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장. 책임져 줄게
“알겠어요.”
두변이 대답한 뒤, 단혼수의 눈알을 손에 쥐고 최대한 멀리, 하지만 계표표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즉시 구할 수 있도록 시야에 계표표가 보이는 곳쯤에 멈춰섰다.
두변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최대한 빨리 단혼수의 눈알에서 에너지를 추출하는 것이었다.
두변은 계표표에게서 200미터 떨어진 곳쯤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시작했다.
“이제 어떡하면 됩니까? 단혼영 에너지를 제가 정제하면 되는 거예요?”
기이한 불빛이 대답했다.
- 그럴 필요 없다. 단혼수 눈알에 작은 구멍을 내서 안에 있는 단혼영 맹독이 흘러나오도록 해라. 그리고 눈알에서 흘러나오는 단혼영 맹독이 네 송과선에 가장 가까운 이마에 닿게 해.
두변이 화들짝 놀랐다.
“그건 뭐 자살하라는 말이랑 똑같이 들리는데요?”
- 크게 차이가 없긴 하지. 하지만 내가 네 송과선 안으로 침투하는 맹독을 빠르게 포획해서 네 정신 영역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다.
“이마에 맹독을 닿게 할 때, 송과선의 정신력을 개방해야 할까요?”
- 아니다. 완전히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그 어떤 저항도 하지 마라.
기이한 불빛이 한마디 덧붙였다.
- 아, 지금뿐만 아니라, 잠시 뒤에도 그렇게 하도록 해.
‘이건 뭔 말이야?’
기이한 불빛의 의미심장한 말에 두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명상에서 깨어난 두변은 단혼수의 눈알을 집어들었다. 영롱한 초록빛으로 빛나던 눈알은 더는 빛나지 않았지만, 수많은 혼귀들의 원망이 응집된 에너지가 휘몰아치고 있는 건 볼 수 있었다.
두변은 깊이 심호흡한 뒤, 바늘로 눈알에 구멍을 하나씩 냈다. 구멍을 뚫는 순간, 눈알에서는 액체가 아닌 기이한 연기 같은 게 밖으로 흘러나왔다. 서둘러 눈알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송과선과 가장 가까운 곳에 눈알을 갖다 대자, 두변의 머릿속에서 폭탄이 터진 것처럼 뇌리가 새하얘지고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졌다.
무시무시한 단혼영 맹독이 두변의 송과선에 무서운 속도로 침투하더니, 그의 정신을 파괴할 기세로 뇌 속으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두변의 머릿속에서 기이한 불빛이 수많은 광점으로 변해서 단혼영 맹독을 하나도 빠짐없이 포획하기 시작했다.
지난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 송과선을 통해 침투한 단혼영 맹독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열 배는 족히 넘는 양의 맹독이 끊임없이 두변의 뇌 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기이한 불빛의 광점들이 두변의 뇌를 공격하려는 단혼영 맹독을 한 톨도 놓치지 않고 모두 포획한 후, 그제야 두변의 정신이 차츰 맑아졌다.
이번 수확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풍성했다.
이번에 포획한 단혼영 에너지는 지난번보다 열 배 수준이 아니라 수십 배는 많았고, 두변이 열 번 넘게 치명적인 공격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양이었다.
이어서 두변이 해야 할 건, 꿈속 세계가 잡아둔 단혼영 맹독을 안전하게 단전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두변은 막강한 단혼영 에너지를 조심스럽게 조종하면서 근맥을 따라 차근차근 단전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계표표의 체내에 있던 최음제의 독성이 극에 달한 모양이었다.
악려가 계표표에게 먹인 최음제는 어떤 암컷 괴수에게서 추출한 것으로, 한 방울만 먹여도 처녀를 반쯤 미치게 만드는 고농축 최음제였다. 그런데 악려 그놈이 계표표에게 족히 두 모금이 될 정도의 양을 부어버린 것이다.
계표표는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노력했지만, 무공의 도움 없이 최음제 독성을 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최음제는 그녀의 체내에서 서서히 끓어오르더니 거대한 불길이 되어 계표표의 온몸을 불태웠다.
계표표는 스물아홉이 되도록 성적인 경험이 전무했다. 남녀 간의 일이든, 혼자서 즐기는 것이든, 그 어떤 것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수십 년간 폭발을 참았던 화산과도 같은 상태일 것이다.
