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장. 저놈만 아니었어도!
“제국에게, 폐하께 미안한 마음도 없는 것이냐? 애국 충군의 마음은 다 어디 갖다 버린 것이냐?”
이문회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비통함에 소리치는 이문회에게 돌아오는 말은 더욱 그를 자극했다.
“혼군일 뿐이지!”
이문회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이문회에게는 자기 목숨보다 중요한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장차 제국의 미래를 책임질 두변이고, 다른 한 명은 그가 평생을 충성할 천윤제였다.
혼군? 혼군이라고? 네놈 따위가 감히? 식사 한 끼에 흰 죽 한 그릇에 절인 채소 한 접시를 드시는 혼군을 본 적이 있느냐?
속옷에 구멍이 나서 기워입는 혼군을 봤느냐?
신하들에게 괴롭힘을 당해서 각혈을 하시는데도 신하를 죽일 마음을 삼키는 혼군을 보았냔 말이다!
만약 폐하께서 죽을힘을 다해 버티시지 않았다면, 대녕 제국은 벌써 분열되어 건로에게 중원지역을 내어줬을 테고, 각지에 봉화가 일어 천하가 혼란해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을 것이다.
폐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네놈들의 가문은 벌써 씨가 말랐을 것이란 말이다!
이문회는 마지막 희망까지 내려놓은 뒤, 비통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그는 말머리를 돌려서 동창 진열로 되돌아갔다.
“가노인 엄당 하나 제대로 간수를 하지 못하여 나라가 혼란스러워졌는데, 지금의 황제가 혼군이 아니라면 뭐란 말이야. 이런 혼군이라면 진작에 원수로 간주해야 하지!”
성벽 위의 그 학생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맹자가 말하길, 군주가 신하를 초개 따위로 취급한다면, 신하들도 군주를 원수로 본다고 했다.(君之視臣如草芥 則臣之視君如寇仇) 남해도장의 학생은 꼴에 학생이라고 사서를 운운하며 비아냥댄 것이다.
동창 진열로 돌아간 이문회의 두 눈이 이미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서 남해도장을 둘러본 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성에 다시 잡혀가는 한이 있어도, 하늘이 내게 천벌을 내린다 해도, 오늘은 못 물러나겠다.
남해도장을 공격하라. 앞을 막는 자가 있다면, 모조리 죽여버려라.”
슉, 슉, 슉, 슉.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동창 무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이문회가 이끌고 온 백여 명의 동창 무사들은 정예 무사로만 이뤄진 돌격대였다.
이문회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창 무사들이 굶주린 호랑이처럼 남해도장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이문회는 일부러 남해도장에 투석기를 끌고 오지 않았고, 동창 무사들과 함께 학생들이 쏘아내는 화살을 검으로 쳐내며 돌진했다.
성벽 위에 서 있던 남해도장의 교관이 소리쳤다.
“남해도장은 제국을 위해 인재를 양성하는 학부인데, 어찌 감히 무력을 동원하는 거냐. 아, 하늘이시여. 나라를 망조로 이끄는 엄당 놈들 때문에 분통이 터져 죽겠습니다. 저 배은망덕한 개새끼를 벼락으로 내리쳐서 죽여…….”
스윽!
이문회가 위를 향해 냅다 검을 베었다.
순간 교관은 악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로로 몸이 쪼개졌다.
“감히 우리 선생을 죽이다니. 내가 누군지는 알고…….”
옆에 있던 학생이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쳤다.
이문회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학생의 몸을 가로로 두 동강 내버렸다.
이문회와 백여 명의 돌격 무사가 남해도장 대문 안으로 홍수처럼 밀려 들어갔다.
광서 환관 학원.
기초 무도의 세 번째 과목인 고정 과녁 궁술 시험이 시작되었다.
시험 순서는 제비뽑기로 결정되었다.
염세와 두변은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두 첫 번째 조를 뽑았다.
첫 번째 조의 열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 서서 앞을 바라보는데, 일렬로 서 있는 학생들로부터 90미터 지점에 빳빳하게 새로 만든 과녁이 설치되어 있었다.
두변이 가장 가운데 자리에 배치되었고, 그의 오른쪽은 염세였다.
“두변, 우리에게 또 다른 내기가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졸업 시험의 총점이 낮은 사람이 평생 남의 똥만 치워야 하급 환관이 되는 내기 말이다.”
