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장. 총독의 전율
광주부, 양광 총독부 안.
수백 명이 넘는 사람이 총독부의 대청 안에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는데, 다들 누군가를 죽여야만 한다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총독 대인, 저희 노야 좀 살려주십시오. 저희 축씨 가문은 대대손손으로 제국을 위해 충성을 다했습니다. 제 부군은 백 번도 넘게 전장을 누비셨고, 혁혁한 공로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세웠습니다. 퇴직하신 뒤로도 노후를 여유롭게 보내기는커녕, 남해도장에서 심혈을 기울여 황제를 위해 후대 양성에 힘을 쏟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엄당 이문회 그놈이 사적인 울분을 공적으로 풀어서 무고한 제 부군을 납치해갔습니다. 정녕 제국의 충신이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겁니까!”
“총독 대인, 엄당의 앞잡이 이문회가 감히 병력을 동원해서 남해도장을 공격했습니다. 그놈이 얼마나 많은 학생을 죽였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모두 제국의 미래였습니다!”
“총독 대인, 당장 이문회를 죽여주십시오. 엄당 주구 주제에 제 아들을 죽였습니다. 제 아들은 저희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단 말입니다.”
“이문회가 서원인 남해도장을 공격하고, 그곳의 학생들을 가차 없이 죽였습니다. 천 년 동안 어디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런 간신을 처단하지 않으면, 장차 제국의 미래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이문회가 남해도장을 공격하고, 이백여 명의 학생을 죽였다는 소식이 곳곳에 퍼졌다.
이 소식은 광서 전체, 아니, 제국의 남쪽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사건인지라, 제국 전역까지는 소식이 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소식이 제국 전역에 퍼지는 순간, 제국은 또 한 번 충격에 빠지고 말 것이다.
남해도장의 학생들은 문관 가문, 무관 명문, 사대부, 부호, 훈귀 가문 출신인지라, 이들이 힘을 합친다면 이문회가 결코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거대한 그물망이 만들어질 것이다.
소식을 들은 수백 명의 부모가 양광 총독부로 몰려들어서 총독 고정에게 출병하여 이문회를 참살하라고 청을 올리고 있었다.
“총독 대인! 대인께는 황제께서 하사하신 상방보검(尙方寶劍)이 있지 않습니까. 정의를 위해 엄당의 주구인 이문회를 처단해주십시오. 일단 그놈을 죽이고 보자고요!”
대청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고정도 두피가 저릿해졌다.
‘이문회라는 놈이 이렇게 미친놈일 줄은 몰랐군. 보통 미친 게 아니라 제대로 미쳤어!’
고정의 눈높이에서는 이문회가 왜 그렇게 낙문과 축무애 등을 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낙문과 축무애 등은 여씨 가문에 철저히 포섭되었고, 이들은 여씨 가문이 광서성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게 만드는 꼭두각시였다. 그러니 이들이 완전히 없어져야만 광서성까지 뻗친 여씨 가문의 촉수를 완전히 끊어낼 수 있다.
게다가 이제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도 하고, 돈맛을 본 이들을 설득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터라, 이문회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칼을 들고 이들을 청소해버리는 것이었다.
성화 마녀의 위력이 세지면 세질수록 여씨 가문이 재기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질 테니 말이다.
고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축무애도 끝까지 비겁했군. 남해도장의 학생들을 인간방패로 쓰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문회가 남해도장의 학생들까지 죽일 줄이야.
정말 광인이 따로 없군.
황제를 위해 충성을 다한다고 해도, 제 목숨까지 바칠 필요가 있나.
남해도장을 공격해서 수백 명의 학생을 죽이는 게, 어떤 정치적 뒷감당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여씨 가문의 광서 거점을 뿌리째 뽑고, 여씨 별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각한 것도 알고 있을 것이고.
고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 사건이 아직 제국 전역에 퍼지지 않아서 망정이지, 이 소식이 제국 전체에 퍼지게 되는 날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조차도 상상되지 않아.
서원을 공격해서 수백 명의 학생을 죽이는 사건은 대녕 제국의 몇백 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야. 아니,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그런 일은 없겠지.
