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결별
계표표가 말했다.
“아버지, 저는 두변이 환관이라는 것도 알고, 동창의 백호라는 것도 알아요. 제가 이 사람과 혼례를 올리는 건 사실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우리 청룡회의 입장이죠. 지금 이 기회를 붙잡고 대녕 제국의 편에 서는 건 안 되나요? 몇억 신민의 편에 서자고요.”
계청주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몸이 떨려왔다.
“대녕 제국은 이미 썩을 대로 썩은 제국이다. 그해 이 아비가 겪었던 비인간적인 대우는 다 잊었느냐? 부정행위를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감옥에 갇혔고, 사존이 아니었다면 난 벌써 죽은 목숨일 게다.”
계표표가 반박했다.
“그건 문관 집단의 잘못이죠. 하지만 대녕 제국엔 문관 집단만 있나요? 이익 집단 외에 몇억 명의 백성들이 있어요. 그때 억울한 일을 당하시고, 감옥에서 아버지를 꺼내주신 건 누군가요? 사존께선 아버지를 살리려고 온갖 고초를 겪으시다가 결국 돌아가셨어요. 사존은 대녕 제국의 신민이 아닌가요? 그리고 새로 들어온 죄수 한 명이 아버지를 동정하는 마음에 아버지께서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줬었는데, 그 사실이 들키고는 오른손이 잘렸어요. 그 사람도 대녕 제국의 백성이에요.”
“어찌 이토록 천진난만하고 어리석으냐. 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너는 정치판이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 곳인지 모른다. 청룡회가 완벽한 중립을 유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아니요. 정반대예요. 우린 여씨 토사가 아직 서남 토사 연맹을 통일하지 못한 틈을 타서 대녕 제국과 손을 잡아야 해요. 그것만이 청룡회가 살길이라고요. 여씨 토사가 서남 토사 연맹을 통일하게 되면, 청룡회는 여씨에게 무릎을 꿇거나, 여씨의 손에 멸하게 될 거예요. 그때가 되면, 대녕 제국이 우릴 돕고 싶다고 해도 우릴 도울 수 없을 거예요. 그땐 대녕 제국이 힘이 없을 테고, 오늘날 우리가 대녕 제국의 편을 들지 않았기 때문에백색부에 남은 대녕 제국의 힘이 없어진 거니까요.”
계청주는 말문이 막혀서 몸만 부르르 떨었다.
계표표가 이어서 말했다.
“누구와 연합하고, 누굴 적으로 삼을지는 굉장히 간단해요. 대녕 제국은 청룡회를 집어삼키지 않을 것이고, 우리를 담을 그릇이 있어요. 하지만 여씨에게 우린 언젠가 제거해야 할 대상일 뿐이에요.”
두변이 속으로 감탄했다.
와, 영웅호걸이 따로 없군.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귓전을 때리고 사람을 각성시키는구나.
계청주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두변을 쏘아보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이 환관놈이 내 딸에게 무슨 혼미약이라도 먹인 거냐.”
계청주가 마지막으로 타이르듯이 계표표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 환관놈은 애초에 널 접근한 목적 자체가 불순하다. 저렇게 음험한 놈을 어떻게 믿는 것이냐.”
계표표가 말했다.
“아버지, 이 사람은 나를 구하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 나를 구했다는 이유로 악려 그 망할 놈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고요. 그것도 가짜인가요?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저는 벌써 그 망할 놈에게 온갖 수모를 겪고 죽었을 거예요. 환관에게 시집 보내는 게 안 내키신다면, 저도 혼례를 올리지 않아도 돼요. 대신 청룡회는 대녕 제국과 동맹 관계를 맺어야 하고, 청룡회가 공식적으로 동창을 지지해야 해요. 이건 우리 청룡회의 입장을명확히 하는 것이기도 하고, 제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는 거예요.”
“절대로 안 된다! 청룡회는 어느 쪽이든 줄을 서지 않는다. 그리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대녕 제국과 동맹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 그렇다면 전 이 사람에게 빚진 목숨값을 갚기 위해 혼례를 올릴 겁니다“저놈은 환관이야!”
계청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하지만 계표표는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전에, 아버지도 제가 혼례를 올릴 생각을 아예 안 하면서 살아왔다는 것도 알고 계시잖아요. 저는 남녀 간의 사사로운 감정 놀이에 관심 없어요. 제가 이 사람과 혼례를 올리는 건 하나의 의식에 가까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나 같은 편에 서서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의식이요.”
