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장. 없는 것도 서게 할 여인
영종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계 형은 모든 걸 다 알고 있군요. 두변은 전무후무한 재능을 타고난 놈이오. 두변의 천부적 재능은 계 형의 딸인 계표표보다 더욱 뛰어나오.”
계청주가 단호하게 손사래 쳤다.
“절대 그럴 리 없소. 우리 표표는 곧 종사급 무사가 될 아이요. 이번에 깊은 동굴 속에서 수련하고 있으니, 종사급 무사가 되는 건 시간 문제지요. 스물아홉밖에 되지 않았는데 종사급에 가까운 무공을 익힌 사람은 우리 딸 말고는 본 적이 없소.”
영종오는 속으로 기뻐했지만,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하면서 말했다.
“두변을 이 자리에 한 번 불러보는 게 어떻겠소? 계 형도 정말로 놀랄 것이오. 두변이 계표표 소저보다 재능이 뛰어나다는 걸 이 자리에서 볼 수 있을 것이오.”
계청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영 형, 일부러 내 오기를 자극해봤자 소용없소. 불가능한 일이오.”
영종오가 잔뜩 아쉬워하면서 물었다.
“정말 불가능하단 말이오? 두변에게 무공 지도만 며칠 부탁하는 것도?”
계청주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대녕 제국과 여씨 토사 사이에서 절대적인 중립을 지키고 있소. 두변을 내 제자로 받아들이거나 이 집에 발을 들이게 하는 것부터가 하나의 태도를 표명하는 것이오. 나는 이번 생에 대녕 제국과 그 어떠한 교류를 하지 않을 것이오. 영 형이 나와 차를 마시며 담화를 나눌 게 아니라, 계속 이 얘기를 하려는 거라면 이만 일어나도 좋을 것 같소.”
계청주의 태도는 무척 단호했다.
영종오는 천호소에 두고 온 두변이 걱정되기도 해서 먼저 일어나보겠다고 했다.
어차피 오늘은 가볍게 계청주의 마음을 두드려보러 온 것이니, 지금 떠난다고 해서 아쉬울 건 없었다.
이때, 계청주의 제자가 밖에서 말했다.
“이도진, 여여지가 계 대종사를 뵈러 왔습니다.”
‘참 빨리도 왔군. 영종오가 두어 시진 전에 도착했는데, 벌써 소식을 듣고 달려오다니.’
계청주가 냉랭하게 말했다.
“보지 않는다고 전해라.”
이어서 계청주가 영종오에게 제안했다.
“영 형, 잠시 더 남아서 나와 차나 한잔 하시지요.”
계청주는 두변을 제자로 거두진 않지만 영종오에게 담소를 나누자고 제안했고, 여씨 토사의 사람들은 문전박대했다.
영종오는 여씨 토사에게 냉랭한 계청주를 보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백색부 천호소 안.
여완완이라는 마녀에게 입술을 뺏긴 두변은 두피부터 발바닥까지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이 찌릿했다. 단순히 환각이 아니라 정말로 전기가 통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여인이 요법(妖法)을 쓸 줄 아는 건가?’
두변은 온몸이 찌릿한 건 차치하고, 그녀가 뱉은 말이 더욱 놀라웠다.
여완완의 사부가 초월자라는 건, 아마 그 사람이 바로 두변이 생각한 이전 세대의 숙주일 것이다.
핵폭탄급 소식을 접한 두변은 최대한 진정된 모습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누님, 지난번에 나를 보러 왔을 때는 왜 말 한마디 없이 간 겁니까. 그땐 나를 죽이지도 않고, 오늘처럼 이렇게 애정 가득하지도 않았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나를 보자마자 입맞춤까지 해주시나요? 그땐 차갑기만 하더니, 오늘은 아주 화끈하시네요.”
여완완이 까르르 웃으면서 두변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었다. 돌연, 방 안은 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한 봄이 된 것만 같았다.
“그날 널 봤을 땐, 내가 꿈속에서 본 얼굴이 맞긴 하지만 정말로 내가 생각하는 그 초월자가 맞는지 확신하지 못했거든. 네 몸에서 그 냄새가 나지 않았어. 하지만 오늘 네 냄새를 맡아보니 정말 너무도 익숙하더라고. 그래서 확신했지. 네가 바로 내 초월자 동생이구나 하고.”
