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장. 누님도 초월자?
두변이 전병 열 몇 장을 꺼내 왔다.
급할 때 먹을 건량으로 챙긴 것인지라, 별다른 속 재료 없이 밀가루로 밀어내서 기름에 튀긴 전병일 뿐이었다. 두변은 영 시원찮아서 거의 손도 대지 않았었다.
늙은 거지가 두변의 호의를 거절하면서 당부하듯이 말했다.
“투항해서 여씨 토사에게 빌붙어서 부귀영화를 누릴 게 아니라면, 그 전병들은 좀 아껴먹는 게 좋을 것이오. 며칠 후면 자네도 내 옆에 앉아서 비렁뱅이가 될 테니까.”
늙은 거지가 자신의 오른쪽 바닥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자자, 제국의 충신 두변. 자네의 관직은 차치하고, 내 오른쪽 자리를 내어줄 테니 이리 와서 적응 좀 해보게. 며칠 후면 같이 앉아서 구걸해야 하니까.”
두변은 도 백호가 충신이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지금은 그만 쳐다보기만 해도 자꾸만 구역질이 하고 싶었다.
두변은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어르신, 천천히 구걸하시지요.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천호소 안으로 들어간 두변은 자신의 집무실을 찾아냈지만, 집무실이라고 부르기도 뭐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전 오주 동창 백호 임계연이 온 사방을 뒤져서 간신히 멀쩡한 책상과 의자, 그리고 침상을 구해왔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하군.’
임계연이 속으로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인이 나가서 이것저것 사 오겠습니다.”
두변이 그에게 몇십 냥 은자를 건넸다.
얼마 뒤, 임계연이 토라진 표정으로 돌아와서 두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인, 죄송합니다. 소인이 쓸모가 없어서 그런지, 어디에서도 우리 돈을 받고 물건을 팔려는 점포가 없었습니다.”
두변이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색부에 도착하기도 전에 자신들 일행에 여씨 토사 감시가 붙었었다. 죽이지도 않고 때리지도 않지만, 돈이 있어도 먹을 것과 생필품을 살 수 없게 만들어서 사람을 피 말려 죽이는 게 여씨 토사의 수법이리라.
이삼이 말했다.
“식량과 물자는 계림에서 운반해올 수 있습니다.”
두변이 고개를 저었다.
‘여씨 토사라면 계림에서 운반해오는 사람을 몰살해버리겠지. 계림 동창의 물건은 절대로 백색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해.
수단이 참 지독하긴 하군.
피 말려 죽이거나, 여씨 토사의 주구로 만들거나, 이곳에서 꺼지도록 하든가, 거지가 되어서 동창과 조정이 창피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든가.
위험천만한 백색부는 뭔가 음침하고 기이한 구석이 있는 것이, 하루라도 빨리 이 국면을 타파해야겠어.’
이대로 보름 이상 수급 물자 없이 지내게 된다면, 입지를 다지는 건 차치하고,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져서 먹고 살 걱정부터 해야 할 지경이 될 것이다.
이 국면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청룡회주 계청주였다. 그의 인정을 받게 되면, 이곳에서 입지를 단단히 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대종사 영종오가 말했다.
“두변, 이곳에서 하룻밤만 지내면서 기다려 보아라. 내가 청룡회로 가서 계청주의 속내를 좀 알아보고 오마.”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종오는 계청주와 같은 대종사급 무도인이니, 계청주가 그에게 어느 정도 체면을 챙겨줄 것이다.
“오늘 저녁은 다들 건량으로 끼니를 때우고, 침상이 없으니 대충 이부자리를 깔아서 한숨 자도록 하자. 모든 건 내일 다시 얘기하자.”
두변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임계연 등이 일제히 대답했다.
짙은 어둠이 백색부의 하늘을 메웠다.
밤이 되었는데도 영종오는 아직 천호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바닥을 침상 삼아 누워 자고 있었고, 두변은 임계연이 찾아온 침상에 누워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던 두변은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면서 이 국면을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했다.
그때, 두변의 코끝에 매혹적인 향이 스치고, 허름한 방이 순식간에 몽환적으로 바뀌었다.
