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장. 고귀한 여인
버르장머리 없는 이런 자들이 사과를 못하는 건 자존심이 세거나 강경해서가 아니라, 무식해서 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지금, 저승사자를 바로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는 겁이 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두우가 고통스러움에 발버둥 칠 힘도 잃고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 갈 때, 두변이 젖은 종이를 걷어냈다.
“사과해.”
두변이 차갑게 말했다.
두우가 헉헉거리면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과해. 안 그럼 죽여버릴 테니까.”
두변의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
두우는 한참 동안 숨을 고른 뒤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 미안해.”
이삼과 이사가 두우를 바닥에 꿇어 앉히고 머리를 눌러 두평아에게 머리를 조아리도록 했다.
“미, 미안해. 정말 미안해.”
두우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경성 부잣집에서 나고 자라 무법천지였던 두우는 살면서 한 번도 억울한 일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이 잘렸을 때도 그저 분노했을 뿐 두려워할 겨를도 없었다. 그러다 숨이 막혀서 저승사자와 인사를 할 무렵이 돼서야 마음속 깊은 곳에서 두려움의 전율을 느끼고야 말았다.
과거에 자신이 아무렇게나 괴롭히던 사람이 이렇게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 되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모든 과정을 보고 있던 오 부인이 놀라서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두, 두 공자. 저 사람은 포정사 대인의 공자인데, 이를 어쩌면 좋아요.”
두변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 부인,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이 일에 끼어들었으니 끝까지 책임질 겁니다. 포정사 두강의 거처는 어딥니까?”
오 부인이 대답했다.
“두 대인께서는 현성에서 열리는 연회에 가셨어요. 지부 대인과 현령 대인께서 그 자리에 같이 계시고, 제 부군과 염명이 돈을 내서 접대하고 있고요. 그런데 거기에 남는 자리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오정도가 돈을 내는 연회임에도 오 부인이 두변의 자리가 없을까 봐 걱정하는 건 아주 정상적인 상황이었다. 현지의 거상이 돈을 내서 고위 관직자를 접대하는 건 거상에게 영광스러운 일이다. 앉을 자리는 무슨, 거상이 관료에게 술 한 잔 올리는 것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차려준 것이었다.
두강이 두우를 연회에 데리고 가지 않은 걸 보니, 두강도 두우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럼 지금 이곳에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 말고, 포정사 대인의 가족이 또 있습니까?”
두변이 물었다.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포정사 대인의 부인도 여기 있죠. 그 부인은 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내가 살던 안채를 빼앗아 갔죠. 게다가 내가 쓰던 이부자리, 다기, 가구를 싹 다 밖으로 내다 던지고 새 걸로 바꿨지 뭐예요.”
오 부인이 말했다.
“거기가 어딥니까. 데려가 주십시오.”
오 부인은 두변이 뭘 하려는 건지 몰라서 겁이 나 잠시 머뭇거렸다.
“얼른요.”
“네, 네!”
아직 두평아 일 때문에 화가 가시지 않은 두변의 말투가 냉랭하자, 오 부인이 화들짝 놀라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오 부인이 두변을 데리고 오씨 장원에서 가장 좋고 호화로운 거처인 안채에 도착했다.
두강의 부인이자, 두우의 모친인 두 부인이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거기 멈춰라!”
여종 하나가 두변 일행이 문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소리쳐 호통쳤다.
“여기는 고명 부인이 쉬시는 곳이다. 감히 부인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고 썩 물러가라.”
두변이 여종의 말을 무시하고 곧장 마당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여종이 두변의 뺨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이삼이 여종의 손목을 낚아채서 그대로 비틀어 버렸다.
“꺄악!”
여종이 비명을 질렀다.
“뭐가 이리 시끄럽느냐. 이러면 내가 어디 편히 쉬겠어!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안쪽에서 점잖은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변의 넷째 숙모인 두 부인은 조정 훈귀의 후손이자, 후작의 여식이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떠받들어지면서 자랐고, 두씨 가문에 시집을 온 뒤에도 여전히 차갑고 고고한 태도로 지냈다.
사실 두 부인의 처가인 후작부는 이미 몰락한 터라, 그녀의 가장 영광스러운 신분은 두강의 부인이었다.
