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204화 (204/648)

204장. 차(車)를 버려라

“저놈을 죽이고, 오씨 장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려야 해요!”

두 사부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의 뒤로 무장한 병력이 천 명 넘게 있던 터라,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두변 일행을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런데 오주 지부와 오주 참장이 아직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오주 지부 이명담이 다시 한번 말했다.

“동창 시백호 두변, 밖으로 나와서 얘기 좀 하자.”

대문 밖으로 나온 두변이 물었다.

“포정사 두강 대인은 어디 계신지요?”

두 사부인이 그를 쏘아보면서 대꾸했다.

“너 같은 고자놈은 우리 노야를 뵐 자격이 없다. 넌 죽을 준비나 해!”

오주 지부 이명담이 나서서 말했다.

“두 대인께서는 술을 많이 드셔서 먼저 쉬러 가신지라, 따로 모셔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은 포정사 대인을 거칠 필요 없이,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니냐?”

두강은 일부러 얼굴을 비추지 않은 것이다. 두변의 품급이 너무 낮아서이기도 하고, 엄당과 마찰을 일으키기 원하지 않았으리라.

오주 지부가 이어서 말했다.

“두 가지 요구가 있다. 첫째는 두변 백호가 직접 두우 공자를 다치게 한 범인을 우리에게 넘겨주는 것이고, 둘째는 상인 오씨 일가가 포정사 대인의 부인께 무례를 범했으니 그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다. 오정도가 불법 해상 무역을 한다는 혐의가 있으니 우리는 오씨 장원을 철저히 조사하고 오씨 일가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오정도 부자와 오 부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온 정성을 다해서 포정사 대인 일가의 편의를 봐줬더니, 이득은커녕 도리어 멸족의 위기에 처하게 됐다니!

두변이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대해상 오정도가 불법 해상 무역을 한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지부는 꼭 오늘 안 사람처럼 구는군.

오주 지부가 계속 말했다.

“두변 백호는 우연히 오씨 장원을 지나간 것이고, 이 일과 무관하다는 걸 알고 있다. 두우 공자가 다친 것 또한 오씨 가문이 동창 무사를 매수하여 시킨 짓이지, 두변 백호와 무관하다.”

두변은 그제야 이들이 원하는 게 뭔지 분명히 알아차렸다.

이들은 두변에게 차(車)를 버리고 장(將)을 지키라고 협박하는 것이다.(丟車保帥 : 장기에서 차車를 버려 장將을 지키다. 부차적인 것을 버려 중요한 것을 지키다.)

오씨 일족을 희생하고 이삼과 이사를 순순히 내어주면, 두우의 오른손을 절단한 것과 포정사 부인을 내쫓은 일을 눈감아주겠다는 뜻이었다.

두강은 나름 두변에게 선심을 쓴 것이리라. 두우의 손을 절단한 범인이 두변인 걸 빤히 알면서도 엄당과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진상을 모른 척했으니 말이다.

오 부인은 지부의 말에 놀라서 혼비백산했다. 그녀는 두변이 제발 오씨 가문을 이대로 버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울먹였다. 지금 두변이 알겠다고 대답해버리면, 오씨 가문의 가산이 몰수당하고 패가망신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게 바로 관아의 위력이다.

몇십만 은자의 가산이 있는 대해상도 관리의 말 한마디 앞에서는 도살을 앞둔 살진 양 한 마리에 불과했다.

두변이 말했다.

“만약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쩔 겁니까?”

오주 지부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럼 우리가 직접 사람을 잡으러 쳐들어가는 수밖에.”

오주 지부의 뜻은 명확했다. 두변이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지부가 데려온 천여 명의 병력이 오씨 장원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고, 두평아, 오 부인, 이삼, 이사 등을 잡아가겠다는 뜻이다.

만약 두변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오주 지부가 두변에게 조금이나마 체면은 남겨주는 것이다.

설령 두변이 그의 제안을 거절해서 무력을 동원하게 된다고 해도, 그들은 두변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두평아, 이삼, 이사, 오씨 일가를 지키지 못한 두변에게 체면이란 게 남아 있을까.

