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무제-215화 (215/648)

215장. 조금 아파도 참아

‘내가 이 세계로 오기 직전인데? 전 숙주가 이계의 무공을 여완완에게 전수해줬다는 걸 꿈속 시스템이 몰랐을 리 없는데, 왜 반년 전에서야 그를 처리한 거지?

그나저나 꿈속 시스템이 왜 그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면서까지 ‘구양진경’ 공법을 곧바로 내 근맥과 단전에 새기게 했는지 알겠네. 내가 무공을 직접 배워서 익히게 되면, 또 여완완 같은 사달이 날까 봐 두려웠겠지.’

여완완은 두변을 데리고 하염없이 날고, 또 날았다.

두 사람은 백색성을 벗어난 뒤, 몇백 리를 더 가서 십만대산(十萬大山)에 도착했다. 십만대산에는 산과 산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다.

십만대산 안에서 또 몇 시진을 날아간 뒤.

여완완이 드디어 멈춰섰다.

두 사람은 구름이 닿을 듯한 높이의 산꼭대기에서 땅을 디뎠고, 그곳에서 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우리 동생, 정말로 나랑 음양쌍수를 할 거야? 내가 특별히 말해주는 건데, 나는 구음진경 외에도 아주 재밌고 사악한 공법을 많이 익혔거든. 이따 나랑 할 때, 나한테 내력을 쏙 빼먹혀서 죽을 수도 있다고.”

여완완이 겁을 주듯이 말하자, 두변이 자리에 앉아서 두 팔을 벌리고 눈을 감고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 말이 있잖아요.

완완 누님. 이리 와서 나를 마음껏 빨아들여요.”

여완완이 몸을 낮추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쏠려서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두변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서 뜨거운 입김으로 귓속말했다.

“조금 아플 수도 있는데, 참아야 해. 알았지?”

영종오는 잠시 더 앉아있다가 자리를 떠났다.

영종오를 배웅한 뒤, 계청주는 청룡회 보루의 핵심 공간으로 들어갔다. 이곳에는 연못 하나만 덩그러니 있고, 주위 몇백 미터 이내로는 인적이 아예 없었다.

신형이 번쩍, 하더니, 연못가에 서 있던 계청주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물속으로 더욱더 내려갔다.

연못의 바닥에는 기관 장치가 몇 개 설치되어 있는데, 각각 다른 순서와 방법으로 기관을 해제하면 바닥에 숨겨놓은 비밀스러운 입구가 열리게 된다.

계청주가 빠르게 입구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가 자동으로 닫히고 비밀 기관들이 다시 잠금이 되었다.

입구가 열리고 닫히는 시간이 워낙 빠른지라, 연못의 수면 위로는 아무런 소용돌이나 물결이 일지 않았다.

비밀스러운 입구로 들어간 계청주는 층계를 따라 다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수십 미터를 내려가던 계청주가 드디어 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청룡회의 핵심 장소이면서, 계청주 혼자만 아는 비밀장소였다.

사실 이곳이 그리 대단한 공간은 아니었다. 철저히 밀폐된 방 안에는 탁자 하나와 붓, 먹, 종이와 벼루가 전부였다.

계청주가 익숙한 동작으로 책상 위의 촛불을 밝혔다. 그리고 바닥에 책상다리로 앉아서, 탁자 아래의 서랍에서 서적 한 권을 꺼냈다.

서적 위에는 ‘육맥신검’ 네 글자가 쓰여있었다.

그렇다. 그가 꺼낸 건 바로 ‘육맥신검’ 무공 비급이었다.

이 세계에 존재해서는 안 될 전설급 외공 비급이자,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유일한 무공 비급!

계청주의 사부가 우연히 육맥신검 고보를 얻게 되었지만, 결국 이 비급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계청주는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이 경건한 모습으로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면서 비급을 정독했다.

각 장에 복잡한 도안과 특수 부호, 알 수 없는 숫자와 문자가 가득했다.

꼬박 한 시진이 지날 무렵, 그의 손끝은 200쪽을 향해 있었다. 그가 200쪽을 넘겼을 때, 아직 뒤로 20쪽 넘는 종이가 남아 있었지만 모두 백지였다.

계청주가 가진 건 완벽하지 않은 ‘육맥신검’ 비급이었다.

계청주는 소매를 걷고 먹을 간 뒤, 붓을 쥐고 신중하게 빈 종이 위로 무언가를 쓰고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속도는 몹시 빨랐고, 그림 한 장 한 장이 무척 정교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이 지났을 때, 계청주가 드디어 붓을 내려놓았다.