여완완이 말을 끝낸 뒤, 얼굴을 가까이하고 두변의 냄새를 맡았다.
여완완의 모든 손짓과 눈빛은 이 세상 9할 이상의 사내가 사랑에 빠지게 만들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사내들은 그녀가 독이 든 술이라고 해도 기꺼이 마실 것이다.
두변은 아직 제대로 사내 구실을 하지 못하는 환관이지만, 아래쪽에서 무언가 뜨거운 게 느껴졌다.
이 세계에 와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느낌!
여완완은 환관의 없는 것도 서게 할 여인이구나!
“내 사부는 너처럼 다방면으로 재능이 흘러넘치는 사람이 아니라, 무도에 미친 사람이었어. 그래서 그런지 너만큼 재미가 없더라니까.”
여완완이 말했다.
재능이 흘러넘친다는 말을 들은 두변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내 재능이 흘러넘치긴 하지. 이 세계에서 내가 썼던 시 중에 내가 이미 알고 쓴 것도 있으니까. 죄다 베껴 쓰진 않았거든. 그나저나, 전 숙주는 허구한 날 드라마나 영화만 본 건가? 내가 했던 것처럼 다른 지구의 걸작들을 베껴 오지 않았나 보네?’
두변이 물었다.
“누님, 초월자 선배분은 어떤 분이시죠? 저도 정말 궁금하네요.”
여완완이 대답했다.
“전(前) 세계 성화교 부교주이셨지. 어때. 대단하지?”
두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 대단하긴 했다.
성화교는 이 세계에서 가장 신권이 높은 두 종교 중 하나로, 몇십 개 제국과 몇억 명 인구를 장악하고 있다.
이전 숙주인 초월자가 여씨 토사에 와서 여완완의 사부가 된 걸 보면, 성화교로 대녕 제국을 정복하려던 게 틀림없었다.
대녕 제국이 바로 성화교의 최종이자, 최대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이내 그자가 왜 다른 지구의 시문을 베끼지 않은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그자는 성화교를 발전시키는 게 임무였을 것이니 자기처럼 시를 베껴쓸 일은 없었으리라.
두변이 물었다.
“사부는 어쩌다 그렇게 되셨는데요?”
“잘못을 했으니까 그렇게 되셨지. 아마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무공을 내게 전수해줘서 그렇게 되신 게 아닐까 싶어.”
여완완이 대답했다.
두변은 흠칫 놀라면서 속으로 제발 ‘구양진경’은 아니길 바랐다.
두변이 눈웃음을 치면서 물었다.
“누님, 무슨 무공인지 알려주면 안 될까요?”
“예를 들면, ‘구음진경’ 같은 전설급 내공 정도겠지?”
여완완이 대답한 뒤, 두변의 턱 끝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렇게 아름답고 만인을 홀릴 수가 있을까?”
‘미친. 여완완이 배운 게 전설급 비급 ‘구음진경’이라고? 보아하니 숙주마다 배운 내공이 다 다른가 보네. 구음진경도 전 숙주가 지은 이름이겠지? 그나저나 구음진경과 구양진경이 무슨 차이지? 완전 상극인 내공인 건가?
아니면 서로 모자란 부분을 보완하는 관계인 건가?’
두변이 물었다.
“누님의 사부는 사내였어요, 아니면 여인이었어요?”
여완완이 큰 눈을 깜빡이면서 대답했다.
“처음엔 사내였는데 나중엔 사내도 아니고 여인도 아닌 몸이 되었어. 우스갯소리로 자기가 무슨 동방불패가 된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동생은 동방불패가 무슨 뜻인지 알아? 난 모르겠는데.”
여완완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동생, 하고 부르자, 두변은 온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전 숙주가 어째서 전설급 비급을 유출한 거지? 그래서 꿈속 시스템이 그를 없애려 한 건가?’
“동방불패는 여인보다 더 아름다운 사내로, 천하제일 무공을 가진 자였어요.”
두변이 설명했다.
“내가 천하제일 고수 할래. 설마 나랑 천하제일 고수 자리를 두고 싸우려는 건 아니지?”