계청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경고했다.
“네가 저놈을 따라간다면, 기어코 대녕 제국을 택하겠다면, 나는 오늘부로 너와 부녀의 연을 끊을 것이다. 넌 더 이상 내 딸이 아니야.”
계표표가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 태도로 두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두변, 난 당신과 함께 떠날 수 있어요. 난 당신과 같은 편이고 싶고, 대녕 제국을 위해, 이 땅의 수억 백성을 위해 싸우고 싶어요.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해줬으니 난 당신이 환관이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두변, 나와 혼례를 올리지 않을래요?”
이때, 두변 머릿속에서 꿈속 시스템이 강하게 외쳤다.
- 절대로 좋다고 대답하지 마라. 계표표를 잘 어르고 달래서 청룡회에 남게 해. 그렇지 않으면 ‘육맥신검’ 비급을 영원히 잃게 되고, 청룡회의 지지도 얻지 못하게 된다. 계표표보다 청룡회의 힘과 ‘육맥신검’ 비급이 훨씬 더 중요해. 계표표는 그저 도구일 뿐이야. 쓰고 버려지는 도구일 뿐이라고!
‘아니요. 전 동상이몽인 사람들 천 명보다 내 편이 되고, 나와 함께 맞서 싸워줄 수 있는 전우 한 명이 더 필요합니다.’
- 계표표와 함께하길 택한다면, 넌 우리의 계획에서 완전히 어긋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에 따른 결과는 온전히 네가 다 책임져야 해.
‘시스템! 난 당신들의 숙주이긴 하지만 꼭두각시가 아니에요. 내 목숨을 수차례 구해준 건 정말 진심으로 고마워요. 나를 몇 번이고 위험에 빠트린 것도 괜찮아요. 다 당신들의 계획이니까. 하지만 당신들의 계획은 내 참고일 뿐입니다. 내 운명은 내가 주도할 거니까.’
- 넌 한낱 인간일 뿐이다. 볼 수 있는 시야가 좁고, 감정에 좌지우지 당하기 쉽지. 그래서 늘 멍청한 결정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계획된 임무를 처참히 실패하게 만들어.
‘시스템! 나 이전의 수많은 숙주가 당신들이 시킨 대로 했는데도 실패한 원인을 모르겠어요? 어째서 단 한 명도 성공하지 못했는지? 당신들이 이 세계 누구보다 똑똑하고 수치에 기반한 계획과 판단을 내리는 건 알지만, 당신들은 감정을 느끼지 못해요. 이 세계에선 이성에만 의존해서 해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사람들은 이성뿐만 아니라, 가슴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만 포부를 가질 수 있고, 그 포부를 이룰 수 있어요. 당신들은 뜨거운 심장이란 게 없으니까, 여태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겁니다.’
꿈속 시스템이 크게 타격을 받은 것처럼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다시 두변에게 말했다.
- 숙주가 명령을 어기게 될 경우, 시스템에 의해 즉시 죽게 된다. 마지막 경고다!
계표표가 두변에게 손을 내밀고 물었다.
“두변, 난 당신과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고 싶다. 나와 함께 하지 않겠나?”
두변이 의식으로 꿈속 세계에게 말했다.
‘시스템, 미안하지만, 난 내 운명을 내가 주도하겠어요. 기어코 날 죽이겠다면, 그렇게 해요.’
두변이 계표표의 손을 맞잡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일순간, 두변의 머릿속이 환한 빛으로 뒤덮이더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두변의 머릿속은 마치 순식간에 번개라도 친 것처럼 환해졌다가, 이내 적막과 어둠으로 가득 채워졌다.
이게 죽은 느낌인가?
찰나가 지난 것 같기도, 영겁의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할 때, 두변의 머릿속에서 기이한 불빛이 나타났다.
- 느낀 게 있는가.
‘네. 이게 죽음의 느낌이군요.’
- 무서운가?
‘무서워요. 끝도 없는 공허함과 어둠, 그리고 차가움이 느껴지네요.’
- 앞으로도 내 명령을 어길 건가?
