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장. 책 속에 먹을 게 있다.
두변이 이상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지금 좀 기이한 기분이 드는데요.”
- 무슨 느낌인지 안다.
“이 세계의 무도는 칼과 검, 검기와 내력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아서, 내가 현대 지구에서 봤던 무협 소설과 비슷했죠. 그런데 꼭 나 혼자만 판타지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나 혼자만요.”
두변은 최대한 정확하게 자신의 기분을 설명했다.
잠시 침묵하던 기이한 불빛이 천천히 말했다.
- 만약 그게 아니라면, 네가 어떻게 이 힘들고 위대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겠나. 네가 초장부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전개로 임무를 수행하는 것도, 네가 말한 것처럼 오직 혼자만 판타지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도, 전부 너 이전의 수많은 숙주가 일궈낸 것이다.
“내가 이 세계에서 해야 할 사명이 뭔지 알려주면 안 됩니까? 정말 단순히 대녕 제국을 구하는 건가요?”
- 그건 사명 중 아주 중요한 일부분이긴 하지만, 전부가 아니다. 내가 지금 말해줄 수 있는 건, 네 사명은 정말 위대한 것이고 네가 그 무엇을 상상하든 그 무엇보다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는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다. 네가 실패하게 된다면 우리도 완전히 실패하는 것이고, 더는 다음 숙주를 데려올 힘이 없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기이한 불빛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지더니, 다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만.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네가 알아야 할 건, 네 사명은 정말 위대한 것이고, 여기서 더 알려고 하면 할수록 네게 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훗날 네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서 우리가 너를 포기하려고 할 때, 섭섭해하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널 포기해서 가장 절망하는 건, 바로 우리일 테니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불길한 예감이 든 두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가 되면, 그쪽은 살아있을 수 있습니까?”
기이한 불빛이 한참 뒤에 대답했다.
- 죽는다고 봐야지.
무언가 무거운 것이 두변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기분이었다.
기이한 불빛이 말했다.
- 오늘 너무 많은 걸 알려줬군. 내가 알려주는 게 많을수록 서로에게 도움 될 게 하나도 없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더는 이 얘기에 관해 수소문하거나 조사하지 말도록 해라. 네가 해야 할 임무가 아직 많으니, 당장 눈앞에 집중하도록 해. 졸업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해라. 네가 당엄을 이기려면 아직 6.5점의 점수 차가 있다.
‘책 속에 먹을 것과 돈이 있다.’는 옛말은 이 지구에서도 통하는 말이었다.
당신의 출신이 아무리 빈곤해도 공부만 죽으라 열심히 해서 진사에 합격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집에 여인 한 명이 늘어나게 된다. 그 여인은 무공 실력이 대단하고 몸매가 끝내주며, 용모도 아름다워서 어느 면을 봐도 여신이라고 불릴 정도이다.
당신이 고개만 살짝 끄덕이면, 그 여인은 그날부로 당신의 것이 된다. 혼수를 준비할 필요도 없다. 여신급의 여인이 제 발로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서 스스로 풍성한 혼수를 마련해올 것이기 때문이다.
“정혼녀 있어요?”
“없다면 축하해요. 오늘부터 정혼녀가 생겼으니까.”
“뭐라고요? 이미 부인이 있다고요? 그럼 더 아름다운 여인으로 바꿀 생각 없어요?”
“뭐라고요? 조강지처를 버릴 수 없다고요? 그럼 더 간단하죠. 부인을 한 명 더 두면 되잖아요.”
“정부인으로 둘을 두기엔 좀 어렵다고요? 괜찮아요. 첩으로 두면 되잖아요. 예쁜 데다가 밤엔 원하는 자세 뭐든 다할 수 있고, 밖에 나가면 호위로도 쓸 수 있는 걸요. 집 안이든 집 밖이든, 어딜 내놔도 손색이 없어요.”
만약 당신의 출신이 빈곤한데 개천에 용 나듯 진사에 합격했다면, 분명히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고, 당신 곁에는 자연스럽게 미모의 무공 고수 여인이 한 명 생길 것이다.
이 여인들은 모두 북명검파의 여제자로, 전부 다 고아 출신인지라 그들의 유일한 처가는 북명검파일 뿐이다.
