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장. 장양명, 관직을 얻다
안남 국왕이 아직 태자일 적에 대녕 제국에서 글공부를 했었는데, 당시 천윤제와 함께 영종오에게 학문과 무도를 배웠다. 천윤제가 이문회를 벗으로 대한 만큼, 자연스럽게 여창과도 친해졌다.
여창은 일국의 태자였지만 부끄럼이 많고 감수성이 풍부했다. 그가 대녕 제국 경성에서 공부할 때, 천윤제의 누이인 영신 공주를 무척 좋아했다.
영신 공주는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몹시 털털하고 사내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여창과 호형호제하면서 친하게 지냈고, 같이 무도 수련을 할 땐 힘을 조절하지도 않고 인정사정없이 여창을 패고는 했다.
매번 영신 공주가 여창을 바닥에 눌러 놓고 두드려 팰 때, 여창은 흙먼지를 먹으면서도 좋다고 헤실거렸다.
영신 공주가 다른 사내들과 조금이라도 가깝게 지내는 걸 보면, 여창은 속상해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영신 공주는 장난기가 많고 그 어떤 사내와도 호형호제하면서 가깝게 지낸 터라, 여창은 영신 공주가 사내들과 어울리는 걸 볼 때마다 속상해서 사흘이 멀다 하고 끼니를 걸렀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음에 품고 있었지만, 누가 먼저 고백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다 천윤제가 두 사람의 마음을 눈치챘고, 그대로 사혼 성지를 내렸다.
어느 날 누군가가 영신 공주에게 어쩌다 여창같이 유약하고 부끄럼이 많은 사내를 좋아하게 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제멋대로 설치는 그자에게 반문했다.
“그럼 당신은 왜 여리여리한 여인들을 좋아합니까? 여창이 예쁜 게 뭐 어때서요? 나중에 낳을 아이가 얼마나 예쁠지 상상이나 됩니까? 당신같이 못생긴 사내들은 나중에 낳는 아이들도 당신을 닮아서 아주 못생겼겠지요. 생김새 때문에 애를 낳자마자 버리고 싶어지면 어떡합니까?”
그자는 예상치 못한 외모 공격에 곧 울먹이면서 집으로 뛰어갔고, 밤새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기가 그렇게 못생겼는지 확인했고, 여창같이 예쁘장한 사내가 뭐가 그렇게 좋냐며 씩씩댔다.
여창과 영신 공주는 혼례를 올린 뒤에 안남 왕국의 공식 잉꼬부부가 되었는데,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어디를 가나 함께였다. 아, 정확히 말하면 여창이 영신 공주를 졸졸 쫓아다녔다.
민간에도 이렇게 서로를 은애하는 부부를 보기 힘든데, 하물며 왕실에서 이런 부부를 보게 되니 백성들은 이 둘이 마냥 보기 좋았다.
안남 왕국에 내란이 일어난 뒤, 국왕 여창은 사기를 돋우기 위해서 수차례 전장을 누벼야 했다. 그가 최전방으로 나갈 때마다 무공 실력이 뛰어난 영신 공주가 그와 함께했고, 몇 번은 직접 갑옷을 입고 여창의 곁을 지켰다.
만약 인품이 좋기로 소문난 여창 부부가 안남의 병사들과 백성, 신하들에게 이토록 추대받는 게 아니었다면, 안남 왕국은 벌써 반란군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안남 왕국은 여창 이전의 두 명의 혼군으로 인해서 국력이 쇠퇴할 만큼 쇠퇴했고,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심각했기 때문이다.
이문회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참자, 이연정이 그가 못한 말을 눈치채고 물었다.
“두변 그 아이에 관해서 말하려는 게지?”
이문회가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부께서 경성으로 돌아가실 때, 두변 그 아이를 한 번 만나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연정이 말했다.
“사실 이미 그 아이를 한 번 마주쳤다. 어젯밤에 계림에 도착했을 때 네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곧장 광주로 가려고 했는데, 계림에서 나오던 길에 한 청년이 내 앞길을 막았다. 신발도 신지 않고 머리카락은 죄다 헝클어져서는 내게 지도와 이 산이 그려진 그림을 쥐여줬지. 그 청년이 아니었다면 네가 여기 있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느냐. 내가 어떻게 해가 뜨기 전에 너를 찾았겠느냐.”