염세가 조용히 말했다.
두변이 부러 아차, 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 미안, 미안. 너랑 또 다른 내기를 했던 걸 까먹었다. 내 눈에 보이는 상대는 오직 당엄뿐이었거든. 네가 내 경쟁상대가 되기엔 수준이 좀 떨어지지 않으냐. 그래서 네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네. 아, 그래서 네 총점이 몇 점이라고?”
염세는 두변 때문에 약오르는 건 차치하고, 두변의 태도와 말이 참을 수 없이 치욕스러웠다.
“너무 일찍 자만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 궁술 실력은 학원 상위권에서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거든. 넌 얼마나 자신 있는데?”
“말했잖아. 고정 과녁 궁술은 딱 하루 배웠다고.”
두변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두고 봐라. 내가 네놈을 철저히 짓밟아 줄 테니까. 평생 남의 똥 치울 준비나 하라고.”
염세가 이를 부득 갈면서 말했다.
“각자의 활 점검!”
시험관이 소리쳤다.
학생들은 빠르게 시험용 활을 확인한 뒤, 이상 없음을 알렸다.
백 명 넘는 학생들이 또다시 두변을 구경하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이번 졸업 시험은 당엄과 두변의 전투장으로 전락하고 말았고,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병풍일 뿐이었다.
두변은 아직도 당엄에게 13점 뒤처져 있었고, 이 13점을 따라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으로 어려웠다. 오늘 치러질 궁술 시험 역시 고득점이 매우 힘든 시험으로, 고정 과녁 궁술의 역대 최고점은 13.5점이었다.
당엄이 두변의 과녁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이 두변의 궁술 점수를 궁금해 했지만, 그중 그의 점수를 제일 궁금해하는 사람은 물론 당엄일 것이다.
“준비!”
시험관의 외침에 첫 번째 조의 학생들이 일제히 화살을 활에 올리고 활시위를 당겼다.
고정 과녁 궁술에 사용되는 활은 일석궁(一石弓)이고, 과녁까지의 거리는 90미터였다. 학생들은 일주향 동안 열다섯 발의 화살을 연사해야 하며, 만점은 총 15점이었다.
점수의 계산 방식은 과녁의 중심부를 맞힐 경우(직경 약 1촌) 1점, 바깥 과녁을 맞힐 경우(직경 약 2촌) 0.5점이었다.
“시작!”
시험관이 외쳤다.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두변의 활을 주시했다.
첫 번째 조 열 명의 학생들이 흔들림 없는 동작으로 과녁을 조준했다.
슉, 슉, 슉.
염세를 포함한 다른 학생들이 조준을 끝내자마자 화살을 쏘았다.
염세는 첫 화살부터 과녁의 중앙에 명중했다.
다른 학생들은 첫 번째 화살을 쏘아냈는데, 오직 두변만 여전히 화살을 조준하고 있었다.
염세가 속으로 냉소했다.
미련한 놈!
기본적으로 활을 쏠 때 조준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선 안 된다. 조준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구경하던 학생들은 두변이 궁술 실력까지 천재적이길 기대한 건 너무 비현실적이었나 하며 크게 실망했다.
두변은 학생들의 예상과 달리, 과녁을 조준하는 게 아니라 정신력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송과선을 이용해 정신력을 집중했다.
순간, 90미터 밖에 있던 과녁이 두변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때 염세는 두 번째 화살을 올리며 활시위를 당겼다.
과녁 중심에 정신력을 고정한 두변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슉, 슉, 슉, 슉.
두변은 멈추지도 않고 딱히 조준하는 것도 없이 연달아 열다섯 발의 화살을 쏘아냈다. 열다섯 발을 전체 쏟는 데 30초도 되지 않았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입이 떡 하고 벌어지고 말았다.
너, 너무 빠르잖아!
다른 학생들이 첫 번째 화살을 쐈을 때, 두변은 조준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이 두 번째 화살을 활시위에 올렸을 때, 두변은 열다섯 발 화살을 모두 끝냈다.
두변은 화살을 쏜 뒤, 결과도 확인하지 않고 활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과녁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광경에 놀라서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열다섯 발 화살 모두 명중이었다. 그 좁디좁은 과녁 중심에 열다섯 발 화살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또 만점이라고? 두변 저놈은 사람이 아니잖아. 요괴라고!
