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장. 같이 잘 수 있잖아
“장옥윤.”
장옥윤은 등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두변을 본 장옥윤은 흠칫 놀랐다. 옛 친구를 보게 되어 무척 기뻤지만, 지금 두변과 자신의 신분 차이를 생각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노비, 두 대인을 뵙습니다.”
환관의 세계가 이러했다.
예전엔 얼마나 가까운 친구였을지 몰라도, 졸업 이후에는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는 사람과 가장 낮은 곳에서 몸을 바짝 낮추고 사는 사람으로 나뉘는 세계였다.
두변이 말했다.
“백색부 동창 천호소의 시백호에 부임하러 갈 텐데, 내 곁에 산술을 엄청 잘하는 사람이 필요해. 나와 함께하지 않겠어? 한동안은 동창 직함 없이 내 개인 조수로 지내야 해.”
장옥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과 희열감에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마를 땅에 박은 채 외쳤다.
“노비, 주인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지금의 두변은 손끝 하나 까딱하면 지옥에 있던 사람을 천국으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바로 권력의 매력이다.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목욕을 한 뒤에, 광서 동창 진무사부로 와서 나를 찾아.”
두변이 떠나자, 장옥윤은 제자리에서 잠시 고민했다.
‘변소 청소를 마저 끝내야 하지 않나?’
장옥윤이 고민하는 사이, 그를 괴롭히던 환관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따귀를 올려쳤다.
“장 대인! 노비가 눈앞에 태산을 두고도 태산을 못 알아봤습니다. 혹시나 기분이 언짢은 게 있으시다면, 저를 얼마든 욕하고 때리십시오. 제가 한 번이라도 피하면 전 개보다도 못한 자식입니다!”
툭하면 장옥윤을 때리고 욕했던 다섯 명의 환관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빌었다.
장옥윤 또한 두변처럼 권력의 매력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두변의 수하가 된 이상, 장옥윤을 괴롭히던 이 다섯 명은 자신의 말 한마디에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장옥윤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무릎을 꿇고 있던 환관들을 일일이 부축해서 일으켰다.
“사형들, 내가 부탁 하나만 할게요. 앞으로 또 나같이 약한 환관을 만나게 된다면 너무 매몰차게 대하지 말아줘요. 그들도 사형처럼 불쌍한 사람일 뿐이에요. 이 세상에서 가엾은 사람들끼리 힘을 합치지 않고 서로 괴롭히기만 한다면, 우리가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진쌍쌍이 두 눈이 빨개질 정도로 울면서 두변에게 아무리 위험해도 괜찮으니, 제발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청했지만, 두변은 예정대로 진쌍쌍을 유모 댁에 남겨두기로 했다.
유모와 작별인사를 한 뒤, 두변은 이연정과 작별인사를 하러 갔다.
이연정은 경성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고, 두변은 이연정과 작별인사를 끝내는 대로 백색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두변, 네가 백색부에서 죽게 된다면 나는 무척 슬플 테지만, 절대로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폐하께 충효를 다하기로 했으니, 이 험난한 세상에서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치는 건 후회할 일이 아니다.”
두변은 이연정의 말에서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가운데, 용사 한 번 떠나면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다신 돌아올 수 없으리.’의 비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
(풍소소혜역수한風蕭蕭兮易水寒,
장사일거혜불복환壯士一去兮不復還
중국 연燕나라의 태자 단丹이 고용한 자객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죽이기 위해 역수를 지나면서 읊은 시구. - 사기史記)
이연정은 자기가 직접 키운 의손 이원을 여진의 최전방인 무순부로 보낼 정도로 대의가 우선인 사람이었다.
두변이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알겠습니다.”
이연정이 두변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꼭 살아남아야 한다. 꼭 살아남아서 제국을 위해 백색부에서 입지를 다지도록 해라. 너는 여씨 토사의 가장 약하고 부드러운 약점을 찌를 수 있는 비수가 될 것이다. 내 말이 맞느냐?”
“그렇습니다.”
이연정이 두변을 한참 바라보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한다면, 나를 조부라고 불러도 좋다.”