이미 이성을 잃은 계표표에게는 살고자 하는 갈망밖에 남지 않았다.
계표표는 본능적으로 두변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릿했지만, 두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구양진경 기운을 따라갔다.
200미터 떨어진 곳까지 기어간 계표표는 두변의 무릎 위에 올라가서는 뱀처럼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그를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트린 뒤에 촉촉한 입술로 그의 입술을 탐했다.
하지만 두변은 지금 단혼영 에너지를 단전으로 옮기는 중이라,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계표표는 아무런 저항이 없는 두변을 밑에 깔고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변은 아직 양기가 부족한 환관인지라, 여인의 마음과 몸에 깊숙이 ‘들어가는 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남녀 사이엔 꼭 그런 것 말고도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계표표의 체내에 있는 최음제는 그녀가 밖으로 그 기운을 내뿜기만 하면 된다.
두변은 단혼영 에너지를 단전으로 옮기고 있는 터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을 덮치는 계표표를 그대로 받아들일 뿐.
그런데…… 계표표는 근맥이 상했는데도 암표범처럼 힘이 무궁무진했다.
심지어 마지막엔 두변이 혼절해버렸다.
단혼영 에너지를 옮기는 데 너무 많은 정신력을 쓰기도 했고, 무엇보다 계표표가 그의 입과 코가 막히는 자세로 너무 오래 있어서 숨을 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계표표는 지금껏 쌓아왔던 성욕을 미친 듯이 풀었다.
다음날 두변이 깨어났을 때, 누군가에게 흠씬 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심지어 몸 구석구석에는 남들에게 말 못 할 흔적이 잔뜩 남아있었다.
온몸이 뻐근한 두변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와. 정말 대단하네. 분명히 주화입마 상태였는데도 힘이 그렇게 넘쳐나다니.’
두변은 속으로 감탄했다.
두변이 혼절하기 전에 기억이라도 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절세미인 계표표에게 당한 게 아니라 건장한 사내들에게 맞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두변은 계표표가 온몸이 근육질인 사내보다도 힘이 셀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변으로서는 이번 기회에 계표표의 독특한 매력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알게 된 경험이었다.
적어도 어젯밤은 두변이 현대 지구에서도 겪어본 적 없는 밤이었다. 어젯밤은 황홀을 떠나 정말 혼비백산의 수준이었고, 잠자리를 가지다가 혼절한 경우는 살면서 처음이었다.
두변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계 소저는 어디 갔어?”
두변이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녀의 야릇한 체향만 남았을 뿐, 계표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두변은 뒤늦게야 자기 옆에 놓인 쪽지를 발견했다.
계표표의 글씨체는 꼭 그녀의 두 다리처럼 강인하고 힘이 넘쳤다.
‘난 먼저 가볼게요. 어젯밤 일 때문에 차마 당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겠어요.
난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어젯밤 일은 온전히 내 탓이에요. 내가 당신을 유린한 거죠.
잘못을 했으면 인정하는 게 맞으니, 나는 당신을 끝까지 책임질 거예요.
만약 내가 싫지 않다면, 청룡회로 와서 내 아버지께 혼담을 넣으러 와요.
이 쪽지를 들고 오면 될 거예요.’
쪽지 아래쪽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이 더 있었다.
‘난 원래 평생 누군가와 혼례를 올릴 생각이 없던 여인이에요. 그 덕에 아버지께서 숨넘어가실 지경이지만요. 만약 내가 혼례를 올리고자 한다면, 분명히 기뻐서 펄쩍 뛰실 거예요. 분명히 이것저것 따지지 않으실 것이고, 계씨 가문의 후대를 이어갈 수만 있다면 아무렴 상관없다고 말씀하실 거예요.’
그 아래로 또 문장 하나가 짤막하게 쓰여 있었다.
‘아, 당신이 그쪽으로 잘 안되는 건 알지만, 난 당신이 싫지 않아요. 우리 같이 합심해서 열심히 치료하면 될 테니,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요.
계표표.’
이름 석 자까지 확실하게 남긴 것과 그녀가 남긴 모든 말은 놀라울 뿐이었다.
아니, 놀란 수준이 아니라, 계표표에게 완전히 탄복하고 말았다.
두변은 혹시나 그녀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거나, 두변의 일족을 찾아내어 멸하겠다고 협박할 줄 알았다. 그녀는 두변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 누님이 나를 끝까지 책임져 줄 테니까, 자기 집으로 와서 혼담을 넣으라는 말 아니야?