두변이 눈을 비비면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시 눈을 깜빡이자, 그의 눈앞에 혼미할 정도로 아름다운 절세미인이 나타났다.
영설 공주보다 더 아름다운 그녀는, 성화교 전설 속의 성화 마녀, 여완완이었다.
지난번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서 여완완을 볼 수 있게 된 두변은 그녀가 여천천이 아님을 더욱 확신했다. 여완완은 여천천보다 더 아름다웠고, 단순히 이목구비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얼굴, 몸매, 목소리와 몸짓에 몽환적이고 매혹적인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이런 분위기는 영설 공주나 옥진 공주도 가지지 못한 마력 같은 분위기였다.
그녀는 아름답고 요염했고 위험할 정도로 신비로웠다. 성화 마녀라는 이름답게 뭇 사내들의 혼을 쏙 빼갈 정도의 마녀였다.
두변은 저번에 이미 자신을 보러 왔던 여완완이 또다시 자기를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여완완이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것만 같은 눈빛으로 두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 분을 바라보던 여완완이 두변에게 천천히 걸어와서 가느다란 손끝으로 두변의 턱을 살포시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끝은 두변이 움찔할 정도로 차가웠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매혹적인 향기가 더욱 두변의 코끝을 자극했다. 두변은 꼭 여우 덫에 걸린 사람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여완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두변도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이때, 드디어 여완완이 입술을 살짝 벌렸다.
두변은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여완완의 달콤한 숨결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녀가 뱉은 말은 정신이 퍼뜩 들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두변 동생? 내가 몇 날 며칠을 네 생각에 잠을 못 이뤘는지 알아? 밤마다 생각나면 어쩌자는 거야.”
여완완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아 참, 우리 두변도 초월자지?”
두변은 온몸의 털끝이 삐쭉 섰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침착함을 되찾고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되물었다.
“누님도 초월자인가 보네요?”
성화 마녀 여완완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대답했다.
“아니. 나는 아니지.”
여완완이 섬섬옥수로 두변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지다가 두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두변에게 입맞춤을 했고, 장난스럽게 그의 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핥았다.
여완완이 교태를 부리듯 속삭였다.
“하지만 내 사부가 초월자이셔. 물론 지금은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게 되셨지만 말이야.”
제국 서남 제일 무도 강자, 청룡회주 계청주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명상하는 데 사용했다.
그는 이번 생에 더 바라는 게 없었다.
그는 황제가 하사했던 명예 총병관 성지도 가차 없이 버린 사람이었다.
여여해가 직접 그를 찾아와서 서남 토사 연맹 맹주이자, 미래 성화 제국의 국사가 되어달라고 제안했지만, 그는 자기가 일대 무도 종사이지, 근본도 없는 도사나 승려도 아니니 국사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계청주는 자신이 백색부에서 입지를 단단히 할 수 있고, 대녕 제국의 서남 지역에 이렇게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건, 대녕 제국과 여씨 토사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인 성향 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계속해서 이렇게 중립만 잘 유지하면, 지금처럼 서남의 토황처럼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계청주에게 유일한 목표가 있다면, 자신의 무도 수양을 좀 더 높이는 것이었다.
계청주는 제국 제일 고수도 아닌, 서남 제일 고수라는 미명이 영 탐탁지 않았다.
그의 최종 목표는 북명검파의 영감태기 막나(莫奈)를 죽이고, 이상만 높은 장로들을 없애는 것이었다. 이 목표는 사부를 위한 복수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위한 복수이기도 했다.
계청주는 이 목표를 위해 벌써 수십 년을 할애했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목표는 점점 더 멀게만 느껴졌다.
계청주의 무공 수준은 이미 충분히 높아서 이도진, 이도전과 무공을 겨뤄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사부의 복수를 위해서 막나라는 영감태기를 죽여야 하는데, 그의 무공은 막나를 죽이기엔 아직 부족했고, 북명검파의 장로들을 죄다 죽일 수조차 없었다.
이때, 제자 한 명이 밖에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사존(師尊), 영종오 대종사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볼 생각 없다.”