두변이 분명히 말했다.

“당신들이 오씨 장원에 무력을 쓰는 그 순간부터, 나는 방씨 세력이 엄당과 전면전을 펼치는 것으로 여길 겁니다.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어디 한 번 해보시지요.”

오주 지부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몽산 현령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몽산 현령이 잰걸음으로 두변에게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말했다.

“동창 무사들은 나중에 우리가 따로 풀어주겠다. 하지만 두평아는 죽어야만 하고, 오씨 일가도 관아의 조사를 받아야 하며, 오정도 일가도 죽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포정사 대인의 체면을 어찌 지킬 수 있겠느냐.”

두변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내 체면은 어떻게 하고요?”

동창 백호가 6품관이긴 하지만, 몽산 현령은 사실 그가 안중에도 없었다.

일개 동창 백호와 현령이 어디 급이 같을까.

3품, 4품 정도는 돼야 어디 가서 명첩을 내밀지, 두변 같은 6품 무관은 저기 강가에 떠다니는 자라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랄까! 이놈이 진사 출신 현령과 견줄 바가 아니지. 두변이 이문회의 의자라는 게 걸리지만, 이문회는 이미 몰락했으니, 이놈도 이제는 별 볼 일 없는 놈이지.

몽산 현령은 자신과 두변의 급이 다르다고 생각했고, 그와 얼굴을 마주보고 협상하러 나오기도 싫었지만, 지부 대인의 명령을 따라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앞장서야 했다.

두변의 말을 듣고 몽산 현령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시백호가 이 많은 고관 앞에서 체면 얘기를 하는 건가? 좀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나? 자네는 이문회가 아니잖은가. 우리에겐 천여 명의 병력이 있는데, 자네에겐 고작 여섯 명이 다다. 괜히 자기 분수도 모르고 설치지 말아라.”

짝!

두변이 몽산 현령의 따귀를 올려쳤다.

문관 출신인 몽산 현령은 무공이 따로 없는지라, 두변에게 따귀 한 대를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가서 이명담에게 전하십시오. 내가 이미 참을 만큼 참았다고. 그렇지 않았다면 두우 그놈의 목을 이미 베었을 것이라고요. 이명담이 일을 벌일 배짱이 있다면 뒷감당할 준비도 돼 있다는 뜻일 텐데, 잘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말입니다.”

두변이 차가운 눈빛으로 바닥에 엎어진 몽산 현령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몽산 현령이 자신의 뺨을 부여잡고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두변을 쳐다보았다.

지금 오주 지부, 오주 참장, 천여 명 병마 앞에서 7품 현령의 따귀를 올려쳐?

“죽고 싶어서 작정했구나!”

몽산 현령이 씩씩대면서 대열로 돌아갔다.

오주 지부 이명담이 버럭 화를 냈다.

“두변, 좋은 말로 했더니 못 알아듣는 모양이구나. 여봐라. 오씨 장원을 짓밟고 두 공자를 해친 범인을 체포해라. 앞을 막는 자가 있다면 누구든 죽여버려라!”

오주 지부 뒤에 있던 천여 명 병사가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두변이 목청을 높여서 외쳤다.

“감히 누가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겁니까! 오주 지부, 오주 참장은 잘 들으세요. 당신들의 병사들이 이곳 대문을 한 발자국이라도 넘었다간, 방씨 세력이 광서 엄당과 전면전을 펼치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오주 지부가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를 뀌었다.

“진무사 이문회는 이미 파직을 당했다. 일개 백호가 광서 엄당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직책이 아닐 텐데?”

“소주인께서는 당연히 광서 엄당을 지휘할 수 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동창 천호 종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그가 이끌고 온 동창 기마병 백여 명이 두변의 앞을 막아서고 대열을 갖췄다.

종정이 큰소리로 외쳤다.

“두변은 광서 동창의 소주인입니다. 소주인께서 하시는 말씀이 전부 동창의 절대 의지지요. 이런 식으로 사람을 잡아간다는 건 동창을 향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이니, 내 언제든 당신들을 상대해주겠습니다.”

종정이 명령했다.

“무기를 들고 전투를 준비하라.”