고정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이문회, 넌 황제의 심복으로서 그런 짓을 하면 어떤 결과가 따를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런 짓을 했는가?
고정은 이문회의 목적을 은근히 짐작하고 이내 숙연해지고 말았다.
기둥까지 썩어 문드러진 대녕 제국에 이런 충신이 있었다니. 이문회, 이런 대녕 제국을 두고도 그런 희생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지만 도부동, 불상위모(道不同, 不相爲謀: 지향하는 도가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 논어)라 했다. 이문회가 충신이든 아니든, 양광 총독 고정이 내릴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이문회를 완전히 매장시키는 것.
오랜 생각 끝에, 양광 총독 고정이 깊게 심호흡을 한 뒤에 입을 열었다.
“여봐라. 광동 여경사 진무사를 불러라. 내 영패를 가지고 계림부로 가서 광서 동창 진무사 이문회를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려야겠다.”
“알겠습니다.”
수하가 대답했다.
고정의 말을 듣자, 대청에 무릎을 꿇고 있던 수백 명의 사람이 환호했다.
“총독 대인께서 영명하십니다!”
“상방보검으로 이문회를 처단해주시지요!”
“일단 죽이고 봅시다!”
조금 전, 명령을 전하러 떠났던 수하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고정 앞에서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총독 대인, 광서 동창 진무사 이문회가 천 명에 달하는 동창 무사를 이끌고 이곳 양광 총독부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환호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양광 총독 고정의 두정골을 누군가 쪼개기라도 하듯 머리가 아파왔다.
이문회가 광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매섭게 휘몰아치는 놈일 줄이야!
이문회가 제 발로 이곳을 찾아와 양광 총독부를 공격할 줄이야!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미친놈이 아닌가!
광서 동창 진무사는 4품관에 불과하고, 양광 총독은 제국의 1품 고관이었다. 게다가 고정은 백작에 봉해진, 양광의 군사와 정치를 장악하는 양광 총독이었다.
그런데 고작 4품관이 1품 고관을 공격한다고 하니, 고정은 기가 찼다.
총독 고정은 조금 전까지 이문회의 의도를 추측했지만, 이제는 그의 의도와 목표를 확신할 수 있었다. 황제와 제국을 위해서 정말로 목숨까지 내놓는 이문회의 행동에 감탄할 뿐이었다.
이문회는 자기가 도망칠 수 있는 뒷길을 전혀 만들지 않고, 오직 전진만 하는 장기의 차(車)였다.
신이 길을 막으면 신을 죽이고, 부처가 길을 막으면 부처를 죽이면서, 이문회는 오직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전진하고 있었다.
고정이 속으로 말했다.
문회 공, 내 진정으로 자네에게 탄복하네.
하지만 내 배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내 눈앞에서 무릎 꿇은 이들을 위해 자네를 제거해야겠네.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니, 어쩔 수 없게 됐군.
제국의 문관 거물인 양광 총독 고정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이문회가 이끄는 팔백 명의 동창 무사가 총독부의 대문을 빈틈없이 포위했다.
총독부에서 보초를 서던 수십 명의 병사가 겁에 질려서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긴 총독부야! 지금껏 한 번도 포위당한 적도 없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적도 없는데, 이게 지금 황제가 바뀌는 거야?
그때 고정 총독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문회가 말에서 내려 공손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하관 이문회, 총독 대인을 뵙습니다.”
“이 진무사, 무사들을 이끌고 총독부를 포위한 저의가 무엇이냐?”
고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인, 범관(犯官: 부정을 저지른 관리) 낙문이 이곳에 있는지요?”
이문회가 물었다.
“그렇네만, 무슨 문제가 있나?”
고정이 뒷짐을 지고 깔끔하게 인정했다.
“총독 대인, 제가 범관 낙문을 광서로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지요.”
양광 총독 고정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이문회를 바라보았다.
“만약.”
이문회가 고개를 들었고, 고정이 뒷말을 덧붙였다.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쩔 것이오?”
