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장. 최대한 내게서 떨어져
이 무리가 모두 죽어야만 두변과 계표표가 살 수 있을 것이다. 저놈들은 계표표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서 무참히 유린한 뒤에 죽일 테니까. 하지만 6품 무사에 불과한 데다, 단혼영까지 모두 써서 한 명을 죽이는 것도 벅찬데, 어떻게 열댓 명을 모두 죽일 수 있을까.
두변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이 정신 공격을 막 배웠다. 바로 이 동굴에서 말이지. 내가 이 무공을 배운 건 이곳에 있는 한 무덤에서인데, 무덤의 관 위에 복잡한 문자와 그림이 가득해. 그곳에 가면 이 무공을 배울 수 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지?”
악려가 물었다.
“원한다면 날 언제든 죽일 수 있잖아?”
두변의 말에 악려와 운철 장로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얼마나 먼데?”
“십몇 리 떨어져 있다.”
“네가 앞장서라. 여기서 도망칠 궁리를 했다간 어떻게 되는지 잘 알지? 조금이라도 다른 낌새가 보였다가는 네놈의 손발부터 분질러주마.”
두변이 고개를 끄덕이고 조건을 붙였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다.”
“말해.”
“아무도 계 소저를 건드릴 수 없고, 계 소저를 이곳에 남겨두어야 해.”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저년이 있어야 네가 허튼수작을 벌이려고 할 때 저년으로 널 위협하지.”
악려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내가 계 소저를 등에 업고 움직일 테니까, 아무도 계 소저를 건드려선 안 돼.”
“하하하. 잠깐이라도 좋으니 계표표를 만지고 싶나 보지? 그래, 그래라. 내가 선심 썼다. 그렇게 해.”
악려가 지금 신경 쓰는 건 오직 정신 공격 비급이니, 계표표가 잠깐 두변의 등에 업히는 건 전혀 대수롭지 않았다.
어차피 정신 공격 비급을 받는 즉시 두변은 죽을 것이고, 계표표는 여전히 그의 손에 들어와서 꼼짝도 못 할 테니까.
두변은 자기보다도 키가 조금 더 큰 계표표를 등에 업으면서 살짝 당황했다. 이토록 탄력이 놀라운 몸은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었다. 혼수상태임에도 계표표의 폭발적인 힘과 몸매가 등을 고스란히 통해 느껴졌다.
“빨리빨리 움직여. 안 그러면 이년을 발가벗기고 업게 할 거니까.”
악려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칼로 두변의 허벅지를 푹 찔렀다. 반 촌 정도 들어온 칼을 뽑아내니, 두변의 허벅지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두변은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계표표를 등에 업고 걸음을 움직였다.
패도회 무사 열댓 명이 그를 앞뒤로 포위한 채, 반걸음도 빠져나갈 수 없게 에워쌌다. 이렇게 포위 상태로 움직인다면, 어떤 함정에도 데리고 갈 수 없지 않은가.
대균열로 발생한 동굴은 미궁처럼 길이 사방팔방 뻗어져 있었다.
두변은 그들을 이끌고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등에 업힌 계표표의 몸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호흡이 점차 가빠지더니, 혼수상태임에도 몸을 뱀처럼 이리저리 꼬기 시작했다. 악려가 그녀에게 먹인 최음제가 약효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변은 자신의 옆에서 걸어가고 있던 악려의 호흡도 점차 가빠지는 게 느껴졌다. 계표표가 달아오른 만큼 주위 사람들도 엄청난 자극을 받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제발 꿈에서 본 게 절대적으로 맞기를!’
조금 전, 두변은 찰나를 이용해 꿈속 세계에서 예지를 봤었다.
이 짐승보다도 못한 놈들을 죽이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너무 처절해서 형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두변은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
이때, 참다못한 악려가 계표표의 엉덩이를 향해 손을 뻗자, 두변이 본능적으로 옆으로 몸을 틀어서 악려의 손을 피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 악려가 눈을 부릅뜨고 계표표의 바지를 벗기려던 찰나, 두변이 말했다.
“여기다.”
‘맞아. 내가 꿈속에서 봤던 곳이 바로 여기야.’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수십 개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돌기둥마다 알 수 없는 기이한 문자와 부호가 가득했다.