북명검파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문관 집단과 사돈지간이 되었다.
게다가 어떤 귀족 가문의 자제든 모두 북명검파에서 무도를 배우길 원했다. 북명검파에서 무도를 배우게 된다면, 당연히 무도 고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다 보니 북명검파는 어느새 문무 집단만큼 영향력을 가진 파벌이 되었다.
북명검파가 곳곳에 끼치는 막대한 영향력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비유로도 부족했다.
북명검파는 영향력이 큰 만큼 그 어떤 집단과도 분쟁을 원하지 않았다. 특히 문관 집단이 먼저 북명검파에게 부탁하지 않는 한, 그들이 먼저 다른 관아나 동창에 시비를 거는 일도 없었다.
광서 순무 낙문의 저택 안.
순무 낙문에게도 무공 실력이 대단한, 아주 어여쁜 북명검파 출신의 첩이 한 명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무공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문회를 뛰어넘을 수 없었고, 그래서 낙문의 첩은 양손의 근맥이 끊긴 채로 이문회 앞에 무릎이 꿇려있었다.
낙문의 첩뿐만 아니라, 낙문의 세 아들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세 아들 중 제일 나이가 많은 아들이 스물여덟, 제일 어린 아들이 열여덟이었다.
낙문의 큰아들은 벌써 장가를 갔고 세 살배기 딸도 한 명 있었다.
딸을 품에 안은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낙문의 큰며느리는 광서 무장 임씨 가문의 적녀였고, 집에서 워낙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키운 터라 최병정보다 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제멋대로였다.
광서 순무 낙문의 일가 열댓 명이 마당 가득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중 몇 명은 낙문의 형제와 조카들이었는데, 사실상 그들은 낙문 대신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하는 사람들이었다.
“낙문이 두변에게 쓴 단혼영 맹독을 북명검파에서 제공한 게 맞습니까?”
이문회가 물었다.
낙문의 첩이자 북명검파의 여제자가 말했다.
“비밀 시장에서 우연히 발견해서 삼천 냥 은자를 써서 사온 것이에요. 원래는 북명검파에 넘기려고 했는데, 부군께서 내가 사온 걸 보고 그게 뭐냐고 물었죠. 부군께 사실대로 대답했더니 내가 사 온 걸 가져가셨습니다.”
이문회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부인, 나는 북명검파를 정말 싫어합니다. 북명검파는 대녕 제국의 악의 축이라고 불릴 만하지요. 기회만 있다면 벌써 북명검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겁니다.”
낙문 첩의 눈가에 매서운 눈빛이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북명검파에 대한 그녀의 충심은 더할 나위 없이 컸고, 북명검파를 건드리려는 자는 누구라도 그녀의 적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마음은 경멸로 가득 차버렸다.
‘엄당 나부랭이가 어딜 감히 북명검파를 건드린다는 거야. 웃기지도 않는군. 우리 북명검파가 얼마나 막강한지 모르겠지. 고작 4품 환관 따위가 감히 건드릴 수 있는 파벌이 아니야!’
이문회는 그 여인의 눈빛을 못 본 사람처럼 여전히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쪽이나 낙문의 다른 가족과는 아무런 원한이 없습니다.”
“그럼 북명검파로 돌아가야겠으니 나를 풀어주세요. 북명검파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나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동창 진무사 주제에 북명검파의 일원을 건드리다니, 뒷감당할 자신은 있고요?”
낙문의 첩이 비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당장 풀어주세요.”
낙문의 큰며느리가 딸아이를 여종의 품에 안기면서 외쳤다.
“임씨 가문이 거느리는 병사가 몇만이나 되는 줄 알고나 있어요? 광서, 광동, 운남의 병력 중 3할이 우리 임씨 가문의 것입니다. 고작 4품 관리가 넘볼 수 있는 가문이 아니란 말입니다. 당장 날 풀어줘요!”
순무 낙문의 큰며느리는 본가에서 임 노태야가 생신 연회를 열 때마다 4품 무관들은 앉을 자리조차 없다는 걸 떠올렸다.
아무리 시아버지인 낙문의 관직 생활이 끝장났다고 해도, 이문회는 그저 4품 관리에 불과했다.