이문회는 당시 이연정과 두변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꼈다.
이연정이 이어서 말했다.
“그 아이에게 신기가 있는 거 아니냐? 어떻게 네가 이 산에 있을 줄 알고, 어떻게 네가 자결할 줄을 알았던 것이냐?”
“의부, 저는 두변이 하늘이 내려주신 엄당의 천재라고 생각합니다. 그 아이는 장차 대녕 제국의 중흥을 이룰 수 있는 인재입니다.”
이연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언제부터 그런 미신 같은 걸 믿게 된 것이냐.”
이문회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의부께서 예전에 제게 해주신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절망해도 희망을 내려놓지 말라고요. 그게 설령 신령을 믿는 것이라도요.”
이연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원 그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데려다 키운 아이다. 그 아이도 참 괜찮은 아이인데. 됐다. 네 고집을 못 꺾겠구나. 내가 두변에게도 기회를 주마. 두 사람이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겠다.”
이문회가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의부.”
이연정이 이문회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오랜만에 부자 둘이서 태양을 잠시 보다 내려가자꾸나. 너는 곧장 남쪽으로 내려가서 안남 왕국으로 가거라. 어차피 다시 만날 테니, 두변과의 작별인사는 생략하고. 불길하게 작별은 왜 하느냐.”
이연정의 핀잔에 이문회가 살짝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한 뒤, 그와 함께 조용히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온몸으로 태양을 느꼈다.
이연정이 눈을 감은 채 당부했다.
“안남 왕국으로 가면 네가 지금처럼 해야 할 게 많진 않을 것이다. 마음을 좀 가라앉히면서 무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고, 가능한 한 빨리 종사급 수준을 뛰어넘거라. 그래야만 폐하를 더욱 잘 보필할 수 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작별인사하고, 하산하자꾸나.”
“예.”
산에서 내려온 뒤, 이연정은 곧장 서쪽으로 떠났다.
이문회는 무릎을 꿇고 이연정이 떠난 방향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이연정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이문회는 황제의 성지를 따르기 위해 안남 왕국으로 향했다.
백 리쯤 갔을 때, 이연정은 길에서 두변을 마주쳤다.
“창공, 제 의부는요?”
두변이 다급하게 물었다.
이연정이 두변을 보고 흠칫 놀랐다.
“부자지간 이심전심이라더니, 그 말이 진짜로구나. 이문회는 안남 왕국으로 갔으니 쫓아갈 필요도 없다. 여인네들도 아닌데 눈물이라도 쥐어짜면서 작별하려고?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단호한 이연정의 태도에 두변은 뭐라 더 묻지도 못하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연정의 뒤를 따라가던 두변은 어째 가는 길이 점점 더 외지고 황량하다는 걸 알아챘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빈곤한 촌락이었다.
말에서 내리자 마침 한 아이가 학당에라도 가는 듯이 가방을 메고 걸어가는 게 보였다.
‘이렇게 외지고 빈곤한 곳에 학당이 있다고?’
두변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연정이 말에서 내린 뒤, 그 아이에게 다가가 사탕 하나를 내밀면서 물었다.
“아가, 장양명이라는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
아이가 이연정의 손에 있는 사탕을 바라보면서 군침을 흘리면서도 손을 뻗어서 사탕을 건네받진 않았다.
“장 할아버지의 벗이신가요?”
아이가 예의 바르게 물었다.
이연정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나는 장 할아버지의 벗이다.”
“장 할아버지께서 저희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계세요. 저를 따라오세요.”
아이는 끝내 이연정에게서 사탕을 받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이를 따라 거의 무너져가는 허름한 사당에 도착했고, 사당 안은 초라한 학당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미 십여 명의 아이들이 이곳에 앉아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는 아이들은 한 명도 없었고, 사내아이 몇 명은 아예 엉덩이를 내놓은 채 공부하고 있었다.
일대 대사 장양명이 자애롭고 엄숙한 표정을 하고 학당 앞쪽에 앉아 있었고, 아이들이 소리 내어 책을 읽는 것을 감독하고 있었다.
