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장. 아직 쓸 수 있어!
축무애가 아래를 향해 힘껏 외쳤다.
“이문회, 내 학생들을 죽이지 마시오! 무슨 일이든 나만 데려가면 그만이지 않소!”
축무애가 생각해낸 방법이라고는 이런 신파극이 전부였다.
대놓고 학생들을 인간방패로 내세운 축무애가 이제 와서 눈물 나게 제자를 아끼는 스승의 탈을 쓰려는 것이다.
축무애가 탑루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이문회, 다시 말하지만 내 학생들은 건드리지 마시오. 우리 사이의 일이니, 우리끼리 해결하는 게 옳지 않소. 더는 무고한 희생을 만들어선 아니 되오!”
남해도장의 학생들이 갑자기 뜨겁게 눈시울을 붉히며 축무애를 바라보았다.
축무애는 학생들을 인간방패로 내세워놨으면서, 이제 기세가 밀려서 안 될 것 같으니 신파극을 찍으면서 열정적으로 연기했다.
“이문회, 나와 단둘이 승부를 냅시다. 내가 진다면 순순히 붙잡혀주고, 학생들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그만 반항하라고 설득하겠소. 하지만 내가 이긴다면 부디 내 학생들만은 살려주시오. 더는 무고한 생명을 죽이지 말란 말이오. 아직 앞날이 무궁무진한 젊은이들이잖소.”
축무애는 눈물을 머금고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오면서 계속해서 분개한 말투로 외쳤다.
“이들은 대녕 제국의 미래요! 그러니 제발 그만 좀 죽이시오. 무슨 짓을 하든 다 나한테 하면 될 것이지, 왜 내 학생들을 죽이는 것이오! 나와 단둘이 한 명이 죽어야만 끝나는 결전을 치러보잔 말이오! 모든 건 하늘의 뜻에 맡길 테니, 어떻소?”
약을 팔아도 너무 팔았다.
남해도장 학생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명예까지 챙기려는 축무애의 간사함에 이문회는 이를 부득 갈았다.
이문회는 천천히 층계를 내려오면서 울부짖는 축무애를 기가 찬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축무애는 장렬하게 전장에 나가는 영웅이라도 된 듯 행동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도 정치판에 뛰어들려면 명품 배우 정도는 되어야만 하나 보다.
이문회 앞에 다다른 축무애가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 학생들을 내버려 두시오. 감히 나와 단둘이 결전을 펼칠 배짱은 있소?”
이문회가 냉소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만약 내가 그 제안을 수락한다면, 나는 정말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한 놈이 되겠지.”
축무애의 안색이 급변했다.
“내 학생들을 놔주지 않겠다는 뜻이오? 저들의 씨를 말려야만 직성이 풀리겠소? 자네는 어찌 그리도 잔인한 것이오. 이들은 모두 제국의 빛이 될 아이들이란 말이오!”
뻔뻔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가!
축무애는 학생들의 죽음과 자신을 어떻게든 엮어서 정의로운 면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 말 끝까지 들으시오!”
이문회는 또 연기를 시작할 축무애의 모양새에 급히 먼저 입을 열었다.
“만약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한 놈이 될 테지만, 어떡하겠소? 내가 그 멍청한 놈인 것을. 나와 결전을 치러서 내가 이긴다면 당신은 순순히 내게 잡혀가야 할 것이며, 학생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하시오.”
축무애가 물었다.
“만약 내가 이긴다면?”
“당신의 평소 행실과 인품을 생각한다면, 난 아마 죽은 목숨이겠지.”
이문회가 고개를 돌려서 모두에게 말했다.
“모두 이곳에서 백 보 멀리 떨어져라.”
동창 무사와 남해도장 학생들이 순순히 백 걸음 뒤로 물러나서 둥근 모양의 결투장을 만들어냈다.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결전을 시작하지.”
이문회가 축무애를 향해 말했다.
축무애가 이문회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이문회, 진정 네가 이리도 멍청한 놈일 줄 몰랐구나. 내가 도망칠 곳이 더는 없다는 걸 빤히 알면서 왜 내 제안을 받아들인 거지? 정말 멍청하군. 쯧쯧.”