두변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소손, 양조부를 뵙습니다.”
이연정이 두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이 할아비가 너를 믿는다. 너는 머지않아 네 아비와 나의 자랑이 될 것이다.”
따뜻한 작별을 마친 이연정은 지체하지 않고 말을 타고 북쪽으로 떠났다.
두변은 이연정이 떠난 방향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이며 그를 배웅했다.
두변은 야생마를 타고 진평, 이삼, 이사, 이위, 좌앙, 임계연, 장옥윤을 데리고 계림부를 떠났다.
대종사 영종오가 어둠 속에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동창 시백호 두변은 열 명이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을 이끌고 용담호혈로 향하고 있었다.
이틀이 지날 무렵, 길을 재촉하던 두변 일행은 선화현 역참에 도착했다.
이곳은 백색부에 도착하기 전, 두변이 거칠 수 있는 대녕 제국의 통치를 받는 마지막 현이었다. 따라서 이들 일행은 내일이면 이곳을 지나 용담호혈의 경계지역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선화현 역참의 관리들이 동창 백호인 두변을 특별히 살뜰하게 챙기진 않았지만, 오늘 역참에 묵는 사람 중 품급이 두변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는지라 그에게 제일 좋은 방을 내주었다.
두변이 막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밖에서 땅이 울리는 듯한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두변이 창밖을 내다보자,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족히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었다.
수백 명 무사, 수백 명 가복, 수십 명 서생과 막료가 깨끗한 옷을 입고 당당한 모습으로 역참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들의 중앙에는 몹시 크고 화려한 대마차가 있었는데, 이 대마차를 끄는 데 무려 말 네 필이 동원되었다.
두변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누구길래 저렇게 호화롭고 요란스럽게 다니는 거지? 순무 대인이 납신다고 해도 저렇게 위풍당당하지는 않겠는데?’
“역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내쫓아라.”
멈춰선 마차 안에서 누군가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마차 옆에 대기하고 있던 무도 고수가 대답하고는, 말을 탄 채로 선화현 역참 안으로 들어와서 큰소리로 외쳤다.
“주인께서 역참을 빌리고자 하시니, 이곳에 묵고 있는 사람들은 당장 짐을 싸서 떠나라.”
두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어허? 이것 봐라. 도대체 누구길래 역참 안에 있는 사람을 죄다 내쫓아?’
전 오주부 동창 백호 임계연은 제 주인이 치욕스러운 일을 겪게 할 수 없어서 두변이 나서기 전에 먼저 앞장서서 외쳤다.
“광서 동창 소주인께서 이곳에 계신다. 너희들이 누구길래 이리도 경솔한 짓을 하는 것이냐.”
마차 안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다가, 이내 한 여인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광서 동창 소주인이라고?
어머, 부군, 정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당신의 고자 형님을 여기서 만나네요. 이를 어쩐다. 나는 저 사람이랑 같은 지붕 아래서 지내기가 싫은데요. 수준 떨어지게.”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이토록 와닿을 줄이야!
두변의 이복동생이자,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서자 두염은 새로운 관직에 부임하기 위해 부인 방청의와 함께 백색부로 향하던 길이었다.
그간 한 번을 마주친 적 없던 두 사람이 공교롭게도 백색부에 들어서기 전 마지막 역참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두염이 마차 밖까지 다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방청의에게 말했다.
“낭자,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 금방 저놈을 쫓아낼 테니.”
두염이 마차에서 내려오더니 역참 안으로 들어와서 외쳤다.
“환관 두변이라고 했나?”
두변도 방 밖으로 나와서 마당에 서 있는 준수한 공자를 바라보았다.
두염의 외모는 두변과 비슷해 보였지만, 두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영준하고 온몸에서 자신감이 흘러내리면서 기세등등했다.
두변은 두염 부부와 이곳에서 이렇게 마주칠 줄 몰랐지만, 이왕 마주친 거, 굳이 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두변이 두염의 얼굴을 보면서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이냐.”
두변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두염이 말했다.