두변이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내 생각은 바뀌지 않았어요. 당신들이 계획한 노선이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존중하지만, 선택권은 내게 있어요. 나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이지 꼭두각시가 아니거든요.’
- 죽는 게 두렵지 않다는 말인가.
‘두렵죠. 하지만 지금 내가 물러서게 된다면 분명히 평생을 후회하게 될 텐데요. 남에게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어요.’
- 네가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말을 빌미 삼아 우리를 협박하는 건가? 우리가 널 죽이지 못할까 봐서?
‘그런 생각이 아예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지금 이 결정은 온전히 나의 의지입니다.’
- 네가 두 지구에서 유전자가 일치하는 마지막 초월자인 건 맞지만, 꼭 너여야만 되는 건 아니다. 우린 이 지구에 있는 현지인을 교화시키면 돼. 이곳의 현지인들은 현대 지구의 교육을 받지 않았으니, 우리가 말하는 걸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꼭 너여야만 한다는 착각은 버려라.
‘하지만 이 지구의 현지인은 다른 지구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죠. 그들에게 다른 지구의 존재를 이해시키지 못하는 게 치명적인 결함이겠죠.’
- 두변, 내가 없다면, 넌 다른 지구에서 그저 놀고먹을 줄만 아는 바람둥이였을 뿐이다. 이 세계에서도 너는 힘없는 환관에 불과하지. 내가 없다면, 넌 천재도 아니고 뭣도 아니야. 백색부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넌 시스템 없이 사흘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꿈속 시스템이 말을 이었다.
- 시스템을 이용하고도 싶지만, 시스템의 명령을 어기고도 싶다라. 꿈 깨라. 넌 지금 선택을 해야만 한다. 우리의 말을 얌전히 들으면서, 우리가 내리는 모든 명령에 거역하지 않고, 내가 짜놓은 노선대로 움직여라. 그렇지 않겠다면, 난 그 어떤 말도, 네게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을 것이고, 네가 멍청하게 이리저리 치이다가 죽는 꼴을 볼 것이다.
‘개가 될 게 아니라면, 도움을 바라지도 말라는 뜻인가요?’
- 그렇다. 넌 나 없이 천재도 뭣도 아니고. 너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거다.
‘제가 한 번 <원피스>에 등장하는 해적 사냥꾼 조로가 돼보죠.’
- 지금 계표표는 주화입마 상태에 빠져서 단전과 근맥이 크게 손상됐다. 여태 쌓아온 무공 수련도 8할은 쓸 수 없게 됐어. 계표표는 네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녀의 근맥과 내상을 완전히 고치려면, 이 세계의 약으로는 불가능하다.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성원단(聖元丹)으로만 치료할 수 있다. 성원단이 어디에 있는지는 나만 알고 있으니, 네 힘으로 계표표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한번 해보죠. 내 힘으로 계표표를 구할 수 있나 궁금하지 않아요?’
- 위험천만한 백색부에서 고작 열 명도 안 되는 사람으로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동창은 백색부의 최약체다. 내가 정해준 노선대로 가지 않았으니, 청룡회의 지지도 받을 수 없을 거다. 넌 무공을 절반 이상 잃은 계표표를 선택하고, 청룡회를 포기하는 아주 멍청한 짓을 했다. 내 도움 없이는 막씨 가문의 보물을 얻을 수도 없을 것이고, 백색부에서 그 어떤 무장 부대도 꾸릴 수 없다. 넌 백색부에서 열 명도 안 되는 사람과 사흘도 못 버틴다.
‘그래도 한번 부딪혀보고 싶어요. 난 시스템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고 갈망하지만, 그 대가가 꼭두각시가 되고 완전한 복종을 하는 개가 되는 거라면, 차라리 내가 그 길을 한 번 만들어 보려고요.’
- 네 바람대로 난 앞으로 네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네가 나 없이 어디까지 멍청한 짓을 할지 기대해 보마. 네가 죽을 때 제발 내게 나타나 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다. 난 네가 차가운 주검이 되도록 내버려 둘 거니까. 네가 죽으면, 우린 이 지구의 현지인을 이용해서 플랜 B를 시행할 것이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세요. 내가 정말 죽나 안 죽나. 이 위험천만한 백색부에서 온전히 내 힘으로 일어설 수 있나 없나.’
꿈속 시스템은 그렇게 대꾸도 없이 두변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