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장. 신세계
광주, 양광 총독부 안.
총독 고정이 바닥에 떨어진 낙문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 있던 여경사 진무사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그는 놀란 나머지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문회가 낙문을 체포하는 건 그럴 수 있다 쳐도, 양광 총독 앞에서 낙문을 죽였다는 게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정말 미치광이가 된 건가? 총독 대인 앞에서 낙문을 죽이다니. 이걸로 어떤 뒷감당을 해야 할지 알고 일을 저지르는 거야? 아주 하늘을 들쑤시다 못해 찢어버리려고 작정을 하는구나!
한참이 지난 뒤, 총독 고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 물러가거라. 이문회와 잠시 둘이 있겠다.”
여경사 진무사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경악해서 되물었다.
“대인?”
“물러가래도.”
고정이 단호하게 말했다.
여경사 진무사가 입을 꾹 다물고 몇백 무사를 데리고 물러갔다.
이문회도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나가 있거라.”
동창 무사들은 즉시 알겠다고 대답한 뒤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는 이문회와 고정 두 사람만 남았다.
고정이 이문회를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낙문을 여기서 죽이게 만든 건 대인이십니다. 제가 낙문을 데리고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면, 이곳에서 낙문을 죽여야지요. 아, 괜한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제가 무슨 짓을 하든, 당신들이 폐하께 퇴위를 강요할 기회는 절대로 만들지 않을 것이니.”
“일을 이렇게 매섭게, 성급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고정이 다시 물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들이 제국의 골수를 팔아넘기는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라서 말이지요. 여여해가 중상을 입었더니, 여완완이 그의 자리를 대체하고 이틀 만에 사륭석을 격패했고, 더욱 빠르게 서남 토사 연맹을 합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도 보폭을 늘려서 갈 수밖에요.”
이문회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이문회가 틀린 말 한 건 아닌지라, 고정은 잠시 대꾸할 말을 찾다가 다시 물었다.
“문회 공, 자네가 죽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다. 해외로 가는 건 어떻겠나?”
이문회가 대답했다.
“하늘 아래 드넓은 땅 중 폐하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육지부터 바다까지 폐하의 신하가 아닌 이가 없습니다.”
고정 총독이 말했다.
“신세계를 개척해보는 게 좋지 않겠나.”
이문회가 고개를 저었다.
“대인께서 말씀하시는 신세계는 제국의 어제입니다. 당신들이 버리고자 하는 구세계가 당신들의 내일이 되겠지요. 그리고 이 땅에서는 당신들이야말로 구세계입니다. 제국을 찬탈하려는 음모를 세우는 자들이 정말로 신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고정 총독이 쓴웃음을 지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니, 갈 길이 다른 건 당연하지. 하지만 문회 공, 내 말은 자네가 꼭 이렇게까지 자기를 다 버려가면서 대의를 위해야 하냔 뜻이다.”
이문회가 대답했다.
“제가 가진 것이라곤 보잘것없는 몸뚱이뿐입니다.”
고정 총독은 더는 이문회를 회유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그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문회 공, 조심히 가게. 내 멀리서 자네의 명복을 빌겠네.”
이문회도 더는 말을 하지 않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서 예를 표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낙문의 머리를 주워서 양광 총독부를 나섰다.
총독부 밖에는 팔백 명 동창 무사와 팔백 명 여경사 무사가 일촉즉발의 상태로 대치 중이었다.
이문회가 말 위로 몸을 날린 뒤 명령을 내렸다.
“광서로 돌아간다.”
광동 여경사 진무사가 흠칫 놀랐다. 그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서 양광 총독 고정을 쳐다보았다.
“대인!”
고정의 명령 한마디면 여경사 무사들은 즉시 동창 무사들과 격렬한 사투를 벌일 것이다. 하지만 고정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조용히 이문회를 눈으로 배웅했다.
이때, 지면이 요란하게 울리고, 광주 참장이 몇천 명의 주둔병을 이끌고 총독부 앞에 도착했다.
