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198화 (198/648)

198장. 그 점은 닮지 말도록 해라

장양명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가시지요.”

이연정이 그제야 황제의 성지를 꺼내서 펼쳤다.

“황제가 명하노라. 장양명을 광서 순무로 책봉한다. 이상.”

이연정이 성지를 읽은 뒤 진지한 얼굴로 당부했다.

“이건 내각을 통하지 않은 폐하의 중지(中旨)이다 보니, 많은 자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문관들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외다.”

장양명이 개의치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이미 조상의 무덤까지 파헤쳐진 마당에 뭐가 두렵겠습니까.”

장양명이 무릎을 꿇고 성지를 받들었다.

“신, 명 받들겠나이다.”

이로써 일대 대사, 바른말만 할 줄 아는 강직한 장양명이 신임 광서 순무가 되었고, 여씨 토사를 견제하는 최전방 전장의 깃발이 되었다.

두변, 장양명, 그리고 이연정이 곧장 계림부로 향했다.

장양명은 심지어 옷을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삼베옷 위로 관복을 걸쳤고, 그대로 광서 순무 관아로 부임했다.

광서 동창 진무사 관저.

“황제가 명하노라. 이옥당의 운남 어마사 직을 면하고, 광서 동창 진무사 직에 봉한다.”

이옥당이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신, 명 받들겠나이다. 만세, 만세, 만만세.”

이연정이 이옥당을 매섭게 흘겨보았다.

이연정도 예전엔 스스로를 ‘노비’라고 칭했지만, 이문회가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는 걸 본 뒤로는 그를 따라 자신을 ‘신’이라고 칭했다.

‘이놈은 사사건건 문회와 비교해야 하고, 결코 지기 싫어하지.’

이연정이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몸을 일으킨 이옥당이 말했다.

“아버지, 사례감 풍씨 그 늙은 놈이 아버지의 동창 대도독 자리를 감히 빼앗다니요. 제가 가서 그놈을 혼쭐내겠습니다.”

“썩 꺼지거라.”

이연정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에게 핀잔을 줬다.

“예, 아들 당장 꺼지겠습니다.”

미친개 이옥당은 이연정 앞에만 서면 마냥 꼬리만 흔들며 헤벌쭉 웃는 바보 개가 되었다.

이옥당은 이문회가 죽지 않았다는 것도 기뻤고, 광서 진무사로 승진한 것도 기뻤다.

이연정은 그제야 두변과 독대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연정은 확실히 흥분하거나 화가 날 때 빼고는 말주변이 없는 편이었다. 애써 할 말을 찾던 이연정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원은 내가 내 손으로 키운 손자다. 문회에게 이원을 후계자로 삼고 의자로 거둬들이라고 했지만, 문회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일로 내가 문회를 심하게 혼냈고 서로 그 일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다.”

이 얘기는 정말 모르는 일이었고, 이문회가 한 번도 언급한 적도 없었기에 두변으로서는 이문회에게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문회가 이번에 자결을 결심했던 건 폐하를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내게 너를 인정해달라고 자신의 피로 간언한 것이다.”

두변은 이문회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연정이 이어서 말했다.

“그래. 문회가 한 고집하긴 하지. 그 점은 닮지 말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네게 공평한 기회를 한 번 줄 수밖에 없게 됐구나. 너와 이원 둘 중에 더욱 활약이 뛰어난 사람에게 미래 동창 주인 자리를 주겠다. 알겠느냐?”

이연정의 말은 두변에게 미래 엄당 수령 후계자 자격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으리으리한 대전에서 장엄한 음악과 함께 후계자 자격을 부여받은 것도 아니고, 수백 명의 엄당 거물들이 증인이 되어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연정의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이연정이 두변을 엄당 수령 후계자 후보로 인정했으니, 이제 두변은 그 자격이 주어진 사람이 된 것이다.

말을 마친 이연정은 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연정과 두변은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이니 어느 정도 친밀하다고 할 수 있지만, 두 사람이 또 그렇게 직접적으로 친하진 않았다.

이연정이라는 제국의 거물은 수다스러운 성격이 아니었고, 겉치레를 잘하는 사람도 아닌지라 지금 최선을 다해서 할 말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졸업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더구나. 놀라웠다. 하지만 이원은 이미 동창의 천호이고, 어린 나이에 벌써 세운 공로만 해도 수십 개다. 이원과 함께 하는 경쟁에서 네가 많이 뒤처진 셈이다.