차라리 낙문이 평소에 이문회가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미리 경고라도 해줬으면 좋았을까.
아니, 낙문이 경고해줬다고 해도 남을 업신여기는 게 기본인 큰며느리는 오직 관리의 품급으로 사람을 나눴을 것이고, 여전히 이문회를 4품 관리로만 보면서 무시했을 것이다.
이문회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낙문이 나의 의자 두변을 암살하려 했고, 그건 나의 역린을 건드린 것과 마찬가지요. 그러니 나는 어쩔 수 없이 만천하에 피로 증명해야겠습니다. 그 누구든 내 의자를 건드렸다간, 내 역린을 건드렸다간, 일족이 멸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낙문의 첩과 아들, 며느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서 어리둥절해했다.
“나는 북명검파 사람이란 말입니다. 나를 죽였다간, 북명검파가 당신을 능지처참할 것이라고요!”
낙문의 첩이 차갑게 말했다.
“임씨 가문의 사람을 감히 4품 관리 주제에 건드리겠다고요? 우리 가문이 당신네 구족을 멸할 겁니다!”
낙문의 며느리가 아득바득 소리를 질렀다.
이문회가 차분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나도 정말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만, 내게 다른 선택권이 없군요.”
이어서 이문회가 자리에서 일어선 뒤 몸을 돌려서 명령했다.
“세 살배기 딸아이를 데려가거라. 아이가 겁먹지 않게 조심스럽고 따뜻하게 대하도록 해라. 너와 네 부인 사이에 자식이 있긴 어려울 테니, 저 딸아이를 오늘부터 네 딸로 삼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무천추가 대답한 뒤 여종의 품에서 딸아이를 데려왔다.
“나랑 맛있는 사탕 먹으러 갈까?”
무천추가 아이를 달래면서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그는 아이가 무엇도 보거나 듣지 못하도록 한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감싸면서 두 귀를 막았다.
이문회가 다시 한번 낙문 일가의 만행이 정리된 자료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중에 특히 낙문의 첩과 며느리의 악행은 더욱 정도가 심했다.
예쁜 외모와 달리, 두 여인은 가차 없이 사주해서 사람을 죽였다. 이들이 죽인 사람 대부분이 낙문과 낙문 큰아들의 정인, 혹은 애인이었다.
낙문만 믿고 법도도 없이 사람을 죽여댔으니, 이들 모두 두 번씩 처형 당해도 남을 죄질이었다.
“여기 이 낙문의 조카는 광산에 보내서 평생 노역을 시켜라.”
이문회가 명단에서 비교적 죄질이 가벼운 조카 한 명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동창 무사가 열아홉 된 낙문의 조카를 끌고 갔다.
“나머지 열한 명은 신분을 확인한 뒤에 수인을 찍고 모두 죽여버려라.”
조금 전 부드럽던 이문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예.”
동창 무사들이 대답했다.
낙문의 첩과 며느리가 비명을 지르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북명검파가 절대로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놈의 의자 두변도 꼭 죽여버릴 것이야!”
“우리 임씨 가문이 반드시 네놈의 구족을 멸할 것이다!”
울부짖음과 욕지거리 속에서 낙문의 가족 열한 명이 모두 제압되어 땅바닥에 머리가 처박혔다.
서걱.
동창 무사들이 눈 깜빡할 사이에 검을 휘둘렀고, 머리통 열한 개가 동시에 바닥에 떨어졌다.
낙문의 첩, 아들, 며느리, 조카 그리고 형제까지 모두 이문회의 손에 죽었다.
이문회는 누구든 자기 역린을 건드렸다간, 일족을 멸할 것이라는 경고를 만천하에 확실히 한 것이다.
지난번에 강현이 여천천의 동의 없이 두변의 암살을 시도했을 때, 이문회는 그와 그의 형을 죽였다.
이번에 낙문이 두변을 암살하려 했으니, 낙문의 일족도 죽여야 했다.
“이것들을 들고 최정예 무사 팔백 명을 모아서 나와 함께 광주부 양광 총독부로 간다. 이제 광서 순무 낙문을 죽일 차례다.”
“예, 알겠습니다.”
동창 무사들이 큰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