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장. 여씨 가문의 숨통
진무사 관저에 돌아온 이문회는 아직도 혼수상태인 두변을 바라보았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두변의 안색이 점차 나아지고 있었고 일정하고 힘있게 호흡하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그리고 두변의 곁에는 영종오 대종사가 있으니, 이문회는 정말로 안심할 수 있었다.
이문회가 두변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말했다.
“아들아, 이 아비가 너를 위해 광주부로 가서 복수해주마. 그곳이 설령 호랑이 굴이라고 해도, 나는 네 아비로서 낙문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내야겠고, 너를 죽이려 한 걸 후회한다는 말을 들은 뒤에 그놈을 죽일 것이다. 그 어떤 누구도, 비열한 수법으로 네 털끝조차 건드리지 못하도록 단단히 세상에 알리고 오마. 내가 만인에게 보여줘야겠다. 누구든 내 역린을 건드렸다간, 일족을 멸한다고 말이다. 그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꼭너를 위해 복수해주겠다. 금방 돌아오마.”
이문회가 제 이마를 두변의 이마에 살짝 맞댔다.
그리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곧장 밖으로 나갔다.
광서 동창 팔백 명 정예 무사가 진무사 관저에 집결했다.
“출발한다.”
이문회가 명령하자, 팔백 명의 무사가 말을 타고 광주부를 향해 달려갔다.
이제 막 계림에 도착한 이문회는 한 시도 쉬지 못하고 다시 천 리 길에 올랐다.
이번에 그가 죽일 사람은 광서 순무였다.
이번에 이문회가 맞서야 할 사람은 제국의 백작이자, 1품 고관이고, 문관의 거물 중 하나인 양광 총독 고정이었다.
고정은 황제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정도의 권력을 가진 진정한 문관 거물 중 한 명이었다.
이문회와 그의 정예 무사들은 꼬박 이틀이 지나고서야 양광 총독부가 있는 광주성에 도착했다.
이문회가 죽이고자 하는 낙문이 바로 이곳, 제국 남방 권력의 핵심지인 양광 총독부에 숨어있었다.
꼬박 이틀 동안 혼수상태였던 두변이 깨어났다.
두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이문회가 아닌 영종오 대종사였다.
두변이 인사불성 상태이긴 했지만, 이문회가 그를 안고 피눈물을 흘릴 때, 이문회가 그의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을 때, 이문회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아끼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의부는요?”
영종오가 그를 향해 눈을 부릅뜨면서 투정 부리듯 투덜거렸다.
“거참, 너무한 거 아니냐. 내가 그렇게 네 의부보다 못하다는 게냐? 눈 뜨자마자 의부부터 찾다니. 네 곁에 있는 이 사부는 안중에도 없지?”
두변이 멋쩍게 웃었다. 그는 붕대가 칭칭 감긴 영종오의 오른팔을 발견하고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영종오가 오른팔을 아예 못 쓰는 건 아니었지만, 일상생활에 무리가 없는 정도이지 검을 쥐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영종오는 대종사급 무도 강자로 오른손으로만 검을 잡았다. 오른손으로 검을 잡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청각을 잃은 베토벤이 된 셈이었다.
영종오가 두변의 표정을 보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우스갯소리를 했다.
“왜 이놈아. 여인들처럼 눈물이라도 흘려보려고? 내게는 왼손이 있으니 왼손으로 검을 잡으면 된다.”
자신의 오른팔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는 영종오지만, 지금 두변 앞이니 억지로라도 센 척을 해야 했다.
두변이 서둘러 그를 위로했다.
“대종사께서 여여해를 더욱 잔인하게 다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하하.”
“이미 깨어났을 게다. 무공에 큰 손상도 입지 않았을 테고. 성화교에는 아주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일반인이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내가 여여해를 다치게 한 게 여씨 가문에게 좋은 영향이, 우리에게는 나쁜 영향이 될 게다.”
“왜요?”
“이제 다른 사람이 궐기할 것이야. 성화 마녀 여완완이.”
두변의 안색이 급변했다.
“사륭석의 만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영종오가 대답했다.