관직 생활은 학원 생활과 완전히 다르다. 네가 여태 배웠던 시문, 심지어 무공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관직 생활에서 중요한 건 심지이고, 계략이고, 인격이다. 그러니 관직에 오른 뒤에는 미친 듯이 달려야 한다. 이원에게 너무 많이 뒤처지게 되면, 이후에 너는 그와 같은 자리를 경쟁할 자격조차 잃게 될 게다.”

“알겠습니다.”

“졸업 시험에서 수석을 했으니, 너는 동창으로 배정이 될 것이다. 거기엔 두 자리가 있는데, 하나는 염주부 동창 총기관이고, 다른 하나는 백색부의 시백호(試百戶)이다. 어떤 자리로 가겠느냐?”

두변이 화들짝 놀랐다.

시백호? 바로 시백호 관직을 얻는다고?

졸업하자마자 이렇게 큰 관직에 임명되어도 되는 건가? 동창의 시백호는 무려 종6품 관직인데?

무관 6품이 문관 6품만큼 실질적인 가치가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무게감 있는 관직이었다.

졸업하자마자 종6품 관직에 봉해진다고 하니, 얼마나 놀랄 수준인가.

이게 바로 엄당 졸업 시험의 매력이고, 졸업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게 된 자의 보상이리라.

같은 시각. 화려한 선박 한 대가 남하하고 있는데, 선박의 목적지는 바로 광서 염주부였다.

선박의 주인은 바로 신임 광서 포정사 두강으로, 두변 친부의 아우이면서 두씨 가문의 거물이었다.

뱃머리에는 준수하게 생긴 청년 하나가 서서 뒷짐을 진 채 바람을 맞고 있었다.

이 청년이 바로 두변의 정혼자를 포함한, 두변의 모든 것을 빼앗은 두씨 가문의 서자 두염이었다.

이때, 청년의 옆으로 미모의 여인이 다가왔다. 바닷바람에 치맛자락이 흩날리면서 오히려 여인의 몸매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섬섬옥수로 머리카락을 넘기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인간계에 내려온 선녀와도 같았다. 이 여인은 두변의 전 정혼자이자, 두변을 죽음으로 몰았던 악독한 여인이자, 경성에서 영설 공주의 뒤를 잇는 절세미인 방청의였다.

방청의가 두염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생각 해요?”

매서운 눈빛으로 먼 곳을 내다보던 두염이 다정한 눈빛으로 방청의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곧 광서에 도착하오.”

방청의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게요. 곧 광서에 도착해서 당신 형을 보겠네요.”

두염이 고개를 저었다.

“내 형이 아니라 쓸모없는 고자놈을 보게 되는 거겠지.”

사실 백색부는 현지인들이 그곳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대녕 제국의 조정 명부에서는 이곳을 전주부(田州府)라고 부른다.(작가의 말 : 백색부는 청대淸代 옹정년雍正年에 기록된 지명을 사용한 것으로, 실제 지명과는 무관합니다.)

근 10년 전, 백색부에는 서남에서 가장 큰 토사인 막(莫)씨 토사가 있었다.

막씨 토사가 가장 강성할 시기에는 백색부 전체와 문산부 두 현을 거느렸고, 육만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렸다.

당시 모반을 일으킨 역모의 주역이 바로 막씨 토사였고, 그는 서남 십여 개 토사를 선동하여 십몇만 대군을 이끌고 제국을 덮쳤다. 십몇만 대군을 삼십만 대군이라고 속이면서 위풍당당하게 돌진하던 그는 귀주, 운남, 광서 행성을 함락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여씨의 배신과 진남공, 안륭 토사부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전멸했다. 막씨 토사의 영지 중 대부분이 조정에게 수복되어 전주부라는 이름이 붙었고, 남은 영지는 여씨 토사가 차지했다.

여씨 토사는 사실상 막씨 토사의 시체를 밟고 일어선 세력이었다.