광주 참장이 고정 앞으로 달려가서 무릎을 꿇었다.
“대인, 죄송합니다. 소장이 늦었습니다. 지금 명령만 내려주시면, 소장이 저놈의 엄당 주구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겠습니다.”
고정은 참장이 무릎을 꿇든 말든 꿈쩍 않고 서 있었다.
수천 명의 대군이 바라보는 가운데 동창 무사 팔백 명을 거느린 이문회의 뒷모습이 점점 더 멀어져갔다.
잠시 후, 이문회의 맞은 편에서 천오백 명의 병사가 그를 향해 달려왔다.
운남 어마사 이옥당이 천오백 명 기마병을 이끌고 몇 날 며칠을 달려서 계림부로 향했는데, 이문회가 광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급히 광주 양광 총독부로 달려온 것이다.
그가 이끌고 온 병력은 동창과 어마사의 기마병이었다. 이들이 정식 주둔군은 아니지만, 황제의 성지 없이 두 성의 병력을 동시에 동원하는 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옥당은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공문을 하나 준비했는데, 칙명을 받고 바쁘게 움직이는 이문회를 위해 군마를 호송한다는 내용의 공문이었다.
말 스무 필을 호송하기 위해서 천오백 명 기마병이 동원된 셈이었다.
멀리서 보내온 거위 깃털 하나라고 하지 않던가.(천리송아모千里送鵝毛 : 선물은 보잘것없지만 두터운 정성을 담고 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 <노사路史>)
운남 어마사 이옥당이 이문회를 보자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다짜고짜 큰소리로 화를 냈다.
“이문회, 지금 뭐 하자는 것이냐. 허구한 날 나한테 뒷감당 생각하지 않는 미친놈이라고 욕하더니, 지금 네 꼴을 보아라. 내가 더 미친놈이냐, 네가 더 미친놈이냐? 너를 구하기 위해서 내가 몇 날 며칠을 길 위에 있었는 줄 아느냐. 네가 광주부에서 죽어버리면, 나더러 무슨 낯짝으로 의부를 뵈라고!”
광서 환관 학원.
네 시진이 지났을 무렵, 약 이백 명 수험생의 연무가 끝났다.
이제 환관 학원의 졸업 시험은 전투 무도의 마지막인 비무만 남았다.
환관 학원의 모든 학생과 선생이 무도 대련장 주위를 빽빽하게 채웠다.
이 비무는 광서의 엄당 청년 지도자를 가리는 기념적인 결투가 될 것이다.
대부분 엄당 학생은 두변에게 마음이 기울었고, 그의 승리를 바랐다. 하지만 두변이 이길 것이라 기대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무도에는 잔머리가 통하지 않고, 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왕굉은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지만, 당엄이 폭원단까지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당엄이 필승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엄은 이도진 종사가 준 폭원단을 먹었고, 그녀가 빠르게 전수해준 멸절검법(滅絶劍法)까지 익혔다.
지금의 당엄이라면, 두변 열 명이 있어도 1초 만에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당엄과 두변이 십여 미터 간격을 두고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폭원단을 먹어서인지 당엄의 얼굴이 평소보다 불그스름했고 눈빛은 이상하게 요사스러웠다.
당엄은 그 어느 때보다 승리를 갈망했다.
폭원단을 먹은 당엄은 일각 동안 자신의 무공을 3할 이상 발휘할 수 있지만, 그만큼 내력을 소진해야 해서 일시적인 후유증도 겪어야 한다.
하지만 당엄은 일시적인 후유증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당엄은 내력 현기를 극에 달할 정도로 끌어모았고, 대련을 시작하는 종소리가 울리는 즉시 멸절검법을 써서 두변의 단전을 망가트릴 생각이었다.
얼굴이 상기된 당엄에 비해서 두변은 한결 평온해 보였다.
그는 내력 현기를 극에 달할 정도로 끌어모으지 않고, 적당한 내력 현기와 3분의 1 정도의 단혼영을 천천히 체내에서 운용했다.
땡!
종소리가 울렸다.