여완완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절대 아니죠. 제가 일평생 바라는 건 오직 사내 구실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부인 세 명에 첩 네 명을 거느리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한평생을 사는 거죠. 그런데 누님을 보니까 제 꿈이 바뀌는 것 같네요. 누님, 제가 왜 백색부까지 와서 동창 시백호가 된 줄 알아요?”
두변이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물었다.
여완완이 두 눈을 말똥말똥 뜨면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왤까?”
두변의 아랫도리가 또 한 번 뜨거워졌다.
두변이 넋이 나간 듯한 아련한 눈빛으로 여완완을 바라보며 고백했다.
“다 누님을 위해서잖아요. 저번에 누님을 그렇게 본 뒤로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누님 생각밖에 나지 않잖아요. 누님을 위해서 졸업시험에서 1등도 했고, 그 덕에 누님과 좀 더 가까운 백색부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된 거죠. 여기가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 곳인지 알지만, 누님과 가까워질 수 있다면, 누님을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아무렴 상관없어요. 완완 누님, 전 벌써 누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어요.”
두변은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를 할 땐 아주 진실된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자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진심 담은 말을 할 때면 상대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특히 여인들 앞에서 진실된 말을 할 때는 창피하기까지 했다.
“진짜?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여천천을 죽였어?”
여완완이 물었다.
두변이 목청을 높여서 대답했다.
“아, 그 몹쓸 인간요? 걔가 누님보다 잘난 곳이 뭐 있다고요! 걘 누님의 발가락 하나만도 못하는 여인이에요. 절세미인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명만 존재할 수 있는데, 그건 바로 누님이죠. 저는 누님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여천천을 죽여서, 누님이 유일무이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한 거예요.”
두변이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술술 거짓말을 했다.
여완완이 울상을 지으며 몽롱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착한 동생, 이 누님이 너를 오해했구나. 난 또 네가 나를 괴롭히려고 백색부까지 찾아온 줄 알았잖아. 그것 때문에 괜히 마음이 속상해져서 무슨 일로 온 건지 물어보려고 왔지.”
두변이 절대 그런 일 없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럴 리가 있나요. 완완 누님, 누님이 수련하는 게 ‘구음진경’이라고 했죠? 제가 무슨 내공을 수련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여완완이 두 손을 가슴 위에 올리고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두변을 올려다보았다.
“뭔데? 설마 ‘구양진경’이야?”
두변이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리 한 명은 양을, 한 명은 음을 수련하니까, 천생연분이 따로 없는데요? 우리의 음양이 결합하면, 분명히 천하제일 고수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두변이 진지한 눈빛으로 여완완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완완 누님, 우리 음양 쌍수(雙修) 합시다.”
여완완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부끄러워하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서? 옆에 사람도 있는데. 부끄럽잖아.”
여완완이 결심한 듯이 비장하게 고개를 들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아주 좋은 곳을 알고 있어. 천지 원기의 정수가 가득한 곳이지.”
“진짜 그런 좋은 곳이 있다고요? 어딘데요?”
여완완이 웃으면서 두변의 손을 잡았다.
“우리 동생, 내가 데려가 줄게. 우리 거기서 하자.”
여완완이 가볍게 땅을 한 번 디디자, 두변의 몸이 붕 뜨면서 여완완과 함께 창밖으로 날아갔다.
영종오 대종사가 없으니, 여완완이 두변을 데려갔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여완완에게 손이 잡힌 채로 날고 있는 두변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요녀의 무공 수준은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거야? 걷지도 않고 완전히 하늘을 나는 정도잖아?
여완완은 여러 지붕 위를 가볍게 톡 톡 디디면서 하늘 위를 날다시피 했다.
그믐달 아래 살랑이며 흩날리는 여완완의 치맛자락은 더욱 그녀를 선녀, 아니, 마녀처럼 보이게 했다.
“누님은 ‘구음진경’을 얼마나 수련했어요?”
두변이 물었다.
“십수 년이지 아마?”
“그럼 누님의 사부가 그때 바로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무공을 몰래 전수해준 건가요?”
“응. 십몇 년 동안 얼마나 많이 가르쳐주셨는데. 사부께서 가르쳐주셨던 건 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전설급 무공이야.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대단하지. 사륭석을 발치에 무릎 꿇리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사부께선 언제 변을 당하신 건데요?”
“음. 반년도 안 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