당시 여여해는 진남공 송결의 명령을 무시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가장 먼저 막씨 토사부를 공격했다. 그는 그곳에서 몇백만 냥 은자를 수탈했는데, 나중에 진남공 송결이 막씨 토사의 돈을 뱉어내라고 했을 때 여여해가 토해낸 금액은 불과 삼만 냥이었다. 나머지는 당연히 몽땅 착복했다.

막씨가 무너지면서 여씨의 배를 불려준 셈이었다.

조정이 직접 전주부(백색부)를 통제한 지 7년이 넘었지만, 명목상으로는 대녕 제국 소속인 이곳은 사실상 하나의 독립된 왕국이었고, 온갖 출신의 사람들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곳이었다.

이문회가 피로 광서를 씻어내면서 유일하게 건드리지 못한 곳이 바로 백색부였다. 동창 무사들이 이곳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왕인이 광서 동창 진무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광서 동창 세력 전체를 장악한 사람은 이문회였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백색부만은 예외였다.

이문회는 백색부에 엄청난 심혈을 기울였지만, 끝내 백색부에 동창 사람을 심지는 못했다.

이연정이 말했다.

“염주부는 진남공 관저가 있는 곳이기도 하고, 무천추가 염주부의 동창 천호이니 염주부로 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이다. 염주부에서 총기관으로 지낼 거라면, 네가 해야 할 임무는 해상의 불법 무역을 규제하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시박사가 해야 할 일이지만, 불법 해상 무역을 하는 파벌들을 관리하는 건 우리 동창의 일이다.”

염주부 총기관으로 지내게 된다면, 두변은 눈을 감고 마음 편히 승진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 염주부에는 그곳 토박이인 무천추가 있고, 진남공 관저와 혈관음의 혈교방까지 있다. 게다가 지금은 여씨 별원까지 없어진 터라, 두변이 그곳에 가면 거의 패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염주부로 가는 건 가만히 앉아서 남의 떡을 먹는 것과 같았고, 집 뒤뜰에 있는 수영장에서 여유롭게 수영하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전주부는, 아, 편하게 백색부라고 부르마. 내가 네게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절대로 백색부를 만만히 봐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요 몇 년 사이 문회가 심복 세 명을 보내서 백색부에 뿌리를 심고자 했지만, 세 명 모두 실패했다. 천호 두 명은 목숨을 잃었고, 천호 한 명은 그곳에 물들어서 타락해버렸다. 지금까지 동창이 그곳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터라, 네가 그곳에 간다면 온갖 사람이 섞인 곳에서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내야 한다.”

두변에게 염주부는 집안 수영장으로, 목이 마르다고 하면 곳곳에서 얼음물을 내어줄 곳이다.

하지만 백색부는 높은 파도가 치는 신비롭고 위험천만한 바다였다. 그곳으로 간다면 두변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 없는 건 당연지사이고, 그 험난한 곳에서 혼자 동창의 길을 개척해야 했다. 자칫하면 바다에 묻힐 수도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처음이라고 종6품 시백호 관직을 주겠는가.

하지만 미래 엄당의 수령이 되려면, 당연히 위험천만한 곳을 선택해야 했다. 마냥 편안한 곳에서는 도전이 없을 테니, 실력을 보여줄 기회도 없을 것이다.

“백색부 동창 시백호가 되겠습니다.”

두변이 말했다.

“좋다. 문회의 아들답구나. 네 배짱이 이원에 뒤처지진 않는구나. 이원은 천호에 봉해졌고, 혼자서 천호소 하나를 관장하고 있다. 이원의 천호소가 어디인지 아느냐?”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막강한 경쟁자에 대해서 그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연정이 말했다.

“요동, 무순부다.”

두변은 순간 이원에게 존경심이 일었다.

요동 무순부는 건로 지역과 맞닿아 있는 최전방이고, 백색부보다 더욱 위험한 곳이었다.

여씨 가문에 비해서 건로가 훨씬 더 제국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몇 년 동안 제국이 건로와 수차례 대전을 치렀는데, 열 번 중 여덟 번을 건로에게 지면서 건로에게 함락된 면적이 벌써 천 리가 넘었다.

이문회가 엄당의 제2대 후계자이니, 두변과 이원이 제3대 후계자인 셈이었다.

제3대 후계자인 두변과 이원이 자진해서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가서 자신의 실력을 단련하겠다고 하니, 이연정의 마음이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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