
염세는 두변을 반 정도 오해했다.
두변은 잠을 자는 게 맞았다. 아니, 정확히는 명상으로 꿈속 세계에 들어가서 기마술, 궁술, 기마 궁술, 연단학을 복습하면서, 이어질 시험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염세가 그를 볼 때마다 두변이 자고 있던 것이다.
두변으로서는 이번 산술 시험이 너무 너무 쉬워서, 일각도 필요치 않았다. 짧은 시간에 문제를 다 푼 그는 시험지를 뒤집어서 답지 위에 덮어두었다. 아무것도 없는 시험지 뒷면 때문에 답지에 아무 글자도 적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마지막 문제는 사례감 출신 대환관들조차 풀지 못하는 문제지만, 두변에게는 단순한 삼원일차 방정식일 뿐이었다.
두변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뇌즙을 짤 필요도 없이, 문제를 보자마자 답을 구해냈다.
두변은 일각보다 짧은 시간에 열 문제를 모두 풀었고, 풀이 과정에 오류가 있었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이 만점을 자신했다.
태양이 질 무렵, 종소리가 울렸다.
환관 학원 졸업 시험의 산술 시험이 종료되었다.
학생들은 답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은 뒤 봉투에 넣어서 밀봉하고 답지를 제출했다.
감독 환관들이 거둬들인 답지를 수십 명의 소환관에게 건네주었고, 소환관들은 답지의 우측 상단에 쓰인 학생들의 이름을 덧지로 꼼꼼하게 가렸다.
밤이 되자, 다섯 명의 시험관들이 모여서 산술 시험 채점을 시작했다.
산술 시험은 어차피 답이 정해져 있다 보니, 국학 시험을 채점할 때보다 훨씬 더 수월했다. 국학 시험은 주관식이다 보니 어떻게든 합격점을 줘보려고 애를 쓰면서 채점해야 하지만, 산술 시험은 답이 하나이고 그 답이 틀리면 점수를 더 찾아서 줄 필요가 없었다.
틀렸어! 틀렸어! 틀렸어!
시험관들은 점수가 점점 더 낮아지는 학생들의 답지를 보면서 묘한 통쾌감을 느꼈다.
절반 이상의 채점이 끝날 무렵, 여태 나온 최고점수는 93점, 2등은 73점, 3등은 65점이었다.
사례감 출신 대환관들의 의도대로 차마 눈 뜨고 봐주지 못할 정도의 참담한 성적이 대부분이었다.
시험관 다섯 명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두변의 성적이 궁금했다.
이를 눈치챈 감독 환관 한 명이 말했다.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입니다. 시험을 볼 때 저희가 일부러 두변을 더 자세히 감시했는데, 두변은 답지를 하얗게 비워놓은 채로 잠만 자더군요.”
시험관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부산장 낭정이 한술 더 떠서 말했다.
“이상할 일도 아닙니다. 환관 학원에서 치러지는 산술 시험에서 두변은 늘 0점이었으니 말입니다.”
낭정과 왕굉은 시험 시간 내내 두변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내내 잠만 자고 있다는 걸 확인한 뒤로는 완전히 안심했다.
시험관 한 명이 고개를 저으면서 다음 답지를 가져왔다. 그런데 그는 답지 위에 적힌 글씨체를 보고 흠칫 놀랐다.
‘얇은 서체는 아니지만, 이 글씨체도 참 보기 좋군.’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시험관이 본 글씨체는 두변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미불체였다.
“이건 두변의 답지 같구려. 글씨체를 바꾸긴 했지만, 이건 두변의 답지가 틀림없는 것 같소.”
“오? 두변이 답을 적었단 말이오? 잠만 자느라 백지를 낸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그가 몇 문제나 풀었소?”
그 시험관의 말에 다른 시험관이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열 문제를 다 풀었소.”
시험관이 글씨체를 감상하면서 대충 대답했다.
“그럴 리가 없소. 내가 두변을 계속 관찰했는데, 일각도 안 돼서 붓을 내려놓고 잠을 자기 시작했단 말이오. 일각이라면, 문제를 하나 푸는 것도 버거운 시간이오.”
“옳소. 일각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열 문제를 다 풀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혹시 답지에 낙서를 한 건 아니오?”