“사륭석과 만병이 여씨 토사의 영지에서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불을 질렀고,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여씨의 몇만 대군이 그들의 뒤꽁무니만 쫓았다. 그러던 중 교전이 두 번 있었고, 여씨 가문만 몇천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 당시에 여씨 가문의 우두머리인 여여해가 쓰러진 터라 그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여씨 가문에 대한 서남 토사 연맹의 신뢰도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성화 마녀의 출현으로 응집되었던 그들이 다시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그런데요?”
“그렇게 여씨 가문이 끝장나나 싶을 무렵, 성녀 여완완이 삼천 성화교 군단을 이끌고 사륭석과 그 만병을 추격했다. 놀랍게도 사륭석은 이틀 만에 성화교 군단에 패배했고, 만병이 만 명이 희생되었다. 지금은 여씨 가문의 몇만 정예병까지 여완완의 지휘하에 움직이고 있고, 서남 토사 연합군까지 합세해서 사륭석을 완전히 포위했다.”
“뭐라고요? 그럴 리가 없어요. 여완완이 그렇게 대단한 병법을 알고 있다고요? 어떻게 이틀 만에 사륭석의 이만 만병을 무찌를 수가 있어요. 그 이전에 여씨 가문의 몇만 정예병도 사륭석을 어찌할 수 없었잖아요.”
두변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도 이해하긴 어렵지만, 그때 이후로 성화 마녀가 혜성처럼 등장해서 서남 토사를 군림하고 있다. 누구도 성화 마녀를 막지 못하는구나. 지금 여씨 가문은 원래의 기세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더욱 강해졌다. 성화 마녀가 사륭석을 아예 죽이는 날이 온다면, 여씨 가문이 서남 토사 연맹을 장악하는 건 시간 문제다. 그때가 되면, 우리가 맞서야 할 건 수십만 제곱킬로미터 영토에 수백만 인구, 그리고 이십만 대군으로 이뤄진 독립 왕국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된다면, 대녕 제국이 마주해야 할 건 여씨 토사의 반역이 아니라, 여씨 가문이 대녕 제국의 국호를 바꿔버릴 수 있는 위협일 것이다.
다음에 여씨 가문이 다시 병마를 대동하게 될 땐, 이번 같은 보여주기식이 아닌 삼사십만 대군을 이끌고 대녕 제국의 서남을 집어삼킬 것이다. 광서, 운남, 사천, 귀주, 광동 등 몇 개 성, 더 심각할 경우 대녕 제국 전체가 여씨 가문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그날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몇 년?
여씨 가문에게 동맹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여씨 가문은 성화교를 믿는 서역의 몇십 개 제국과 맹우 관계였다. 그곳은 신권이 황권보다 높은 곳이었다.
때가 된다면 몇십만 성화군단이 여씨 가문과 합쳐질 것이고, 그땐 대녕 제국의 멸망이 아닌 중원 지역 전체의 역사가 바뀌는 날이 될 것이다.
두변이 말했다.
“대종사, 우리가 가서 사륭석을 구해야 합니다. 사륭석이 있어야만 여씨 가문이 서남 토사를 장악할 수 없다고요.”
영종오가 고개를 저었다.
“두변, 갈 필요 없다. 내가 이미 그곳에 다녀왔다.”
두변이 깜짝 놀랐다.
대종사께서 언제 벌써 사륭석을 보고 오셨다는 거지? 그곳은 지금 치열한 전쟁터일 텐데, 성하시지도 않은 몸으로 목숨을 걸고 다녀오신 건가?
“설마 사륭석이 투항한다고 했습니까? 사륭석과 대면한 적이 있는데, 그 같은 효웅은 절대로 투항할 리 없습니다. 사륭석은 절대로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릴 사람이 아니라고요.”
두변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영종오가 두변을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얘야, 우리는 구세주가 아니다. 아니지, 어쩌면 너는 구세주일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지금은 네가 모든 일을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막강한 대세 앞에서 한 사람의 힘은 먼지만큼 보잘것없어진다. 지금은 여완완이 사륭 부족을 정복하는 게 기정사실이 되었다. 여완완이 어떻게 이틀 만에 그 일을 해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이 그렇게 됐다.”
두변이 복잡한 눈빛으로 영종오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그건 다른 사람이 만든 판이니, 이제 우리 판을 놔야 한다는 말이군요. 이어서 우리가 할 건, 여씨 가문의 다음 기선을 막는 거겠군요.”