두 부인은 거드름 피우는 걸 좋아하는지라, 경성 두가에 있을 때도 틈만 나면 사람을 업신여기려 했고, 두변은 더욱 안중에도 없었다.
“두 부인입니까? 이제 더는 이곳에서 지낼 수 없습니다. 이곳의 주인이 당신을 환영하지 않으니, 당장 짐 싸서 나가시죠.”
두변이 말했다.
옆에 있던 오 부인이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두변의 말이 끝난 뒤, 안쪽에선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뒤, 풍만한 몸매를 가진 여인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밖으로 나왔다.
이 여인이 바로 두강의 부인, 복양(濮陽) 후부 강씨였다.
밖으로 나온 두 부인은 두변을 알아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저 고자놈을 여기서 보게 되다니!
두 부인은 두변이 두일명에게 한 짓을 알고 있었지만, 두변의 뒷배가 4품관 진무사라는 얘기를 듣고 콧방귀를 뀌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그 뒷배까지 곧 죽는다고 들었으니, 두변을 안중에 둘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두변,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아느냐.”
두 부인이 냉담하게 말했다.
“남의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주인 일가를 내쫓은 건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당신의 저 버르장머리 없는 아들놈이 그 주인의 소부인을 범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집 소부인은 제 누이 두평아입니다.”
두 부인은 두평아의 이름을 듣고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몹쓸 것이 여기 있다고? 그년이 여기 있는 줄 알았으면 우리한테 여기 살아달라고 빌고 빌어도 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참나. 어울리지도 않지.”
“당신 아들놈이 제 누이의 손목을 잡아서,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기 위해서 그놈의 손목을 잘랐습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듣기에 따귀 백 대를 때렸죠. 이젠 말을 잘 들을 텐데, 감사 인사는 나중에 받겠습니다.”
강씨의 얼굴이 바로 사색이 되었다.
두변이 손짓하자, 이삼 이사가 두우를 떠밀고 나오더니 그의 손을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두우의 얼굴은 모친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었고, 잘린 오른 손목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상에나!”
강씨가 소스라치게 놀라서는 제 두 눈을 의심했다.
‘두변 저 미친 것이 감히! 우리 두우는 포정사의 아들이고, 두씨 가문의 적자인데! 두우가 철이 아직 덜 들어서 두염보다 못한 구석이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두씨 가문의 소야인데!
저놈이 감히 두우의 손목을 잘라? 저놈이 뭐라고!’
강씨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올라 두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고자놈이 감히 누굴 건드려!”
두변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오씨 장원은 당신들을 환영하지 않으니 썩 꺼지십시오. 제가 무력을 쓰기 전에 알아서 가시기 바랍니다. 보기에 좀 그렇잖습니까.”
두 사부인이 두변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두변, 네놈은 이제 죽은 목숨이다. 노야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네놈을 죽여주마!”
“좋게좋게 말할 때 좀 알아들으시지.”
두변이 고개를 젓자, 이삼, 이사, 그리고 동창 무사 네 명이 안채로 뛰어 들어갔다. 그들은 두 부인의 모든 물건을 밖으로 내던졌고, 그녀가 장식으로 가져온 그릇이니 도자기들을 모조리 바닥에 던져 박살 냈다.
밖으로 나온 무사들이 두 부인을 향해 말했다.
“두 부인, 제 발로 나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저희가 밖으로 던져드릴까요?”
이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이 있을까.
두 사부인은 살면서 이렇게 치욕스러운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중년의 나이임에도 탄력 있는 피부와 아름다운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두 사부인이 이를 부득 갈면서 외쳤다.
“두변, 내 기필코 너를 죽여주마!”
두 사부인이 씩씩대면서 말했다.
“가자!”
여종들이 이미 혼절한 두우를 등에 업고, 그의 잘린 손을 주워서 장원을 떠났다.
마차에 오르기 전, 강씨가 오씨 장원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두변, 딱 기다려라. 내가 오늘 네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더는 강씨 성이 아니다. 내가 이 빌어먹을 장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몹쓸 두평아 년을 죽도록 능멸하지 못한다면, 내가 오늘부로 사람이 아니다!”
그 뒤, 두 부인 일행은 두강이 있는 현성을 향해 달려갔다.
