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장. 두씨 가문 공자
“학생의 배움이 아직 많이 부족하나, 주인을 위해 이 한 몸 바쳐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진평이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두변을 향해 절을 올렸다.
두변이 얼른 진평을 일으켜 세웠다.
“함께 같은 포부를 가지고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가보자.”
옆에 서 있던 진쌍쌍은 두 뺨이 발그레 상기된 채 귀만 쫑긋 세워서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애꿎은 발끝만 쳐다보다가 두변이 말하는 것을 듣고는 슬쩍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두변이 진쌍쌍을 바라보자, 그녀의 수려한 작은 얼굴이 귀까지 빨개지면서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부끄럼이 많은 아이로군.’
“원치 않는다면 나를 따라가지 않아도 좋다. 집에서 부모님을 모시는 것도 괜찮아.”
두변은 작은 병아리 같은 진쌍쌍이 놀랄까 봐 최대한 부드럽고 다정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부모님 곁에는 언니 동생들이 있으니까, 제가 공자를 모시겠습니다.”
진쌍쌍은 두변을 거의 숭배하다시피 동경하고 있었다.
두변이 진평을 대신해 원시에 참가해서 수석을 차지했던 일로 숭배하기도 했지만, 그날 연화사에서 두변이 활을 쏘던 모습을 볼 때부터 그에게 완전히 빠지고 말았다.
게다가 두변이 재능이 출중한 것도 모자라서 용모 또한 훌륭하니, 진쌍쌍이 그에게 반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쌍쌍은 환관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방년 열다섯은 한창 이성에 대해 눈을 뜰 시기다. 진쌍쌍은 어렸을 때부터 시골에서만 살았던지라, 그녀가 본 진평 외에 특출난 사내는 그 건방진 부잣집 소야가 전부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재능이 출중하고 외모도 잘생겼고, 집안에 은혜까지 베푼 청년이 나타나니, 진쌍쌍의 마음은 그대로 두변에게 지독하게 묶여버렸다.
그녀의 짝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모친이 진쌍쌍에게 두변의 시중을 들라고 했을 때, 진쌍쌍은 겉으로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기뻐서 방방 뛸 지경이었다.
“공자께서 노노(奴奴: 여자 하인이 자신을 칭할 때 쓰는 단어)를 싫어하지만 않으신다면, 노노는 공자의 시중을 들고 싶습니다.”
진쌍쌍이 평생 쓸 용기를 다 끌어다 모아서 이 말을 했다.
‘노노’라는 단어는 그녀의 모친이 그녀에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너무도 귀여운 얼굴로 자신을 ‘노노’라고 칭하는 진쌍쌍을 보자, 두변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한없이 귀엽고 연약해 보이는 하얀 토끼 같은 여인이 부끄럼타는 걸 보자, 두변은 자기가 언제 늑대가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색부는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두변은 그녀를 백색부로 데려가지 않고 유모의 좋은 말동무가 되어달라며 그녀를 계림부에 남겨둘 생각이었다.
두변은 진평, 진쌍쌍을 데리고 계림부로 향했다.
가는 길에 몽산현을 지나게 되어서 오씨 장원에 들러서 두평아 누이에게 겸사겸사 잠시 작별인사를 하고자 했다.
오정도의 장원 밖에 도착했을 때, 몇 명의 무사가 오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대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게 보였다.
‘딱 봐도 오씨 가문의 문지기들이 아닌데.’
두변이 속으로 생각하던 찰나, 무사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두변 일행을 향해 호통쳤다.
“우리 주인께서 안에 계시니 잡인은 당장 가시오!”
‘경성 두씨 가문 사람이잖아?’
두변은 무사들의 옷을 보고 그들이 두씨 가문 시위라는 걸 알아챘다.
두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두씨 가문에서 또 누구를 보낸 거지? 그런데 왜 이들이 오정도의 장원에 있는 건데? 뭔가 좀 이상한데!
두씨 가문 무사들은 두변이 여전히 자리를 피하지 않는 걸 보고 즉시 검집에서 검을 반쯤 뽑아 들고 위협했다.
“어이, 당신들. 당장 떠나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말을 듣지 않으면 칼부림이 날 것이다!”
이문회가 광서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광서 고위 관직자 태반이 죽었다.
이문회가 죽이려는 사람 중 딱 한 사람만 그의 칼날을 피해갔는데, 그 사람이 바로 광서 포정사(布政使)였다. 광서 포정사는 일찍이 감옥에 갇힌 터라 포정사 자리가 한동안 비어 있었다.