종정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여 명의 기마병이 무기를 치켜들고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오주 지부 등을 노려보았다.

오주 지부와 오주 참장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했다. 이런 일로 동창과 선전포고를 하게 될 경우 뒷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바로 이때, 포정사 두강이 쓴 쪽지 한 장이 오주 지부에게 전해졌다.

‘투쟁으로 단결을 구하면 결국 단결이 남게 될 것이오. 일단 치고 보시오. 안 그러면 방씨 세력의 체면이 서질 않잖소.’

두강의 말이 맞았다.

지금 상황은 단순히 두우의 문제가 아니라 방씨 세력의 체면의 문제였다.

이대로 동창의 기세에 눌려서 퇴각하게 된다면, 광서 최대 세력인 방씨 가문의 존엄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준비!”

오주 참장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뒤로 궁수 부대가 두변 등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동창 무사의 수는 기껏해야 백여 명이었지만, 오주 지부 쪽에는 천여 명이 있었다. 이대로 전투를 시작하게 된다면, 동창 무사들이 완전히 불리한 싸움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버르장머리 없는 공자 하나가 저지른 정신 나간 행동 때문에 광서의 두 최대 세력이 무력 충돌을 빚게 생겼다.

여씨 토사를 무너뜨리는 데에는 두 세력이 힘을 합칠 여지가 있었지만, 두강은 이를 무시할 만큼 아집이 셌고, 무력 충돌을 일으켜서라도 자신의 체면을 되찾고 동창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었다.

오주 참장이 큰소리로 외쳤다.

“다섯을 셀 동안 물러나지 않는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다섯!”

“넷!”

“셋!”

종정이 초조한 눈빛으로 두변을 바라보았다.

오주에 있는 동창 세력이 그렇게 크지 않은 터라, 거의 모든 기마병을 데리고 온 셈이었다. 만약 이 불리한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면 오주 동창의 기마병이 모두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종정 또한 이곳에서 죽음으로써 사죄를 해야 했다.

물론, 종정은 두변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여기서 물러난다는 건 광서 엄당이 두강에게 머리를 숙인다는 걸 의미하니까.

두변은 눈을 감고 정신력을 통해 무언가를 빠르게 계산했다.

곧 도착하겠군.

두변이 눈을 번쩍 뜨고서 작게 읊조렸다.

“역시 제때 도착했군.”

오주 참장이 계속해서 외쳤다.

“둘!”

“하나!”

오주 참장이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

“우리를 탓하지 말아라. 죽여달라고 애원한 건 너이니.”

오주 참장이 공격 명령을 내리기 위해 높이 치켜든 손을 내리려는 찰나,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서 그의 손목을 관통했다.

“감히 누가 공격을 하겠다는 것이냐!”

이문회의 또 다른 의자이자, 계왕부 부총관 환관 이릉이 말을 타고 암흑을 뚫고 달려왔다.

오주 지부와 오주 참장이 격노했다.

번왕부의 환관 주제에 이 일에 끼어들어? 저 제 분수도 모르는 놈이!

“이릉, 죽으려고 작정한 것이냐!”

오주 참장이 호통쳤다.

“오주 참장. 그 화살을 쏜 건 본왕이오. 지금 본왕에게 죽으려고 작정한 것이냐 물은 것인가?”

위엄 가득한 목소리가 이릉의 뒤에서 전해졌다.

금황색 왕포를 두르고 머리에 금관을 쓴 위풍당당한 사내가 암흑 속에서 백마를 타고 나타났다.

이릉이 말을 멈춰 세우고 큰소리로 외쳤다.

“계왕 전하께서 오셨다. 모든 문신과 무장은 즉시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하라.”

순간, 모두의 안색이 싹 변했다.

오주 지부, 오주 참장, 오주 여경사 천호, 동창 천호 종정, 백호 두변, 동창 무사와 오주 병사들이 전부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계왕 전하를 뵙습니다. 천세, 천세, 천천세!”

이때, 계왕의 뒤로 천둥소리와도 같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계왕부의 수백 명 기마병이 계왕의 뒤로 진열을 갖추고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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