비무 시작!
죽어라, 두변!
당엄이 속으로 외치면서 모든 내력이 응집된 멸절 검기를 두변을 향해 쏘아냈다.
당엄이 검기를 내뿜는 동시에 두변도 검을 들어서는 내력 현기에 단혼영이 섞인 검기를 쏘아냈다.
새로운 무도 역사를 펼칠, 전무후무한 정신 공격의 순간이었다.
스윽!
당엄은 갑자기 눈앞이 새까매지면서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왔다. 일순간 그는 제 몸의 통제력을 잃었고, 온 내력을 다해 쏘아냈던 멸절 검기의 방향이 슬쩍 빗나갔다.
두변이 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당엄을 향해 돌진해서는, 날카로운 검으로 그의 가슴팍을 베었다.
서걱.
당엄의 앞섶이 검에 베여 찢어지고, 그 사이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두변이 곧바로 당엄을 발로 찼다. 당엄의 몸이 그대로 공중에 뜨면서 가슴팍에 피를 흩뿌리며 대련장 밖으로 날아갔고, 쿵 소리를 내면서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렇게 1초 만에 비무 시합이 끝났다.
이로써 학원의 졸업 시험도 끝났다.
왕굉과 당엄 모두 비무 시험이 1초 만에 끝날 것이라 예상했었다. 다만 1초 만에 지게 될 사람이 당엄 자신이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이옥당과 이문회는 나란히 광서로 돌아왔다.
이옥당은 너무 속상한 나머지 여전히 이문회를 향해 온갖 성을 냈다.
“이문회, 네 머릿속엔 도대체 뭐가 든 것이냐? 도대체 정말로 미친 거냐?
남해도장의 몇백 명 학생을 학살해? 나도 감히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짓이거늘! 몇백 년 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란 말이다!
그리고 광서 순무 낙문을 체포하라고 했지, 총독 대인까지 있는 자리에서 그놈을 죽여야만 했냐? 그놈은 조정의 2품 관리란 말이다. 그리 경솔한 행동을 하다니, 네 행동이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느냐?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어디 말이라도 해보거라.
냉정한 모습의 이문회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냐!
다들 나 이옥당을 동창의 미친개라고 부른다. 앞뒤 안 가리고 누구든 물어뜯는 미친개라고. 하지만 너는 동창의 독사 아니더냐. 항상 냉정하고, 철두철미하게 일을 처리하고, 조용히 지켜보다가 한 번 물었다 하면 절대로 놔주지 않는 독사 말이다. 그런데 네 최근 행적을 보면 나보다 더 미친개 같단 말이지.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니까!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어떻게 하려고 이런 짓들을 저지르는 것이야!
두고 보아라. 며칠 후면 천하가 뒤흔들릴 것이다. 또 무수히 많은 상주서가 황궁을 향해 쏟아질 것이고, 또 무수히 많은 대신이 폐하를 위협하며 퇴위를 강요할 것이다. 네가 벌인 짓을 생각하면 이번에는 문무 집단이 절대로 지난번처럼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폐하께서도 너를 지켜주실 수가 없어!”
이문회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이옥당을 바라보면서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옥당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절대로 그들이 폐하께 퇴위를 강요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광서에서 벌인 일들 때문에 걱정이 많으셨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옥당이 탄식했다.
“너와 내가 형제지간으로 지내면서 수십 년을 다퉈왔지만, 지금 시기에는 힘을 합쳐야만 한다. 이번 난관을 어떻게 함께 헤쳐가야 할지 방법을 생각해보자꾸나.”
흥분을 좀 가라앉힌 이옥당의 눈앞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앞쪽 멀지 않은 곳에 관리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일렬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이강 서원 산장 구양담, 광서 안찰사, 계림부 지부, 염주부 지부, 남녕부 통판 등 십여 명의 관리들이었다.
광서의 고위 관직자 태반이 이곳에 모인 것이다.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이옥당이 하얗게 질려서는 이문회를 쳐다보았다.
“이문회! 지, 지금 뭐 하려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