두변은 오씨 장원에 남아서 신임 포정사 두강이 오기를 기다렸다.
“소주인, 오주 천호소로 가서 병력을 좀 끌어올까요?”
이사가 물었다.
두변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아마 쓰이진 않을 텐데, 혹시 모르니 지원을 요청하거라.”
“알겠습니다.”
이삼, 이사가 즉시 동창 천호소에게 전서구를 보냈다.
방청의는 무척 오만한 여인으로, 자신이 영설 공주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여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방씨 가문은 천 년 역사를 가진 천 년 호족이고, 황족 영씨는 이백 년밖에 되지 않으니, 자기가 영설 공주보다 더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방씨 가문은 문관 집단의 수령이고, 황족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진 가문이었다.
두염과 혼례를 올리긴 했지만, 방청의 기준으로는 두염이 방씨 가문의 데릴사위가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두강이 오주부 연회에 참여하러 간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방청의는 그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고, 당연히 남편인 두염도 그 자리에 가지 못하게 했다.
두강 일가가 현령의 안내에 따라 오씨 장원에서 묵게 되었지만, 방청의는 오주에 있는 방씨 장원에서 편하게 지내겠다고 했다. 데릴사위인 두염은 당연히 방청의와 함께 방씨 장원에서 묵어야 했다.
이번에 두강과 두염이 광서로 오면서 타게 된 배도 방씨 가문의 배였고, 배에서 내린 뒤부터 방청의와 두강은 따로 움직였다.
이번에 방청의가 데려온 사람은 족히 구백 명이 넘었다. 방씨 가문의 무사만 해도 오백 명이었고, 그중 몇십 명은 5품 무사 이상의 무림 고수였다. 나머지는 문서, 막료, 여종, 마부, 요리사, 심지어 원예사까지 데려왔다.
영설 공주가 행차한다 해도 수행원이 구백 명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그런데 광서로 부임하는 포정사 두강을 따라오면서 방청의의 움직임은 더욱 요란했다.
방청의는 두강을 별로 존중하지 않았다.
두강은 그저 방씨 가문의 거대 권력에 빌붙는 관료 중 한 명일 뿐이고, 포정사 관직도 방씨 가문에 기대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방청의는 두강을 그저 집안의 막료 정도로 취급할 뿐이었다.
광서에서 그녀가 조금이나마 존경스럽고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은 양광 총독 고정이었다. 고정은 그녀의 고모부이기도 하니, 따지고 보면 고정도 반은 방씨 가문인 셈이었다.
세간에서는 방청의가 어쩌다 두씨 가문과 혼례를 올리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씨 가문은 이류 정도 되는 호족일 뿐, 천 년 호족인 방씨 가문에게 빌붙을 수 있는 가문이 아니었다.
그해 방청의가 태어날 때, 그녀가 태어나면서 금덩이 하나를 쥐고 태어났다는 소문이 있었다. 방씨 가문은 제국에서 이름을 떨치는 점술가 한 명을 모셔와서 왜 그런지 물었다.
당시 제국 곳곳을 돌며 명성을 얻었던 점술가가 방청의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면서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요? 소저의 별자리를 보았을 땐, 제국에서 방 소저보다 더 고귀한 여인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나, 방 소저께서는 보일 듯 말 듯, 언제든 사라질 수도 있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방청의의 부친이 서둘러 점술가에게 어떻게 하면 이 고귀한 생명을 지킬 수 있냐고 물었다.
점쟁이가 잠시 계산을 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사방 9리 이내에 같은 날 태어난 사내아이가 있을 겁니다. 방 소저보다 반 시진 정도 늦게 태어났을 것이고요. 두 사람이 혼인을 맺어야만 방 소저의 고귀한 목숨을 보존할 수 있을 겁니다.”
방청의의 부친은 근방 9리 전체에 사람을 보내서 점술가가 말한 시각에 태어난 남아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우연히도 점술가가 말한 그 시간에 두씨 가문의 적자인 두헌(두변)이 태어났고, 더 우연히도 두씨 가문의 서자인 두염도 비슷한 시간에 태어났다.
때마침 당시 두씨 가문은 가주 두회의 수완 덕에 나날이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