“몇 문제나 맞혔소? 적어도 쉬운 첫 문제는 맞혔겠지.”
시험관들이 한마디씩 하면서 두변의 답지에 관심을 보였다.
그 시험관은 말없이 두변의 답지를 살펴보더니, 뭔가 보면 안 될 거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답지를 처음부터 찬찬히 확인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시험관이 입을 벌리고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열, 열 문제를 다 맞힌 듯하오.”
“열 문제를 다 맞혔다니? 말도 안 되지.”
나머지 네 명이 이구동성으로 외쳤고, 심지어 이중에는 두변을 감싸던 어만루도 포함되어 있었다.
왕굉과 낭정이 시험관들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갔다.
‘말도 안 돼. 두변 그 자식은 시험시간 내내 자고 있었잖아!’
“마지막 문제는 풀이가 없는 문제요. 그건 내가 한 비전에서 찾아낸 문제인데, 내가 그 문제를 10년 동안 풀었는데도 답을 찾을 수 없었소.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산술 대가에게도 이 문제를 가져가 봤는데, 아무도 내게 답을 줄 수 없었소. 그런데 엄당 학생이 이 문제를 풀었다고?”
열 번째 문제를 출제한 시험관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하자, 두변의 시험지를 쥐고 있던 시험관이 말없이 답지를 건넸다.
그 문제를 낸 시험관은 두변이 답한 열 번째 문제로 시선을 고정하고는, 한참을 말없이 답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는 완전히 놀라서 할 말을 잃었지만, 마치 세례라도 받은 것처럼 새로운 산술적 개념에 온몸을 떨었다.
두변은 이 문제의 답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산술 세계의 문을 열었구나!
너무 위대한 천재잖아!
이제 이런 완전히 새로운 해법이 생겼으니, 앞으로 비슷한 문제는 두변이 제시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적용하면 해법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시험관은 흥분하고 말았다.
그는 두변이 답한 다른 문제들도 차례로 확인했다.
두변이 쓴 내용은 정답보다도 더 정답 같았고, 풀이 과정이 남들보다 글자수가 절반은 더 적은데도 명료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두변의 풀이는 자신이 정답을 어떻게 얻어냈는지 다른 사람을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수준이었다.
‘응시자가 출제자조차도 답을 모르는 문제를 맞히고, 풀이 과정을 가르쳐주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번갈아 가면서 두변의 답지를 확인했고, 실내에 긴 정적이 찾아왔다.
두변의 국학 시험 답지를 본 시험관들은 그의 문장에 감탄하며 자신들이 이런 문장을 평가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지만, 산술 시험은 뭐라고 주관적인 평가를 할 것도 없는 완벽한 만점이었다.
“두변이 왜 일각 만에 붓을 내려놓고 잠을 잔 건지 이제야 알겠군. 그 아이는 일각 만에 모든 문제를 푼 게야. 다른 사람들에겐 극악의 난이도지만, 두변에게는 너무도 쉬운 문제들이었던 게지.”
문제를 낸 다섯 명의 시험관들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산술의 벽은 높고, 무지로 인한 절망이 뭔지 똑똑히 알려주려고 최선을 다해서 어렵게 문제를 냈다. 그런데 두변이 이 문제들을 너무도 쉽게, 숨 쉬듯이 풀어버리니 허탈감과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이제 열여덟 살이 된 청년이오. 세상에 이런 천재가 어디 있소?”
한 시험관이 감탄하면서 말했다.
“원래 천재는 다 태생부터 천재잖소. 나이와는 무관하오.”
“문학적 소양도 그러하오. 천재들이 방귀 뀌다가 우연히 떠오른 영감으로 써낸 문장도 일반인이 악에 받쳐서 쓰는 글보다 더 훌륭할 것이오.”
“정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천재는 정말로 못 이룰 게 없는 존재들인가 보오.”
시험관들은 탄복하기도, 씁쓸해하기도 하면서 한마디씩 주고받았다.
주임 시험관이 두변의 산술 답지에 만점 100점을 적었다.
어만루가 말했다.
“이로써 두변이 국학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게 증명되었군.”
아무도 어만루의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만약 여기서 누가 ‘부정행위’라는 단어를 한 번이라도 더 언급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한 모욕이었다.
어만루가 말했다.