장양명은 수십 년 넘게 대녕 제국에서 가장 학문이 뛰어난 대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황제의 스승이었고, 전 봉강대리, 정2품 대관 도어사(都御史: 도찰원의 장관. 도찰원은 모든 벼슬아치의 비위非違를 규탄하고 지방행정의 감찰을 맡아보던 관청이다.)였다.
장양명은 삼베옷을 입은 연로한 농사꾼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일대 종사의 기개를 느낄 수 있었다.
이연정과 두변을 본 그는 흠칫 놀라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맞이했다.
“밖에서 말씀 나누시지요. 아이들이 공부하는 걸 방해하지 맙시다.”
장양명이 말했다.
“이 공이 내 목숨을 구해주었던 것을 제대로 감사하지 못했는데, 오늘에서야 제대로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장양명이 이연정을 향해 허리 숙여 예를 올렸다.
장양명은 지난번 이문회를 마주쳤을 때도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었다. 강직하고 바른말을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매일 누군가의 미움을 사고 목숨을 잃는 위험에서 살고 있다.
이연정도 겉치레를 잘 못 하는 사람인지라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장 공, 폐하께서 나를 보낸 이유가 있습니다. 은둔 생활을 그만하고 차기 광서 순무로 출사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장양명이 깜짝 놀라면서 되물었다.
“낙문이 그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걸로 아는데, 그자는 승진한 겁니까?”
장양명이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이미 심지를 잃은 사람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더는 관리를 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젠 이런 촌마을에서 아이들 글공부나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연정이 장양명의 말을 다 들은 뒤에야 말했다.
“낙문은 죽었습니다. 내 아들 이문회에게 죽임을 당했지요. 낙문뿐만 아니라, 광서 포정사도 감옥에 갇혔고, 광서 안찰사, 계림부 지부, 염주부 지부 등 십여 명의 광서 고위직 관리들이 내 아들의 손에 죽었소이다. 광서 관리 사회 중 절반 이상이 죽은 겁니다. 그리고 문회가 여씨 가문이 광서에 심어뒀던 모든 거점을 뿌리째 뽑았고, 광서성에 잠입해 있던 여씨 가문 수천 명도 죽였습니다.”
얘기를 듣던 장양명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문회가 한 일들은 광서의 하늘을 찢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문회 공의 명복을 빕니다.”
장양명이 통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아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문회가 했던 일들을 내가 넘겨받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관리들이 생전에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철저히 조사해서 죄목을 정리했고, 이미 죽은 사람을 다시 죽였습니다. 그 뒤로 나는 폐하께 동창 대도독 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씀드렸고, 이젠 폐하의 곁에서 폐하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한량이 되었소이다. 문회가 죽인 모든 이들은 내가 죽인 게 되었으니, 문회는 죽지 않고 안남 왕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양명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이연정을 바라보았고, 두변도 놀란 표정으로 이연정을 바라보았다.
두변은 그제야 이문회가 살 수 있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잠시 후, 장양명이 이연정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이연정이 가볍게 답례한 뒤, 이어서 말했다.
“나의 아들 문회가 광서를 피로 씻어냈으니, 지금이 광서가 가장 깨끗할 시기일 겁니다. 여씨 가문이 서남 토사 연맹을 빠르게 단합하고 있고, 성화교의 신권을 이용해 더욱 박차를 가할 겁니다. 이대로 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새로운 여씨 왕국이 탄생할 것이고, 몇 년 후면 수십만 대군이 제국을 공격할 겝니다. 그때가 되면, 여씨와 안남 반란군이 합세하여 진남공을 공격할 것이고, 제국이 멸망할 위기에 처할 것이외다.
그러니 우리는 필시 여씨 가문의 발걸음을 어지럽혀야 하고, 그들이 은자를 벌어들이는 수단과 구멍을 막아야 합니다. 그들이 마련하는 은자 중 절반이 광서 해상 불법 무역이고요.”
장양명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정이 이어서 말했다.
“여씨 가문과 연루된 광서의 관리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으니, 그만큼 광서 관직에 빈자리가 많이 생겼습니다. 문관 집단이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제대로 알아차리기 전에, 우리가 서둘러 그 빈자리를 메꿔야 합니다.
하루빨리 광서 전체를 우리 손아귀에 넣어서 여씨 가문을 막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잘 생각해보시지요. 광서 순무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장 공이 두 번째로 죽임을 당하는 광서 순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