계청주가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영종오는 황제의 스승이었으니, 대녕 제국의 사람이다.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 대녕 제국의 사람이라면 무조건 문전 박대해야 했다.
제자가 말했다.
“영종오 대종사께서 ‘대천방검법(大天方劍法)’을 논하고자 오셨다고 합니다.”
계청주가 흠칫 놀랐다.
‘대천방검법’은 계청주가 최근 입수한 비급으로, 절대 비급은 아니지만 희소성이 있는 비급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검법의 일부가 손실된 탓에 밤낮을 지새우며 검법 비급을 보완하려고 노력하던 차였다. 하지만 아무리 추측하고 생각해도 훼손된 부분을 보완하지 못해서 곧 울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대종사 영종오가 이 검법에 관해서 논할 게 있다고 말하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계청주는 무도에 미친 자였다. 비록 ‘대천방검법’을 수련한다고 해서 자신의 무공이 향상되는 건 아니지만, 이 비급을 완벽하게 보완하고픈 욕심이 있었다.
“안으로 모시거라.”
이내 영종오가 들어와서 진중하게 예를 표하면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계 형(兄).”
계청주도 공손하게 답례했다.
“영 형.”
계청주가 먼저 말했다.
“정말 아쉽게 되었소. 한 번쯤은 영 형과 함께 무예를 겨뤄서 우리 두 사람의 승패를 가려보고 싶었소. 몇 년을 그렇게 벼르고 있었는데, 영 형이 나라를 위해 희생을 자청하면서 오른손을 못 쓰게 되었으니, 겨뤄볼 기회가 더는 없게 되지 않았겠소.”
영종오와 계청주는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만나본 적은 없었다. 영종오는 계청주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게 처음인지라,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다들 계 형이 서남 제일 고수라고 하던데, 내가 보기에는 제국 서남 제일 미남이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소.”
계청주는 남자다운 미남의 정석이었다. 두변이 예쁘장한 사내에 가깝다면, 계청주는 베일 듯한 콧대와 날카로운 턱선, 반듯한 이목구비와 체격 등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준수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계청주가 민망해하면서 대꾸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계청주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계청주는 당장 그 사람을 문밖으로 내쫓았을 것이다.
영종오가 품에서 서적 한 권을 꺼내서 그에게 건넸다.
“이게 바로 ‘대천방검법’의 훼손된 부분이오.”
계청주가 냉큼 영종오가 건넨 서적을 받아왔다.
막 서적을 펼치려고 할 때, 계청주가 멈칫하면서 영종오에게 물었다.
“일단 나를 찾아온 이유를 먼저 말해주시지요. 내가 해줄 수 없는 일인데, 선물을 덥석 받아버리면 나중에 영 형이 후회하실 것 같소.”
영종오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계 형에게 드리는 선물은 별개요. 그 검법을 완전하게 보존해서 널리 퍼트리는 게 바로 우리네 대종사들의 미덕 아니겠소.”
계청주가 그제야 안심하고 서적을 펼쳤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으면서 만족스럽다는 듯이 서적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검법이 완전해지자, 며칠간 쌓였던 근심 걱정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어서 두 사람은 ‘대천방검법’에 관해 토론했고, 그렇게 두 시진이 지났다.
어느 정도 대화가 마무리되자, 계청주가 다시 한번 영종오에게 물었다.
“영 형이 어쩐 일로 나를 찾아온 것이오?”
영종오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계 형이 가히 검패(劍覇)라고 불릴 정도로 검법이 패기 넘친다고 들었소. 내게 제자 한 명이 있는데, 계 형에게 며칠만 보내서 검법을 배우게 할 수 있겠소? 그의 천부적인 재능은 내가 살면서 처음 볼 정도로 우수하니, 그가 배우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넣어둬도 좋소. 계 형도 절대로 실망치 않을 만한 놈이오. 한번 스승이 되면 평생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고 모셔야 하는 이치를 잘 아는 제자이니, 그놈은 계 형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을 것이오.”
계청주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영종오를 바라보았다.
“영 형이 말씀하신 제자가 백색부 신임 동창 시백호 두변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