우아, 진짜 패기 넘치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이토록 패기 넘치고, 배짱이 두둑한 데다 아름답기까지 한 여인은 정말 처음이군.’
물론 두변은 계표표가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여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로 패기만 가득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내상을 입은 몸으로 무리해가며 이곳을 떠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계표표는 당장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차마 어젯밤에 자신에게 유린당한 두변과 마주하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 먼저 떠난 것이다.
그럼, 계표표를 부인으로 맞이하라는 임무는 벌써 반 정도 진행한 건가?
두변은 엉망이 된 옷매무시를 정리하고는, 일단 이 미로 같은 동굴부터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족히 한 시진을 걷고 나서야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걸 본 두변은 자신이 동굴에서 고작 하루 하고도 반나절만 보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체감상으로는 어제부터 지금까지가 꼭 기나긴 한 세기를 거쳐온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서 영종오 대종사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을까 싶어 걱정되었다.
게다가 자기가 지금 정확히 어디 있는지, 백색부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고 얼마나 걸리는지도 알지 못했다.
결국 그는 대충 동서남북을 가늠해서 백색부가 있을 법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는 길 내내 계표표의 흔적을 아예 찾을 수 없는 걸 보면, 그녀가 꽤 일찌감치 이곳을 떠난 모양이었다.
주화입마 상태에 빠진 터라 근맥이 심하게 손상되었으니, 근맥을 아예 못 쓸 정도로 둘 게 아니라면, 계표표는 하루빨리 안전한 곳에서 요양을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두변이 모르는 사실 하나!
계표표는 어제 그 일 덕분에 동굴을 벗어나 집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광란의 밤을 보낸 계표표는 오랫동안 억눌렸던 무언가를 폭발시켰고, 그 덕에 그녀의 혈맥이 갑자기 뚫리면서 근맥 부상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두변이 먹였던 영종오 대종사의 단약 덕도 보았고.
하염없이 걷던 두변은 갑자기 누군가가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게 들렸다.
“두변! 두변!”
영종오 대종사였다.
‘대종사께서 어떻게 여기 계시는 거지? 날 찾아내신 건가? 우연치고는 너무 신기한데?’
하지만 이내 영종오가 어떻게 자신을 찾을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어젯밤에 여완완이 두변을 소리소문없이 납치한 건 맞지만, 그녀가 가진 특유의 향과 기운이 길에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영종오 대종사는 그 희미한 흔적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고.
“저 여기 있습니다!”
두변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있는 힘껏 외쳤다.
잠시 후, 영종오 대종사가 바로 나타나서 그의 어깨를 덥석 잡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괜찮느냐? 어디 다친 덴 없고?”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이어서 두변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을 영종오 대종사에게 말해줬다. 물론, 여완완과 나눴던 이전 숙주에 관한 얘기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이야기를 다 들은 영종오가 곰곰이 생각한 뒤에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지금 여완완은 네가 죽은 줄 알 텐데, 오히려 잘 됐구나. 넌 앞으로 두변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테니, 그게 네게 더 유리해. 넌 네가 백색부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모든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진 절대로 두변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선 안 된다. 네가 백색부에서 확실히 입지를 다진 뒤에 두변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해.”
어젯밤. 여완완은 두변을 심연으로 버린 뒤, 흡혈 괴인이 된 막영이 그의 피를 빨아들이는 걸 확인한 뒤에야 자리를 떠났다. 두변이 흡혈 괴인에게 흡혈 당한 이상,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두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사부와 같은 생각입니다. 운중사 가면은 다 만드셨나요?”
“다 만들었다. 두 사람이 생김새가 다르긴 한데, 얼굴 윤곽이 거의 똑같아서 네게 완벽한 가면이 될 것 같더구나. 내가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워가면서 가면을 완성했다.”
영종오가 곧바로 가면을 꺼내서 두변의 얼굴에 씌웠다.
얇디얇은 가면이 두변의 얼굴에 닿는 순간, 가면은 그대로 그의 얼굴에 흡수되다시피 일체화되었다.
이어서 영종오 대종사는 두변의 솜털을 한 가닥씩 가면 위로 빼냈고, 눈썹을 세심하게 다듬었다.
두변의 변장은 꼬박 두 시진이 지난 뒤에야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