“네가 말한 것처럼 난 아주 멍청한 놈이거든. 그래서 나보다 더 멍청한 학생들이 누구의 말에 선동되어서 더 많이 죽는 게 싫을 뿐이다.”
축무애가 콧방귀를 뀌었다.
“조금 전에 누구보다 신나게 학생들을 죽이던 사람은 너일 텐데?”
“필요할 때는 죽음으로 죽음을 막는 방법을 써야 하지. 그래야 무고한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
축무애가 영악한 미소를 띠면서 여전히 작게 말했다.
“대단한 분 납셨군. 정말 이보다 더 멍청한 놈이 있을까 싶군.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어.”
축무애가 비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문회, 오늘 승패가 어떻게 되든 부디 나의 학생들을 놔주게. 제발, 내가 이렇게 빌겠네.”
이어서 축무애가 다시 이문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문회, 2품 무사라고 했지?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나는 내 실력을 줄곧 감춰왔지만, 나는 1품 무사거든.”
축무애가 슬픔이 가득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학생들에게 간절하게 소리쳤다.
“학생 여러분! 오늘 결전의 승패가 어떻게 되든 꼭 잘살아야 하네. 앞으로도 제국을 위한 헌신을 잊지 말고 남해도장의 교훈을 잊지 말게!”
남해도장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축무애 산장의 이름을 외쳤다.
축무애가 이문회에게 시선을 돌리며 크게 외쳤다.
“멍청한 이문회! 자업자득이 뭔지 가르쳐주마. 이건 사활을 건 결투다. 죽어라, 이문회!”
1품 무도 고수, 남해도장 산장, 전 광서 총병관 축무애가 검을 뽑고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이문회도 동시에 검을 뽑고 축무애를 향해 허공을 가르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서걱.
고수들의 결전에는 일격필살이 전부다.
결전이 시작되자마자 두 사람의 일격필살로 결전은 끝났다.
축무애는 자신의 아랫도리가 허전한 느낌에 고개를 숙였다.
“으아악!”
그는 생에 한 번도 낸 적 없는 목소리로 처량하게 울부짖었다.
일격을 가한 뒤, 이문회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축무애는 자신이 분명히 이길 것이라 생각했다.
어딘가 다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허전한 기분만 들었다.
오히려 이문회의 가슴팍에서 선명한 핏자국을 보면서, 자신이 이겼다는 걸 확신했다.
하지만 동시에 생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상실감에 빠져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의 아래를 향하자, 축무애는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여 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살면서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무서운 장면이 눈앞에 나타났다. 살과 피가 뒤섞인 무언가가 덩그러니 축무애의 발치에 떨어져 있었다.
제 성기가 뿌리째 잘려버린 것이다.
“아, 아아. 아악!”
축무애가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면서 소리쳤다.
“어서 저걸 주워다가 꿰매줘! 아직 쓸 수 있어! 아직 쓸 수 있다고!”
축무애의 본능적인 외침이었다. 그는 분노한 게 아니라 두려웠다.
아무리 많은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한들, 아름다운 여인을 품을 수 없는 불구의 몸이 된다면 그 무엇도 의미가 없지 않은가!
“어서, 어서 주워다가 붙여줘. 아직 쓸 수 있어!”
축무애가 있는 힘껏 소리쳤다.
이문회가 천천히 축무애에게 다가가, 피투성이가 된 그것을 있는 힘껏 콰직 밟아버렸다.
“이제, 못 쓰겠네.”
이문회가 담담하게 말했다.
“망했구나!”
축무애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이문회가 바닥에 떨어진 제 것을 밟는 순간, 마음속에 남아있던 불씨가 완전히 꺼지면서 흠칫 몸을 떨었다.
한참 후 축무애가 이문회의 가슴팍을 가리키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지? 분명히 내가 이길 수 있던 싸움이거늘, 분명히 네놈이 죽었어야만 하거늘!”