이번 졸업 시험에서 두변은 세상에 둘도 없을 특권을 누린 셈이었다.
두변이 돌아오지 않는 한, 졸업 시험이 재개되지 않는 특권.
환관들은 아주 까칠하고 예민한 사람들인지라, 두변은 자신이 환관 학원으로 돌아갔을 때 그를 아니꼬워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웬걸, 두변이 환관 학원에 들어가는 순간, 학생들이 그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활짝 웃으면서 그를 향해 달려왔다.
“두변 대사가 오셨다! 두변 대사가 오셨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앞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손뼉을 친 건지 몰라도, 학생들은 연신 손뼉을 치면서 그를 환영했다.
“두변 대인의 쾌유를 축하합니다!”
“두변 대인의 쾌유를 축하합니다!”
학생들이 몇 번이고 외치면서 그의 쾌유를 축하했다.
환관들은 태생이 위선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두변을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에서는 한 치의 거짓도 보이지 않았다.
그를 향해 환호하는 학생 중, 예전에 두변과 같은 방을 쓰면서 그를 괴롭혔던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변의 이불에 오줌을 싸서 두변에게 뺨을 맞았던 그 몇 명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학생들도 두변을 진심으로 열렬히 환영하고 있었다.
그 순간, 두변은 깨달았다.
환관들은 선천적인 약자다. 그렇기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의지하고 빌붙을 절대 강자를 갈망한다. 그들은 엄당에 진정한 영웅이 나타나길 바랐고, 그 영웅에게 모든 걸 의지하고 싶어 했다.
당엄이 광서 엄당의 우상이 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의 우상이 당엄에서 두변이 되었고, 그들은 두변이 쾌유하기를 누구보다 바랐고, 계속해서 천재의 행적을 보여주길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환관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장점과 결점을 모두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집단이다. 그들이 악독할 때는 이보다 더 악독할 수가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충성을 바칠 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충성스러웠다.
이 순간, 두변의 가슴은 학생들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사람이 혼자서 이 세상과 맞서 싸우기보단, 다 같이 힘을 합쳐서 싸워야 하니까.
지금은 두변이 한없이 어린 환관이라 이런저런 부족한 점이 있지만, 그는 언젠가 이들의 장대한 나무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땐 이들이 두변의 그늘 아래서 비를 피하면서, 그의 날개 아래서 서로를 보호하면서 그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울 것이다.
두변은 자신을 환영해주는 학생들을 향해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그러자 수백 명의 학생이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일제히 두변을 향해 깍듯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산장 서재의 창문 옆에 서 있던 왕굉과 당엄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왕굉이 말했다.
“원래 인심은 물과 같고, 민심은 연기와도 같은 것이다. 저런 데에 신경 쓰지 말고 남은 졸업 시험에 집중하거라. 네가 일등을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네가 수석을 차지하기만 하면, 동창의 그 자리가 바로 네 것이 될 게다. 그때가 되면 네 시작은 남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을 것이고, 저들은 다시 네게 빌붙으려 할 것이다.”
당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변과 당엄의 점수차는 아직까지 6.5점이나 되었다.
우연히도 당엄이 선택한 잡학 과목이 연단학이었고, 당엄이 연단을 특출나게 잘하는지라 두변이 그를 이길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당엄은 두변의 연단 실력이 어떤지 장담하기 힘드니, 모든 정신을 마지막 시험인 전투 무도에 쏟기로 했다.
전투 무도는 말 그대로 무예를 겨루는 결투였다.
당엄은 자기가 6품 중급 무사이고, 두변은 죽었다 깨어나도 7품 무사도 안 될 테니, 분명히 자신이 두변을 이길 것이라 확신했다.
전투 무도는 아주 잔인한 과목으로, 모두가 각자의 실력으로만 승부를 가릴 수 있지, 그 어떤 꼼수도 쓸 수 없었다.
두변이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얼마 전까지 무도 햇병아리던 사람이 전투 무도까지 잘할 리가 없었다.
당엄은 짧게 한숨을 토했다.
졸업 시험에서는 결국 당엄 자신이 수석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