원래는 포정사라고 부르지 않고 포정사사(布政使司)라고 불렀다.
달단 제국이 중원에 입성한 후 행정 구역을 바꾸었는데, 대녕 제국이 들어선 후 다시 포정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한 성의 최고 관리가 포정사였고, 그다음이 안찰사, 도지휘사였다. 원래 순무는 지방에 주둔하는 관리가 아니라 조정이 지방 관리를 감독하라고 파견한 군정(軍政)고관이었다.
나중에 제국의 국세가 점점 더 기울면서 순무가 지방에 상주하는 지방관이 되었다. 그때부터 순무가 정식으로 한 성을 관장하는 최고 군정 장관이 되었고, 포정사는 2인자로 바뀌었다.
품급으로 치자면, 순무는 보통 정2품이 많고 포정사는 종2품인지라, 사실상 두 관직은 같은 계급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심지어 어떤 성에서는 막강한 세력을 가진 포정사가 순무를 허수아비 취급할 수도 있고, 뒷배가 든든한 젊은 포정사가 연로한 순무를 업신여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두강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로, 뒷배가 든든하면서 경력이 매우 뛰어난 젊은 고관이라고 할 만했다.
그는 두씨 가문의 넷째로, 올해 이제 겨우 마흔셋이었다.
광서 포정사 자리가 비자, 두변의 부친 두회가 때를 놓치지 않고 방씨 가문을 등에 업고 무수히 많은 경쟁자를 내치면서 귀한 2품관 자리를 얻어냈다.
문관의 동량지재(棟梁之材: 한 집안이나 나라의 중심이 되는 인재) 최암이 마흔셋에 양주부 지부가 되면서 꽤 젊은 나이에 지부 자리에 앉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지부의 품급은 불과 4품이었다.
두강은 최암과 같은 나이에 벌써 종2품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두씨 가문은 앞으로 지방과 중앙 조정에서의 권력을 양립하기 위해서 두강을 광서로 보냈다. 두강은 지방에서 총독으로 성장해서 군정 대권을 장악하고, 두회는 내각에서 조정을 주름잡게 된다면, 두씨 가문은 제국 최고의 권세를 가진 가문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 두강이 관직 부임을 위해서 배를 타고 광서로 왔지만, 끝내 염주부에서 내리지 않고 광주부로 들어왔다.
두강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양광 총독부로 가서 총독 고정에게 인사를 올렸다.
고정은 제국 남쪽에서 방씨 가문을 대표하는 최고 지도자이고, 두씨 가문도 방씨 가문 세력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강은 고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터라, 겉치레를 반 시진도 하지 않고 일어나서는 광주부를 떠나 육로로 광서로 향했다.
두강이 오늘 오주부의 몽산현을 지나가게 됐을 때, 몽산 현령이 몹시 시끌벅적하고 호화스럽게 그와 그의 일행을 접대했다.
몽산 현령은 두강 일행이 누추한 관저가 아닌, 좀더 호화롭고 고급스러운 곳에서 쉴 수 있도록 대해상 오정도의 장원을 빌려서 신임 포정사 대인 일행이 머물도록 했다.
그래서 두씨 가문의 무사들이 오정도의 장원 앞을 지키는 것이지, 오정도와 두씨 가문 사이에 어떤 거래나 음모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당장 꺼지지 못해?”
두변이 꿈쩍도 하지 않자, 두씨 가문의 무사가 위협적인 태도로 말했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네놈들을 조정의 기밀을 캐내려는 첩자로 간주하고 잡아들이겠다.”
두씨 가문의 무사들은 그래도 경성에서는 행동거지를 조심하지만, 지방에 온 뒤로는 안하무인이었다.
두변이 미간을 찌푸리고 이삼과 이사를 향해 손짓했다.
이삼과 이사가 두씨 무사들을 단번에 제압할 때, 때마침 두평아의 시어머니인 오 부인이 대문 앞을 무심코 지나가다가 두변 일행을 보고는 깜짝 놀라 서둘러 대문 밖으로 나왔다.
“두 공자.”
오 부인이 예를 올렸다.
두변이 답례하면서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두씨 가문 사람들이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안에는 누가 들어간 겁니까?”
오 부인이 대답했다.
“두 공자도 두씨 가문 사람들을 아십니까? 이번에 새로 부임한 포정사 대인 댁인데, 현령 대인께서 우리 장원이 으리으리하고 호화롭다면서 포정사 대인 일가가 이곳에서 머물 수 있도록 거처를 마련해달라고 하셨지 뭐예요.”