그는 ‘육맥신검’ 제1권의 마지막 20장을 완벽하게 보완해냈다.

계청주는 이 비급을 손을 꼭 쥔 채 가슴에 가져다 댔다.

그는 이 비급을 거의 신앙처럼 떠받들었다. 이 비급은 이 세계의 무도 균형을 완전히 깨트릴 수 있는 비급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진귀한 비급이었다. 누구든 이 무공을 배운다면, 원거리 공격을 가할 수 있고, 자기보다 무도 품급이 한 단계 높은 사람도 1초 만에 이길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 이보다 더 사기 같은 외공이 또 있을까.

“사존, 벌써 20년이나 지났는데, 왜 저는 아직도 ‘육맥신검’을 배우지 못하는 겁니까? 이 무공을 익혀야만 제가 사존을 위해 복수할 수 있고, 북명검파를 없앨 기회가 생깁니다.”

계청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읊조렸다.

“이 비급은 그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겠습니다.”

계청주는 길게 한숨을 토한 뒤, 완벽히 보완한 ‘육맥신검’ 비급을 촛불에 가져다 댔다.

200장이 넘는 무공 비급은 그렇게 한순간에 재가 되어버렸다.

사실 이 밀실의 절반이 육맥신검의 재였다.

이 비급은 영원히 계청주의 뇌리에만 박혀있을 것이다.

그는 매일 밤 이곳에 찾아와 머릿속 기억에 의존해서 비급을 다시 작성했다.

매번 그는 꼬박 한 달의 시간을 써서 완벽한 육맥신검을 필사했다. 그리고 비급이 완성될 때마다 지금처럼 불태워 버렸고, 이러기를 무한히 반복했다.

계청주는 그래야만 이 비급을 머릿속에 영원히 박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절대로 이 비급이 밖으로 유출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십만대산의 어느 산봉우리 위.

여완완의 말을 들은 두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 세계는 뭔가 좀 다른가 봐요? 내가 동정을 잃는데 아플 수가 있어요?”

여완완이 큰 눈을 깜빡이면서 대답했다.

“응!.”

두변이 말했다.

“괜찮아요. 아픈 게 대숩니까. 누님, 어서 와요. 누님을 위해서라면 칼산과 불바다도 버텨낼 수 있는데, 그 정도 통증은 당연히 감수할 수 있죠.”

여완완이 그의 입술에 또 한 번 달콤한 입맞춤을 한 뒤, 따뜻한 혀끝으로 그의 입술을 핥았다.

그녀가 다시 두변의 귓가로 입술을 옮긴 뒤, 숨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동생 입술이 참 달다. 뽀얀 얼굴도 어쩜 이리 잘생겼는지.”

여완완이 손끝으로 두변의 얼굴을 야릇하게 쓸어내리더니, 이내 울상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내가 아주 특별한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데, 처녀의 몸이어야만 수련할 수 있는 무공이라서 오늘은 동생이랑 음양쌍수를 할 수가 없네? 조금만 더 참아줄 수 있어? 내가 이제 여덟 번째 층까지 왔으니까, 아홉 번째 층까지만 더 수련하면 우리가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정말 금방이야.”

만약 두염이 이곳에 있었다면 이 말이 귀에 익지 않았을까!

여완완이 이어서 말했다.

“그 전에 우리 놀이 하나만 할까? 아주 아주 짜릿하고 재밌는 놀이 말이야.”

“무슨 놀이인데요?”

여완완이 흥미 가득한 얼굴로 설명했다.

“내가 너를 꿈에서 봤다는 건 진짜야. 근데 꿈에 두 가지 결말이 있는데, 하나는 좋은 거, 다른 하나는 나쁜 결말이야. 그래서 내가 참 고민이 많아. 우리 예쁜 동생이랑 이렇게 뜨거운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아니면 우리 동생을 죽여야 할지. 그러니까 나랑 놀이 하나만 하자.”

여완완이 새끼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두변을 쳐다보았다.

“듣기로는 너희같이 하늘의 점지를 받은, 그러니까 두변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생은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네가 사륭 부족에서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도 들었어. 구두사 신의 심연에 뛰어들었는데, 살아서 돌아왔다며? 그리고 최병정을 죽이고 사륭석을 설득해서 여씨 토사를 공격하라고도 했고. 너 진짜 멋있고 용감하더라.”