악려는 돌기둥 사이에 있는 무덤과 관을 발견하고 크게 기뻐했다.
‘저놈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군. 정신 공격 비급이 바로 이곳에 있단 말이지.’
악려가 검을 두변의 목에 갖다 대고 악랄하게 웃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네? 이 비급이 얼마나 위대한 건 줄 아냐? 이것만 있으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단 말이지. 이 비급을 가지기만 하면, 난 무림 전체를 패왕처럼 군림할 수 있다고. 네놈이 나를 위해 엄청난 공로를 세웠구나.”
“이제 원하는 걸 얻었으니, 우릴 보내줘.”
두변이 말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맞구나. 유치해 죽겠다. 내가 왜 너희를 그냥 보내줘야 하는데? 비급을 얻게 해줬으니까, 너를 그만 저승으로 보내줘야 하긴 하지. 하하하! 걱정하지 마라. 네가 업고 있는 계표표는 내가 몇 날 며칠을 맛본 뒤에 죽일 테니까.”
두변이 속으로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죽어라. 이 멍청한 놈아!”
악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두변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던 때, 두변은 눈을 질끈 감고, 재빨리 왼쪽으로 몸을 피했다.
“너나 죽어라. 패도회의 멍청한 놈들아!”
그 순간, 괴수 하나가 갑자기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서,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사람들의 시야에 나타났다.
지하의 악귀이자, 거의 무적인 기이한 괴수 단혼수였다.
바로 두변의 정신 공격의 원천인 단혼수!
단혼수의 두 눈은 기이하고 끔찍한 맹독성 기운으로 가득차 있어서, 단혼수와 눈을 한순간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그 사람은 혼백이 빼앗겨서 즉시 죽게 된다.
단혼수의 그 커다란 눈은 기이하고, 신비롭고, 치명적인 흡입력이 있었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단혼수에 당황해서는 미처 방비할 겨를도 없이 단혼수를 쳐다보고 말았다. 두변만 제외하고.
일순간 그들은 뇌가 폭발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영원한 암흑 속으로 의식을 잃었다.
모든 정신과 모든 혼백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말 그대로 혼비백산 그 자체였다.
그와 동시에, 두변의 등에 업혀있던 계표표는 약효가 극에 달했는지, 온몸이 타는 듯이 뜨거워져서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두변의 등에서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모든 이의 영혼을 날려버린 단혼수가 두변의 코앞까지 돌진했다. 단혼수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앞발로 두변의 얼굴을 쓸었다. 두변은 뼈마디가 시린 차가움에 몸을 움찔했다.
게다가 단혼수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면서 혀를 날름거렸다.
단혼수가 나타난 그 순간부터 두변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단혼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은 없지만, 대충은 상상이 갔다.
지하 세계의 악귀라고 불릴 정도로 끔찍한 괴물이 축축한 촉수 같은 앞발로 두변의 얼굴을 쓸고, 알 수 없는 말을 낮게 읊조리는 걸 듣고 있자니,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두변은 땀이 흥건해진 손으로 주먹을 한 번 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검을 뽑아서 자기 앞에 있는 단혼수의 몸을 찔러서 뚫어버렸다.
꾸룩. 꾸루룩!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단혼수는 눈만 끔찍할 뿐, 몸통은 무척 허약했다.
단혼수는 그렇게 두변의 검에 찔려서 한 방에 죽었다.
단혼수는 죽는 것도 기이한 편이었다. 검에 찔린 뒤에도 고통이란 걸 느끼지 못하고, 시야와 의식이 점점 더 흐려지면서 몸이 마비되어 가는 과정을 겪을 뿐이었다. 모든 단혼수는 의아한 상태로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꿈속 세계의 말에 의하면, 단혼수는 감각 자체가 없는 생물이라고 했다.
원래는 아주 평범한 괴수인데, 하필이면 죽은 자가 세상에서 제일 많은 동굴에서 서식한 게 문제랄까.
단혼수의 맹독이 온몸에 퍼지지 않고 두 눈알에 집중되어 있는 건, 억울하게 죽어간 무수히 많은 원혼이 단혼수의 눈알에 응축됐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 귀혼, 망령, 원혼 같은 존재가 없지만, 대지 균열로 생겨난 깊은 동굴 속에는 이런 영적인 것들이 에너지와 결합되어 존재했다.