두변, 고정 과녁 궁술 만점.
두변은 자신이 만점이라는 걸 마지막 화살이 활시위를 떠난 그 순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신력이 40점일 땐 아무리 열심히 해도 늘 1, 2점이 모자라서 만점을 따내긴 어려웠다. 그런데 정신력이 55점이 된 후로 과연 ‘비약’이라고 표현할 만큼 실력이 향상했다.
졸업 시험에 쓰이는 화살촉이 아주 날카롭고 얇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과녁의 중앙을 맞춘다고 해도 공간이 부족해서 화살 열다섯 개가 모두 과녁 중앙에 들어가진 못했을 것이다.
물론 아무리 얇고 날카로운 화살촉이라고 해도, 화살 열다섯 개를 전부 과녁 중앙에 명중시키기는 하늘의 별 따기 수준으로 어려웠다.
오죽하면 광서 환관 학원 설립 이래 만점을 얻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까.
당엄은 두변의 과녁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또 한 번 놀라움에 진저리를 쳤다.
그는 불과 이삼 개월 전에 민첩력이 0이었던 무도 햇병아리 두변이, 활을 제대로 잡는 법도 몰랐던 두변이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이 정도 실력을 갖춘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0점이었던 그가 갑자기 역대 최고 기록을 깨는 고수가 되다니!
단지 천재라서?
아니,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그렇지, 이런 수준의 발전은 기적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당엄은 아무리 생각해도 두변의 변화가 머리로 이해되지 않았다.
당엄은 자신을 빠르게 진정시키기 위해서 두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이 감정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당엄은 어쩌면 자신에게 올지 모를 요행과 환상을 내던지고 두변을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로 삼았다.
그는 더 이상 체면 따위는, 심지어 영예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승리만을 위한 싸움을 시작하기로 했다.
두변을 이기기만 한다면 자신의 명예에 어떤 흠이 생겨도, 천재라는 미명을 잃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두변이 만들어낸 기적은 사람들의 상식 수준을 뛰어넘었다.
신선이 과녁 앞에서 화살을 바로 꽂는다고 해도, 이렇게 정확하고 빠를 수가 있을까!
왕굉, 낭정 등의 안색이 한껏 어두워졌다.
모든 상황이 그들의 계획에서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
두변의 궁술을 본 사람들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시험은 계속 되어야만 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두변의 활쏘기는 학생들의 마음을 완전히 흔들고 말았다.
특히 염세는 가서 남의 똥이나 치울 준비를 하라고 비웃으려 했는데, 바로 다음 순간 두변이 그의 뺨을 세게 후려친 격이었다.
현대어로 하자면, 염세는 완전히 멘탈이 털렸다.
염세의 첫 번째 화살은 두변의 영향이 없던 터라 안정적으로 과녁의 중앙에 꽂혔지만, 두 번째 화살은 아예 과녁을 맞히지도 못했다.
과녁을 아예 벗어난 화살이라니.
염세가 쏜 화살이 과녁을 스치지도 못한 때가 있기는 했으나, 그건 정말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다.
세 번째 화살은 다행히도 과녁 밖으로 나가진 않았지만, 과녁 변두리에 처박히면서 0점 처리되었다.
염세는 자신의 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하면서 3분 동안 자신을 진정시켰다.
침착함을 조금이나마 되찾은 염세가 다시 활시위를 들었지만, 이후에 쏜 화살들은 그의 평소 실력의 반의반도 못 미치는 정도였다.
최종적으로 염세의 고정 과녁 궁술 점수는 9.5점에 그쳤다. 만점 15점인 고정 과녁 궁술 시험을 턱걸이 수준으로 합격한 것이다.
염세는 정말 목놓아 울고 싶지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염세의 고정 과녁 궁술의 최고 점수는 무려 13점이었고, 최저 점수는 11.5점이었다. 그런데 9.5점이라니!
“이게 다 두변 저놈 탓이야. 저놈만 아니었어도!”
염세가 이를 부득 갈았다.
염세는 두변 때문에 평정심을 잃어서 이런 점수를 받은 거라고 굳게 믿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이 염세의 온몸을 엄습해왔다.
내가 졸업 시험에서 두변에게 진다면, 나는 최하급 잡역 환관이 될 테고, 평생 남의 똥만 치우면서 살아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