두변도 더는 연기하지 않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놓고 물었다.

“여완완, 도대체 어떻게 사륭석을 정복한 거지?”

여완완이 대답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그를 정복하려고 한 게 아니라, 사륭석이 나를 정복하려고 했던 거야. 만군이 패배했을 때, 사륭석은 도망칠 시간이 충분했는데도 도망치지 않았어. 사륭석이 나를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뭐였는지 알아? 나랑 혼례를 올리고 싶고 나랑 하고 싶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더라고. 그 뒤로 갑자기 자발적으로 서남 토사 연맹에 합류했어. 사륭석이 대단한 사람이긴 하니까, 이왕 합류한 거, 부맹주 하라고 그 자리를 줬지.”

두변은 사륭석이 패배한 뒤에 여완완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가 성화 마녀라는 것을 깨닫고 여완완을 통해 서남 토사 연맹을 정복하려는 야심이 꿈틀거렸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여완완이 물었다.

“너는? 너는 어떻게 구두사 신의 심연에서 살아 돌아온 거지?”

“구두사 신이 내게 세 가지 질문을 했는데, 내가 다 정답을 말해서 날 죽이지 않고 내보내 준 거지.”

“그 세 가지 질문이 어느 머리가 내 진짜 머리냐, 올해 내가 몇 살이냐, 앞으로 몇 년 더 살 수 있냐, 이거 맞지?”

두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걸 여완완이 어떻게 아는 거지?

두변의 표정을 본 여완완이 콧소리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구두사 신의 심연에서 살아 돌아온 첫 초월자가 아니잖아. 물론 그분은 너보다 몇 년 더 일찍 그 일을 겪긴 했지만.”

‘그렇군. 나 이전에 살아나간 사람이 이전 숙주였었군.’

여완완이 이어서 말했다.

“난 네가 구두사 신의 심연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부터 너를 의심하기 시작했어.”

여완완이 두변의 팔짱을 끼면서 물었다.

“우리 동생, 동생이 구두사 신에게서도 살아 돌아왔으니까 제안하는 건데 그때 비슷한 목숨을 건 놀이 한 번 더 해보자. 네가 또 한 번의 기적을 만들어낼 수도 있잖아.”

“그건 좀 그런데?”

두변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팔짱을 뺐다.

“으응, 동생에겐 선택권이 없어. 네가 살아 돌아오면, 우리가 음양쌍수도 할 수 있는걸.”

“음양쌍수는, 개뿔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두변의 가증스럽다는 표정에 여완완도 손을 거두면서 본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네가 나랑 끝까지 바보인 척 연기할 줄 알았지.”

이어서 여완완이 곧바로 두변의 손을 잡아끌고 밑이 보이지 않는 심연 앞으로 걸어갔다.

“여기에도 아주 아주 깊은 심연이 있어. 이 심연 아래엔 뭐가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난 알려줄 생각 없으니까. 네가 한 번 직접 가서 봐봐.”

이 심연도 구두사 신의 심연처럼 이 지구의 대균열이 일어났을 때 생긴 심연이었다. 서남 지역에 있는 이런 심연들은 아래에 뭐가 있을지 모를 뿐이니, 누구든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천만했다.

“이거 하나만 알려줄게. 이 심연 아래에 있는 건 구두사 신보다 훨씬 더 끔찍할 거야. 그것들의 공통점을 굳이 찾는다면, 이 아래에 있는 것도 사람을 먹는 걸 좋아한다는 것? 우리가 일정 기간에 한 번씩 산 사람을 이 아래로 던져서 이걸 키우고 있거든. 두변 동생, 넌 운이 워낙 좋으니까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고 믿어.”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는 새까만 심연 아래서 피비린내가 섞인 바람이 휘몰아쳤다.

조용하기만 하던 구두사 신의 심연에 비하면, 이곳은 지옥처럼 온갖 원귀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했다.

여완완이 두변을 심연 아래로 던지려던 찰나, 두변이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 내가 알아서 내려갈게.”

여완완이 웃음을 터트렸다.

“좋지. 우리 두변 동생, 역시 용감해.”

‘용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죽을 고비를 넘긴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런 걸 해야 하다니. 지난번 심연의 끝엔 구두사 신이 있었는데, 이번엔 또 무슨 괴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려나.’

선택권이 없는 두변은 깊이 심호흡한 뒤, 이를 악물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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