단혼수가 완전히 죽었다고 판단한 두변은 슬며시 눈을 떠서 단혼수를 확인했다.
단혼수는 난쟁이와 유사하게 생겨서, 얼핏 보면 사람의 형상 같기도 했다. 1미터도 채 안 되는 키에 팔다리가 가늘고, 얼굴은 손바닥만 한데 그중 눈이 얼굴의 절반을 차지했다.
두변은 단혼수의 두 눈을 그대로 파냈다.
가뭄에 내린 단비처럼 반가웠다.
‘안 그래도 단혼 에너지를 다 썼는데, 제때 보충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
지난번에는 독침을 통해 단혼수 맹독을 얻은 셈인데, 이번엔 아예 단혼수 한 마리를 죽여서 두 눈알을 온전히 얻었으니, 기존보다 족히 열 배 이상의 단혼영 에너지를 얻는 게 아닌가.
단혼영 에너지가 충분하다는 건, 더 이상 이 필살기를 조심스럽게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리라.
두변은 패도회 소주인 악려에게 다가갔다. 혼비백산이 된 악려는 아직 몸에 생기가 남아있어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두변이 명상 상태로 들어가서 꿈속 세계와 대화했다.
“이자들의 단전 내력을 내가 흡수할 수 있습니까?”
기이한 불빛이 대답했다.
- 안 된다. 단전 안의 내력은 자발적으로 밖으로 발산할 때만 흡수할 수 있다. 자발적인 공물인 셈이지. 지금 네가 저놈들의 배를 가른다고 해도 단전은 눈에 보이지 않아. 단전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눈을 뜬 두변은 검을 쥐고 악려의 머리통을 댕강 잘랐다. 그리고 열댓 명의 무사와 장로 운철도 검으로 완전히 찔러 죽였다.
두변에겐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다.
단혼수가 죽으면 눈알에 응집한 단혼영 에너지가 빠르게 소멸하기 때문에 서둘러 단혼영 에너지를 눈알에서 빼내야 했다.
그런데 이때, 계표표가 엄청난 농도의 최음제 때문에 바닥에서 고통스럽게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뒹굴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계표표가 제 무공으로 손쉽게 최음제 약효를 누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주화입마 상태인 데다, 온몸의 근맥이 손상을 입었다. 종사급에 달하는 무공 실력임에도 속수무책으로 최음제를 견뎌야 했다.
두변은 서둘러 계표표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입에 작은 단약을 하나 넣어줬다. 이 단약은 근맥 치료에 효과적인 것으로, 영종오 대종사가 두변의 내상 치료를 위해 직접 연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화입마까지 간 계표표로서는 작은 단약 하나로 근맥을 치유할 수 없었다. 아주 조금이나마 효과를 보긴 하겠지만, 지금 그녀의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최음제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표범 같은 몸매가 불에 댄 듯이 뜨거웠고, 두 뺨은 발그레 상기되었다. 그녀가 뱉는 모든 숨이 교성과도 같아서, 두변까지 덩달아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두변의 단약 덕분인지, 계표표가 잠시 정신을 차리고 두변을 바라보았다. 주화입마 때문에 두변의 얼굴 윤곽 정도만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몹쓸 놈들은요?”
계표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다 죽었습니다. 제 꾀에 넘어가서요.”
두변이 대답했다.
“당신 얼굴을 못 보는 게 정말 아쉽네요. 얼마나 특출난 청년이길래 이렇게 용감하고 똑똑하고 지혜로울까요.”
계표표가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변이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아 진짜, 어이없네. 또 애 취급당하는군.’
계표표는 그의 목소리와 말투만으로 판단하고는 두변을 나이 어린 청년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계표표가 이어 말했다.
“놀랄 수도 있겠지만 잘 들어줘요. 난 지금 어떤 최음제에 중독되어서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 가요. 나도 최선을 다해서 그 고비를 넘기겠지만, 당신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어요.”
“말해요.”
두변이 얼른 대답했다.
계표표가 숨을 고른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최대한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요. 괜히 우리 둘 다 고통스러워할 짓을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요. 난 이번 생에 혼례를 올릴 생각도, 어떤 사내와 사사로운 정을 가질 생각도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