“왕굉 산장, 잡학이론 시험도 남아 있는데, 그 시험은 문제를 바꾸지 않아도 괜찮겠소?”
얼굴이 화끈거리던 왕굉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성적 게시판을 확인하러 나온 학생들 사이에 당엄이 서 있었다.
그는 두변이 국학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그 말도 안 되는 정신상태로 한 시진 만에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걸작을 세 편이나 뽑아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산술 문제까지 바꿨으니, 두변이 정말로 부정행위를 저질렀는지는 산술 시험에서 당락이 갈릴 것이다.
두변이 어제 시험시간 내내 자고 있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고, 당엄도 그가 산술 시험에서 0점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 점수가 어떻게 나왔는지 확인해야만 안심이 될 듯했다.
당엄을 보자, 염세가 맹우라도 찾은 사람처럼 친근하게 다가왔다.
“두변이 0점이라는 건 확실하지만, 두 눈으로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지 않겠습니까?”
당엄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염세가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당 해원, 해원 생각에는 두변이 도망칠 것 같습니까? 비겁하고 교활한 놈이니까, 뭔들 못하겠습니까. 어제 그놈이 나랑 산술 시험 점수로 내기를 했던 건, 일부러 자긴 안 도망친다고 연막을 친 뒤에 도망칠 시간을 벌려고 한 거겠지요. 환관 학원의 졸업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게 밝혀지면, 두 다리를 분질러버린 뒤에 쫓겨날 테니까요.”
당엄이 대답 대신 눈썹을 으쓱했다.
그는 염세가 말한 게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엄은 두변의 교활함으로 봤을 때, 자신이 질 것을 예상하고 염세와 그런 내기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 내기는 단순히 발 씻은 물을 끼얹는 게 아니라, 반쯤 맞아 죽는 꼴로 학원에서 쫓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성적을 공고하는 엄당 무사들이 답지와 성적표를 들고 나타났다. 그들은 어제처럼 10등 안에 든 학생들의 성적과 답지를 공개했다.
10등, 9등, 8등…….
10등의 점수가 50점이라는 게 공개되자, 학생들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어제 치렀던 산술 시험은 한숨이 푹푹 나올 정도로 어려웠고, 예전이라면 50점으로 10등 안에 드는 건 어림도 없을 텐데, 지금은 50점밖에 안 됐는데도 10등을 차지한 모양이었다.
10등 안에 든 학생들은 어제처럼 환호할 겨를도 없이 게시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환호하기도 민망한 점수이기도 하고, 모두 두변의 점수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염세, 산술 시험 4등, 65점.
점수가 공개되자, 염세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록 높은 점수나 등수는 아니지만, 적어도 5등 안에는 들었으니 최종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이다. 그는 광서 어마사에서 팔자 펴고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장옥윤, 산술 시험 3등, 75점.
“장옥윤? 저 사람은 누구야?”
“장옥윤이 누구야? 앞으로 나와서 얼굴 한 번 비춰주면 안 되나?”
학생들이 웅성거리자, 딱 봐도 연약해 보이는 환관이 앞으로 나왔다.
‘이 사람이 장옥윤이라고? 존재감이 전혀 없어서 몰랐네.’
학생들이 조금 놀란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장옥윤은 광서 환관 학원에서 두변보다도 더 병풍 취급을 받는 학생이었다.
두변이 만년 꼴찌이긴 했지만 꼴찌로서의 입지가 워낙 단단한지라 어쨌든 장옥윤보다는 유명했다.
장옥윤의 성적은 두변보다는 높은 중하권이었고,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매년 연말 시험 때 장옥윤의 산수 성적이 나쁘지 않았지만, 연말 시험 난이도가 워낙 쉬운지라 다들 성적이 좋아서 그의 재능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산술 시험이 어려운 덕에 그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그는 과거에 두변과 동병상련의 처지이기도 했으니, 두변과 반쯤 친구라고 할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늘 다른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괴롭힘을 당해도 보복은커녕 꾹꾹 참기만 하는 답답이들이었다. 폐물 취급당하던 두 사람은 은연중에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냈는데, 지금은 두변이 갑자기 용이 되어 하늘 위로 훨훨 날게 되어서 장옥윤만 남게 되었다.
병풍은 어딜 가나 병풍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그가 장옥윤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저리 비키라며 그를 다시 옆으로 치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