오 부인의 말투를 들어보니,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는 모양새였다. 포정사 대인이 자기네 장원에 묵는다는 건, 해상인 오씨 가문으로서는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일일 것이다.
‘포정사 대인? 두씨 가문이 포정사 자리를 꿰차다니. 정말로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군.’
두변이 속으로 생각했다.
오 부인이 불현듯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이마를 탁 치면서 말했다.
“아 참, 두 공자도 성이 두씨였죠. 혹시 친척 관계는 아닌가요? 두평아에게서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는데. 아, 그리고 염주부에서 우리를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두 공자에게 하늘과도 같은 은혜를 입어서 그 은혜를 평생을 갚아도 다 갚지 못할 거예요. 자, 이리들 들어와서 술 한잔해요.”
오 부인이 두변 일행을 이끌고 대문으로 향했다.
“멈추시오. 무관한 사람은 일절 들이지 말라는 포정사 대인의 명령이 있었소.”
대문을 지키는 무사들이 큰소리로 호통쳤다.
오 부인이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
“이분도 관직이 있는 사람이고, 저희 가문의 친척이자 은인입니다. 조금만 융통해주시지요.”
“융통은 무슨. 당신 남편과 아들도 들어가지 못하는데! 더구나 잡인은 더더욱 안 되오. 만에 하나 우리 주인의 휴식을 방해했다간, 어떤 후환이 따를지 모르는 것이오?”
두씨 무사가 언성을 높였다.
두변의 화가 올라오던 찰나, 오 부인이 익숙하다는 듯이 슬쩍 무사들에게 은자 두 덩이를 쥐여줬다.
“크흠, 들어가시오. 그 누구도 안뜰에 한 발자국도 다가가서도 안 되오. 주인과 주인 가족의 휴식을 방해했다간 패가망신을 피하지 못할 것이오.”
은자를 챙긴 두씨 무사가 으름장을 놓으면서 두변 일행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두변을 알아보지 못하는 걸 보아하니, 이 무사들은 두변이 가문에서 버림받은 뒤에 들어온 무사들인 모양이었다.
두변 일행이 객청 안에 들어서자, 각양각색의 값비싼 간식이 탁자 위로 끊임없이 올라왔다.
“포정사 대인이라는 분이 어찌나 기세가 대단하던지, 장원에 들어오자마자 집에 있던 사내는 모조리 내쫓았지 뭐예요. 그래서 오늘은 부군과 염명이 두 공자를 접대하지 못하게 됐네요. 잠시만 기다려요. 두 공자 얘기를 맨날 하는 두평아를 불러올 테니.”
오 부인이 서둘러 두평아를 부르러 자리를 떠났다.
이삼, 이사, 그리고 동창 무사 넷이 본능적으로 흩어져서 객청 앞을 지켰다.
“진평, 이리 와서 앉아.”
“예.”
두변의 말에 진평이 그의 아랫자리에 앉았다.
진쌍쌍이 발그레한 얼굴로 두변을 위해 따뜻한 차를 내린 뒤, 조심스럽게 찻잔을 올렸다.
“차 드세요.”
두변이 웃으면서 진쌍쌍이 건넨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삼, 새로 부임한 광서 포정사가 누구지?”
두변이 물었다.
“소인은 모릅니다.”
이삼과 이삼은 검을 쥐고 싸우는 것만 담당할 뿐, 소식통이 밝지는 않았다.
그때 진평이 말했다.
“제가 알고 있는데 말씀드려도 될지요. 두씨 가문의 두강입니다.”
“아, 내 덕을 톡톡하게 본 넷째 숙부로군. 그런데 네가 이걸 어떻게 알았지?”
두변의 물음에 진평이 대답했다.
“두강이 사흘 전에 오주부에 와서 서원을 한 번 둘러보더니, 오주부에서 쓸 만한 서생을 데려가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원시에서 수석을 한 셈이라 오주부 지부께서 제게도 통지를 했었죠. 그땐 두강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진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거절하고 가지도 않았습니다.”
두변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강이 지금 광서에 와서 포정사를 맡는다는 건 무슨 의밀까?
두씨 가문이 엄당과 썩 좋은 사이가 아니긴 해도, 그렇다고 여씨 가문과 무슨 결탁이 있을 정도는 아닐 텐데. 지금 광서는 급변하는 시기인지라, 저들에게는 위험한 자리일 텐데. 포정사라는 직책이 귀하긴 하지만, 두씨 가문의 노야가 이렇게 위험한 곳까지 와서 고생할 사람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