영종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륭석이 실패하면서 지금 대세가 많이 기울었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상황이 악화될 수밖에 없어. 여여해가 혼수상태인 동안, 여완완이 성화 마녀의 이름으로 모든 권력을 쥘 것이다. 여완완은 성화교를 이용해서 서남 토사 연맹을 장악하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고, 빠르면 내년 이맘때쯤 우리가 상대해야 할 것은 통일된 서남 토사 연맹일지도 모르지.”
영종오는 이대로라면 성화 제국이 빠르게 만들어질 거라는 걸 확신했다.
두변이 말했다.
“저들은 대녕 제국의 토사가 아니라, 성화 제국의 친왕이 되길 원하겠군요.”
“그렇지. 바로 그게 중요한 점이야. 여씨 가문이 서남 토사 연맹을 단순히 장악하는 게 아니라, 서로 이익 관계가 맞기에 더욱 빠르게 뭉칠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이익 관계가 가장 막강하니까.”
영종오가 말했다.
두변이 침상에서 몸을 벌떡 일으킨 뒤, 벽에 붙은 지도 앞으로 가서 손끝으로 어딘가를 짚었다.
“여기가 바로 여씨 가문의 숨통입니다.”
두변이 짚은 곳은 광서성 가장 서쪽에 있는 백색부(百色府)로, 여씨 토사부의 영토와 완전히 인접한 곳이었다.
두변이 말했다.
“의부께서 여씨 가문의 광서 거점을 모두 뿌리째 없애주신 덕에 여씨 가문 수입의 절반이 끊겼습니다. 하지만 여씨 가문은 백색부를 통해 더욱 은밀하게 불법 무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백색부를 봉쇄해야만 여씨 가문의 금전 숨통을 완전히 끊을 수 있습니다.”
영종오가 눈을 번쩍 뜨면서 말했다.
“참 똑똑한 녀석이구먼. 여씨 가문이 광서를 요충지로 두긴 했지만, 10년 전부터 백색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백색부가 명목상으로는 대녕 제국 조정 소속이긴 하지만, 그곳의 관아와 모든 관리가 여씨 가문의 명령을 따르지. 그곳이 여씨 가문의 영토가 아님에도 말이다. 여씨 가문이 암암리에 거래한 소금, 철강과 무기, 그리고 포목을 백색부를 통해 대녕 제국 안으로 운반하고, 대녕 제국의 각 항구를 통해 적국으로 화물을 운반한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저지른 불법 무역의 액수가 무려 천문학적인 숫자에 달하지.”
여씨 가문의 영토는 북쪽으로는 안륭 토사부, 서쪽에는 광서성, 남쪽에는 안남 왕국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오직 백색부만이 여씨 가문의 유일한 출구라 할 수 있었다.
영종오가 말했다.
“당장 중요한 건 네가 졸업 시험을 잘 마무리하는 것이다. 졸업 시험을 잘 쳐야 할 텐데, 아직 연단학을 배우지 않았지? 오늘 내로 내가 꼭 다 가르쳐주마.”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이미 준비됐어요.”
어젯밤, 두변은 단혼영을 단전에 넣은 뒤로 꿈속 세계에서 오직 연단학만 연마했다.
꿈속 세계에서 그는 연단 한 알을 몇천 번 만들었고, 수천 번의 실패 끝에 아주 완벽한 연단을 만들어냈다.
그가 만든 완벽한 연단이 바로 오늘 연단학에서 시험볼 내용이었다.
영종오가 말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시간을 더는 지체할 것 없이 얼른 가서 시험을 치르거라.”
이문회가 막무가내로 두변이 돌아올 때까지 졸업 시험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이문회도 더는 환관 학원의 산장이 아니니 굳이 그의 말을 따를 필요는 없었지만, 졸업 시험은 그의 말에 따라 미뤄졌다.
이삼일이면 모르겠지만, 시간이 그보다 더욱 길어지게 된다면 사람들의 원성을 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두변이 즉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아침을 간단하게 먹은 뒤, 환관 학원으로 갈 채비를 했다.
“대종사, 그나저나 의부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영종오가 대답했다.
“낙문을 죽이러 광주부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