“일 척 정도의 상처가 생기긴 했지만, 피부만 까진 수준이지 내장과 뼈에는 이상이 없거든. 수많은 싸움에서 수도 없이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경험이 있기도 하고, 당신 수법에 대해서도 이미 모두 파악하고 있으니 예측도 가능하고.”
이문회가 말했다.
축무애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그간 실력을 감춰왔는데! 내 무공이 네놈보다 한 수 위인데!”
이문회가 웃었다.
“혼자서만 실력을 감출 줄 아는가 보지?
나는 실력을 일부러 숨긴 게 아니라, 한시도 멈추지 않고 성장하고 있다.
사실상 내 바보 같은 아들놈처럼 남들 앞에서 자랑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나 가감 없이 제 모든 실력을 드러내지. 그렇지 않으면 누구나 다 자기 실력을 조금씩 감추기 마련이지 않나?”
이문회의 눈빛에는 두변을 향한 애정과 자랑스러움이 어려있었다.
사람들은 줄곧 이문회의 무공을 과소평가해왔다.
이문회가 너무 바쁘기도 하고, 그의 관직이 정4품 관직에 불과하기도 하고, 무공 수련을 하기엔 충심이 너무 지극한 나머지 동창 무사들을 이끌고 방방곡곡을 누비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사람들은 이문회도 절대 무공자라는 걸 깜빡 잊곤 했다.
게다가 절대 무공을 가진 자라고 하기엔 무공 고수 특유의 기세나 거만함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문회는 매일 무공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늘 최전선에 있다 보니 실전 무공에 강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환경 속에서 그는 자신의 무공을 항상 전성기 수준으로 유지해왔다.
축무애가 자신의 실력을 숨겼던 이유는 정말로 필요한 순간에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상대가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해서 일격필살로 상대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는 줄곧 자신의 무공이 이문회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굳게 믿어왔고, 일부러 이문회를 자극해서 이문회가 미련하게 결투를 받아들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축무애가 이문회보다 자신의 무공이 더 뛰어나다고 굳게 믿는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자신감과 느낌.
이문회는 황제를 위해서 밤낮없이 일하고, 매일 끝나지 않은 공무가 있고, 허구한 날 무슨 투쟁에 휘말려서 일선에 나가 있다. 이문회는 누가 봐도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황제를 위한 삶을 살고 있으니, 그가 무공 훈련을 할 시간은 절대로 없어 보였다.
축무애는 달랐다.
축무애는 자신의 목숨을 끔찍하게 아꼈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공 수련을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
하지만 죽기가 무서워서 무공을 수련하는 것과, 죽는 게 두렵지 않은 자의 무공 수련은 차원이 다른 법.
죽음의 경계에서 깨우쳐 돌파할 수 있는 무도의 경계가 있음을, 축무애는 결코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이문회의 무공 수련 시간이 축무애보다 짧을 수는 있겠지만, 그는 그 차이를 뛰어넘을 만큼 수도 없이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러니 이문회의 검은 축무애의 검보다 훨씬 더 표독하고 살기가 가득했다.
수련 시간만 길면 뭐하나, 수련의 질이 다른데.
“아, 으아아!”
축무애는 큰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나머지, 으악 소리를 몇 번 더 지르다가 혼절해버렸다.
이문회가 명령했다.
“축무애의 상처를 간단하게 봉합하거라. 죽지 않을 정도로 치료한 뒤에 계림 동창 감옥으로 끌고 간다.”
이문회가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남해도장 학생들이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산장을 모셔갈 수 없다!”
“산장을 건드리지 마라.”
“산장을 모셔가려면, 우리의 시체를 밟고 지나가야…….”
서걱.
학생 하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동창 천호 무천추가 검을 휘둘러서 그 학생의 몸을 반으로 잘라버렸다.
“사, 사람을 죽여? 우리 다 같이 맞서 싸우…….”
콰직.
또 다른 남해도장 학생이 소리치자, 이번엔 동창 천호 허광창이 그의 목을 잘라버렸다.
연이어 두 명이 눈앞에서 죽어버리자, 학생들이 그제야 조용해졌다.
이문회가 빽빽하게 서 있는 남해도장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족히 이천 명이 되는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물었다.
“더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