“조정이 각지에 역참을 만든 건, 조정의 임명을 받은 관리들이 잠시나마 편히 쉬라고 만든 곳이다. 동창 백호 주제에 조정 관리라 할 수가 있나? 이 역참은 너를 위해 준비된 게 아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묵어야겠으니까, 당장 짐 싸서 이곳을 떠나라.”
두변은 이복동생 두염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두염은 누가 봐도 서출 같지가 않았다. 그에게선 모든 게 자기 손바닥에 있다는 듯한 자신감, 문관의 우월감이 느껴졌다.
부인을 위해서 6품 동창 백호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내쫓는 걸 보니, 두염은 두변이 무슨 짓을 해도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두변의 전 정혼자이자,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방청의는 화려한 마차 안에 앉아서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두변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볼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두변이 웃었다.
“역참이 이렇게 큰데, 우리 몇 명 정도는 같이 잘 수 있잖아?”
두변은 세 사람이 역참에서 함께 자는 게 아니라, 세 사람이 한 침상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것도 환영이었다.
‘사람이 말이야. 넓은 가슴으로 사람을 포용할 줄을 알아야지.’
두변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생각했다.
두변의 저질스러운 속내를 알 리 없는 두염이 차가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엄당 사람과 한 역참을 쓸 생각이 없다. 우린 환관 특유의 악취를 못 견디겠거든.”
‘아무리 어린 나이에 출세했다고 해도 그렇지, 아주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군.’
두변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두변은 두염과 방청의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부류를 상대할 땐 무력이 아닌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게다가 저쪽은 천 명이 넘는 사람을 데리고 왔으니, 쪽수로도 압도적으로 밀리고.
두변은 두염이 가장 득의양양한 분야가 뭘까 생각하다가, 열일곱에 이갑(二甲)수석으로 진사가 된 그의 재능이 떠올랐다.
자기 부인 앞에서 얼굴도 못 들 정도로 두염의 체면을 구길 방법은 바로 두염이 가장 우월감을 느끼는 분야에서 그를 찍어 누르는 것이다.
방청의 같은 최고 수준의 귀족 천금은 만에 하나 남편이 자신을 창피하게 만든다면,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는 봐주더라도 그 후로는 남편을 벌레 취급하거나 허수아비 취급하게 된다.
두변이 지금 방청의에게 보여주려는 건, 자신이 모든 면에서 두염보다 낫다는 것이었다.
두변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두염이 먼저 말했다.
“두변, 광서 환관 졸업시험에서 수석을 했다면서? 정말 대단해?”
역시 피가 섞인 형제여서 그런지 무력을 쓸 생각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두염의 말투에는 업신여김과 비아냥이 가득했다.
두염은 전시 이갑 1등, 즉 전국 4등 수재이지만, 두변은 고작 광서 환관 졸업시험에서 1등을 했을 뿐이다.
두염의 눈에는 두변이 졸업시험에서 어렵게 얻어낸 1등이 촌 동네 소꿉놀이에 불과했다.
이때, 방청의가 화려한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한 손을 다소곳이 배 앞에 놓고 다른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가볍게 끌어 올린 뒤, 고개를 숙인 채 사뿐사뿐 다가왔다.
방청의의 시선은 자신의 발치만 향했고, 두변에게는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두변은 속으로 감탄했다.
방청의가 영설 공주와 비교될 만한 절색가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더없이 고귀하고 우아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영설 공주보다 더 공주 같기도 했다.
여인의 몸매는 여리여리하면서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완벽하게 나와서 보기만 해도 침이 꿀떡 넘어갈 정도였다.
게다가 감히 변태 같은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분위기 같은 것이 있었다.
방청의가 두염 곁으로 다가가더니, 그의 팔을 살짝 끌어안으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부군, 저속한 엄당 사람들을 대할 때도 부군의 격을 떨어트려선 안 돼요. 저들을 내쫓을 때도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말고, 품격 있게, 우아하게 내쫓아줘요.”
두염이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방청의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더러운 승냥이나 들개 따위를 내쫓을 때도 품격을 잃지 않소.”
두염이 두변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두변, 듣기로는 네 시문 능력이 그리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